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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썩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요?’
내가 되묻자 이그드라실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 태도에 눈치 없는 나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냅다 찍은 게 맞았구나. 옛일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게 맞았어!
하긴, 물론 어떻게 생각하자면 오천 년이나 지난 일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는 게 맞지 않을까. 이그드라실이 제아무리 신이라고 불리는, 인간 외의 존재라고 해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사하크가 자신을 배신했다…… 라는 단편적인 사실들뿐일 터였다. 그리고 그때 알았던 배신감과 절망감 정도?
……뭐가 되었든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그냥 이 힘을 되찾아갈 방법을 이그드라실 본인조차 명확하게 모른다는 것만 확실해졌을 뿐이다.
“거기까지 하자꾸나.”
‘아, 아니……. 저기!’
이그드라실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는 것에 나는 발악하고 보았다.
‘나, 할 수 있다니까요! 정말로!’
이건 근거가 넘치는 자신감이었다. 나 정말 할 수 있어!
‘그간 악신이라고 해서 미안해요! 두 번 다시 그러지 않을게요, 꼬박꼬박 이그드라실이라고 부르고 섬기고 절도 잘 할게요. 나도 내 몸을 빼앗기니까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랬다고요! 그냥 믿고 맡겨줘 봐요! 무사히 돌려줄게!’
“아가야.”
이그드라실은 웃는 듯한 음성으로, 단호하게 나를 불렀다.
“만에 하나라도 말이다. 네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치자.”
서늘하기 그지없는 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널 믿을 이유는 없다.”
나는 잠시 멈칫거려야 했다. 평소였다면 눈이라도 멍청하게 끔뻑거렸을 텐데,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 박자 늦게 되물어 볼 뿐이었다.
‘……네에?’
“네가 날 도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란다.”
쓸데없이 친절한 설명이 뒤를 이었다. 부드러운 어조에는 뼈가 있었다. 그것도 매우 두껍고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게.
‘왜, 왜요?’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날 돕는다고?”
이 상황이 뭔데……. 아참, 나 내 몸 빼앗긴 상태지?
그러게. 이그드라실은 내게 죄를 저지른 상황이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수가 없을 터였다.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다.
‘…….’
“바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아.”
……그래, 그런데도 정말 도와줄 생각을 한 난 바보다. 아니, 바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으니까 바보만도 못한 건가?
우씨. 어쨌든 간에 나는 필사적으로 이그드라실을 붙잡고 보았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질 체력 육신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난 살고 싶다고요. 살아가고 싶단 말이에요.’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인간은 없다지만 나는 조금 더 필사적이었다. 하, 참. 기구한 인생 같으니.
“그래서.”
이그드라실은 차갑게 대꾸했다. 사실 그 태도에 정말 미친 척하고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고 싶었지만 아쉬운 건 나니까, 참아야 한다.
‘릴도, 저도 이 힘을 딱히,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이그드라실,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일을 입술에 얹었다.
‘언니를 살려주셨잖아요.’
그것만큼은, 정말 그것만큼은 감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말에 이그드라실은 피식거리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저기요, 남 얼굴 그렇게 막 쓰지 말라고요! 난 그렇게 비열하게 웃지 않는다고!
“그런데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고?”
‘그건 좀 다른 문제라고요.’
“다른 문제? 어떤?”
‘그 힘 덕분에 소중한 사람들과 멀어졌으니까요.’
아직도 가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한 삼 박 사 일은 꺼이꺼이 울어줄 자신도 있다. 사실 애초에 이 힘이 없었다면 언니를 잃을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감사하게 생각하는 일인데, 진지하게 되돌아보면 병도 받고 약도 받은 격이다. 이런 젠장.
‘전 누구에게 섬김받고 싶지 않아요. 그냥 프리드린이고 싶다고요.’
“그냥 프리드린이라.”
‘평범하고 소박하게, 가늘고 길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리고! 릴도 그냥 릴이고 싶었대요.’
진심은 통하는 걸까. 간곡하게 속삭이자 이그드라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그런데 날 평범하지 못하게 만든 당신의 힘을 돌려줄 수 있다면, 그냥 프리드린과 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야말로 좋아할 일이잖아요. 좋은 일을 두고 내가 뭐 하러 당신을 속이겠어요? 안 그래요?’
이그드라실이 한 차례, 두 차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나서는,
“하하…….”
문뜩 이그드라실은 힘없는 음성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의미 모를 웃음에 그 의미를 물어보려고 할 때 문이 왈칵 열렸다. 쾅! 유독 시끄러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짜증 가득한 얼굴을 한 릴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여전히 소리 내어 웃고 있는 이그드라실을 보며 그가 눈을 부라렸다. 시비를 걸 듯 틱틱대는 음성이 이어 들렸다.
“뭘 웃고 있어?”
“왜. 웃으면 안 되느냐?”
“네가 대체 뭘 잘했다고 웃어.”
이그드라실을 노려보는 릴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어지간히 화가 난 듯싶었다.
……정말 이그드라실이 내 육신을 차지한 것만 아니었더라도 당장 몇 대 때렸을 기세였다. 게르드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이그드라실의 나뭇가지를 몇 개 부러뜨리지 않을까.
릴이 주먹을 꾹 움켜쥐고 있었다. 하얗게 힘줄이 선 손등이 안쓰러워 보였다.
“이봐, 이시스.”
“왜 부르느냐.”
“내가 살다 살다, 프레이르에 전승되는 신화와 그 해석을 전부 뒤져보게 될 날이 올지는 몰랐거든?”
‘…….’
그건 내가 생각해도 의외였다.
신화를 들여다보며 이그드라실의 신성함을 느끼는 릴이라니. 오, 이것보다 안 어울리는 장면이 있을 줄이야.
릴이 있는 힘껏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참 쓸데없는 짓이더라?”
“왜지?”
“신화는 어디까지나 전승되는 거라, 해석의 길이 천 갈래 만 갈래잖아. 진실을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데에도 뭐 있고 말이야.”
“맞게 보았구나. 그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 언제나 왜곡되기 마련이지.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더하기도 하고.”
그 말에 문뜩 생각했다. 이그드라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헛갈려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기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바뀌어버린 불분명한 것들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하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것조차 이그드라실의 착각이지는 않을까. 신화처럼, 이그드라실은 그저 사하크의 곁에 몸을 뉜 채 이 땅의 수호신으로 남으려고 한 건 아니었을까.
진짜 진실은 아득한 과거에 파묻혀 버린 채겠지만. 이제 알 수 없겠지만.
이그드라실을 마주한 릴이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생각이란 걸 좀 해봤거든.”
이윽고 그 입에서 경악할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죽어주면 돼?”
‘……응?’
그대로 식겁한 나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이어서 습관대로 어깨를 들썩이려고 했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 몸은 답답할 뿐이었다.
‘리, 릴? 그건 아니잖아!’
당장이라도 내뱉고 싶은 필사적인 말이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저절로 움직인 입꼬리가 비뚤게 말려 올라갔다. 미묘한 희망이 넘실거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아이야, 이만 결심이 섰느냐?”
“대답이나 해봐. 그게 네가 원하는 건가?”
고개가 아래위로 두어 차례 움직였다. 릴이 피식, 하고 기막힌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악신이네. 이걸 수호신이라고 섬기다니, 참.”
제법 살벌한 비난에 이그드라실은 약간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날 원망하지는 말거라.”
“아니. 원망할 건데?”
“그럼 마음껏 원망하거라. 바뀌는 건 없으니.”
‘아니, 아니! 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육신 어딘가에 갇힌 나는 필사적으로 발악했다. 게거품을 물며 날뛰고 싶었다.
정말 내 안에 존재하는 온갖 의지를 다 끌어모았다. 본능적으로 생각해도, 곰곰이 따져보아도 저건 아니었다.
릴이 한 차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호수처럼 깊고 푸른 눈망울이 하얀 눈꺼풀 안으로 사라졌다.
모든 것을 체념하는 것만 같은 태도에 내 눈앞이 아찔하게 진동했다. 나 때문에 릴이. 내가 육체를 빼앗기기나 해서 릴이 저런 선택을 한다고.
오열이 치솟을 것만 같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거 아니라고!”
내 마음의 소리는 선명한 울림이 되어 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