29. 나한테 와요
“아씨, 누구야?”
“나아쁜 놈.”
얼굴이 빨갛게 익은 나미가 태경의 뒤에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어, 나미야아.”
저만치 떨어져 앉아 있던 나미가 곁에 온 것만으로도 좋은 수안이 웃음부터 내보였다.
하지만 나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수안을 흘겨보다가 태경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아쁜 놈, 너는 아주 나아쁜 노옴이야.”
“야, 유나미. 갑자기 왜, 어어?”
선언하듯 말하고 돌아서던 나미가 휘청거리자, 놀란 태경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축했다.
“야, 많이 취했나 보다. 한태경 네가 얼른 데려다줘라. 이건 택시비 하고.”
지켜보고 있던 재호가 얼른 일어나 태경의 재킷 주머니에 만 원짜리 몇 장을 찔러 넣어줬다.
“나두, 나두 갈게. 현진이 언니한테…….”
“에헤이, 아니지. 우리 수안이 후배님은 나랑 한잔 더 해야지. 내가 책임지고 데려다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응?”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수안의 어깨를 재호가 묵직하게 눌러 앉혔다.
술기운에 무뎌진 감각에도 어깨에 닿은 재호의 손에 거부감이 일었다.
멈칫 굳어졌던 수안이 어깨를 살짝 틀며 그의 손을 떼어내자, 피식 웃어 보인 재호가 상체를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우리 수안이 왜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모르겠어? 쟤네 둘이 썸 타는 중이잖아. 사이에 껴서 방해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재호가 한쪽 눈을 찡끗거리며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안의 시선이 자연스레 나미를 부축하고 선 태경에게로 향했다.
상당히 난감한 표정의 태경이 인사불성인 나미를 끌어안다시피 부축하고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난데없이 태경에게 나쁜 놈이라 말하던 나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둘이 썸 타는 중이라는 재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눈치 없이 중간에 끼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서 갑자기 미안해졌다.
현진을 불러서 그 차를 타고 가면 더 편할 테지만, 그렇게 하면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는 꼴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태경아,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봐아.”
되도록 또박또박 건넨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경이 낮은 한숨 한 자락을 토해냈다.
“나미 데려다주고 바로 올게. 술은 더 마시지 마.”
“걱정 마, 걱정 마. 안 와두 돼. 얼른 가, 얼르은.”
수안이 환히 웃음 지으며 손을 휘적거리자, 태경이 마지못한 듯 발걸음을 옮겨 감자탕집을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좇고 있던 수안의 어깨 위로 재호의 손이 툭 내려앉았다.
“허억!”
“어이구, 왜 이렇게 놀라?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아, 아니요. 그냥 갑자기 손을 대니까…….”
“크크, 앞으로 백수안이 만지려면 허락받아야겠네. 그러면 되지?”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자자, 우리 술이나 마시자.”
재호가 수안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채우고는 자신의 잔을 부딪쳐 왔다.
마지못해 잔을 들긴 했는데, 술은 더 마시지 마라는 태경의 말이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갑자기 마시기가 꺼려졌다.
게다가, 쓸데없이 흘리는 재호의 웃음이 좀 전보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저, 저기, 화장실 좀…….”
술잔을 내려놓은 수안이 휴대폰과 가방을 챙겨서 쭈뼛쭈뼛 일어났다.
“어? 혹시 도망가는 거?”
“아니에요. 지인짜 화장실 가려구…….”
“그럼 가방은 오빠한테 맡기고 가자. 응? 얼른 갔다 와.”
강제로 가방을 빼앗겼다. 잠시 망설이던 수안은 하는 수 없이 휴대폰만 들고 식당 뒤쪽의 화장실로 향했다.
“신재호 이 새끼, 이번엔 쟤냐?”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향하는 수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재호의 옆에 덩치 큰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뭔 개소리야?”
“너 인마, 신입생 킬러라고 소문 다 났어.”
“어떤 새끼가 그딴 헛소리를 지껄여?”
“그래서, 쟤 안 건드릴 거라고?”
“나를 뭐로 보고. 당연히 접수해야지. 큭큭. 내 옆에 앉아서 실실 웃는 거 봤지? 쟤 나한테 완전 뻑 갔어. 크크.”
키득거리며 술잔을 드는 재호의 뒤통수를 툭 친 남자가 이내 같이 키득거렸다.
“크크, 하여튼 새끼, 예쁜 애들은 다 지 차지지.”
“이놈의 인기를 낸들 어쩌겠냐고. 하여튼 백수안 화장실에서 나오면 슬쩍 빠질 거니까, 뒷정리는 네가 좀 해라.”
재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카드를 받아 드는 남자에게서 비릿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계 서열에 끼지도 못하는 해신기업 오너 아들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도 되는 것마냥 거들먹거리는 모양새가 아주 웃기지도 않았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여자애 하나 잘못 건드려서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군에 갔다 온 놈이 복학하자마자 또 껄떡대고 있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하지만 뭐, 이놈이 뭔 걱정이겠어. 이놈 눈에 띈 여자애가 걱정이지.
보기 드물게 예쁘다 했더니, 쩝! 하필이면…….
“알았다, 새꺄. 아주 몸이 달았구만.”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새꺄.”
두 사람 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화장실 쪽을 바라보며 음흉한 웃음을 배어문 채 말이 없었다.
목이라도 타는지 각자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부딪치고는 홀짝 삼켰다.
한편, 화장실로 향한 수안은 찬물을 틀어 손을 씻은 뒤, 화끈거리는 볼에 가져다 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굴곡져 보였다. 똑바로 바닥을 디디고 있는데도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정도 몸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듯 자꾸 제멋대로 휘청댔다.
“이거 정말 취한 건가 부다, 후우.”
누군가 머리를 잡고 뒤흔드는 것 같았다. 마음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들떠 있는데, 몸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 만큼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국밥 상태면 뭔 일을 내도 낼 것 같았다.
철저한 자기관리가 몸에 밴 수안으로서는 가히 마음에 드는 상황이 아니었다.
술은 난생처음이라 어느 정도 마셔야 취하는지, 취하는 게 어떤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우울했던 기분을 업 시키고, 위축되는 마음을 담대해지게 만드는 술의 기능에 심취해 취하는 줄도 모르고 술잔을 기울였다.
사실 믿는 구석이 있어 한 번쯤 취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있었다.
보이진 않지만 식당 밖 어딘가엔 현진이 그녀의 귀가를 돕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테고, 너무 취해 정신을 못 차리게 되더라도 착실하게 연락을 해줄 든든한 친구 태경도 옆에 있었다.
그런데 태경이 가버렸으니.
게다가 질척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재호의 웃음은 점점 소름 끼치는 수준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솔직히 도망치듯 빠져나온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게 꺼려졌다. 그렇다고 별로 쾌적하지 않은 식당 화장실에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아무래도 현진에게 연락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꺼냈을 때, 수안의 눈을 사로잡은 연락처는 얼마 전 아저씨에서 겁쟁이 아저씨로 강등된 사람의 것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뜬 ‘겁쟁이 아저씨’라는 글자를 마치 그인 양 노려보고 있던 수안이 술기운을 빌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받지 않거나 꺼져 있거나. 암튼, 요 며칠 수안에게 그의 휴대폰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사실 받을 거라 생각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 건 아니었다.
그저 며칠 사이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그가 너무 궁금해서 신호음이라도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 바닸따!”
믿을 수 없게도 한없이 이어지던 신호음이 끊겼다.
수안은 혹시나 다른 사람 번호를 잘못 누른 건 아닌가 싶어서 휴대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맞는데에, 이거 아저씨 번호 맞는데에. 왜 받지? 왜 바다찌?”
[너 인마, 술 마셨어?]
“와아아아! 어뜨케 아라찌? 아저씨 나 보여요?”
[백수안 너 인마, 진짜, 후우! 수안아, 얼른 거기서 나와. 최현진 씨 바로 가라고 할 거니까…….]
“시른데에.”
[뭐?]
“쳇, 겁쟁이 아저씨 말은 안 들을 거거든여. 나 여기 있는 술 다 마시고 갈 거야.”
[무슨 술을 더 마신다는 거야. 지금도 취한 것 같은데. 수안아, 고집부리지 말고 말 좀 들어. 응?]
“고집쟁이는 아저씨면서.”
떼쓰듯 쏘아붙여 놓고 숨만 쌕쌕 몰아쉬었다.
화를 가라앉히려는 건지, 아니면 답답해서 그러는 건지, 휴대폰 너머 도훈의 숨소리도 약간 거친 듯했다.
그러다 이내 숨소리마저 잠잠해졌다. 겁이 덜컥 났다.
키스를 하고 난 뒤 돌변했던 그 순간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한 번 끊고 나면 다시는 전화 안 받을지도 모르는데.
“여, 여보세여? 아저씨? 아저씨이.”
[말해.]
“휴우, 안 끊었다.”
안도의 숨을 토해내며 세면대 옆 벽에 툭 기대섰다. 그와 동시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수안아, 백수안, 거기 있어?”
재호였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수안을 찾아 여자 화장실 입구까지 온 모양이었다.
“네? 네, 선배.”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낸 수안이 밖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수안아, 오빠 기다린다. 얼른 나와라. 우리 술 마셔야지.”
[오, 오빠? 그놈 뭐야? 누군데 너더러 오빠래?]
휴대폰에서 도훈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귀에서 꽤 떨어진 상태인데도 마치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우렁찼다.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는 도훈으로서는 참 의외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용기가 생겼다. 아니, 취기에 부리는 오기라고 해도 좋았다.
[백수안, 술은 더 이상 안 돼. 수안아, 내 말 듣고 있어?]
“와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와요.”
내가 걱정되는 거라면 직접 와요.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다 댄 수안이 조용히 속삭였다.
[일단 거기서 나와. 우선 현진 씨와 함께 이동하면…….]
“싫어요. 아저씨 안 오면 나 안 가. 저 선배랑 술 왕창 마실 거야. 저 선배 완전 음흉한 게 딱 내 취향이야.”
[야, 인마. 너 미쳤어? 거기서 끌어내기 전에 얼른 나오지…….]
“보고 싶어. 그러니까, 나한테 와요.”
도훈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통화를 종료하고 전원을 꺼버렸다.
처음부터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저도 모르게 툭 뱉어놓고는 쿵쾅대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차도훈이 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