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94화 (94/115)

94

“그나저나 생각보다 아그리스에서 길게 머물러야 할 거 같아.”

이윽고 내 뺨을 꼬집듯 잡아서 주욱 늘린 릴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에 반쯤 끌려간 나는 조금 부정확한 발음으로 대꾸해야 했다.

“왜요? 이 근방의 가뭄이 그렇게 심각한가요?”

“심각하다기보다는……. 애초에 건기니까 비가 내리지 않는 건 당연하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맞는 말이라서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보았다.

프레이르가 아무리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라고 해도, 기후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편이었다. 그중 서쪽 지방의 건기는 유독 길고 심각한 편이긴 했다. 캄신까지 불어오는데 할 말은 다 한 셈이다.

다만 건기에는 세상 모든 게 가물었다. 그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건기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그거야말로 나라가 뒤집힐 대사건이다.

“대충 이 지역에 비를 내려주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지. 아니, 아주 쉬운 일에 속해. 하지만 건기를 아예 끝낼 방법은 없거든. 기후를 바꾸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니까.”

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저 말에 이그드라실이 했던 말이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

― 왕가를 유지할 명맥으로 둘 중 하나는 남겨야 했지. 하지만 이 고약한 사막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면 너보다는 그 아이의 힘이 낫잖니? 나은 정도가 아니라 그 아이의 힘은 확실히, 지금도 유용하지.

…유용하다 못해 사용도가 넘치는 힘이었다. 지금 릴이 혹사당하고 돌아온 것만 봐도 그랬다.

무, 물론 하비에르가 광신도답게 이상한 난리를 쳤겠지만. 그러니까 지금 그가 저렇게 피골이 상접한 꼴이 된 게 아닐까.

아, 하비에르를 몇 대 쥐어박으면 속이 좀 괜찮아질 것 같다. 내 남편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놓을 수가 있냐고! 봐줄 만한 건 멀쩡한 겉껍데기밖에 없는 사람을!

“형님께 덜 혼나려면 열심히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껍데기만 멀쩡한 릴은 슬그머니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내 머리가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 닿았다.

“그래야 너와 두 번 다시 헤어지는 일이 없을 텐데.”

감동이 밀려온다기보다는…… 내 가슴에 덜커덩, 하고 걸리는 게 있는 말이었다. 나는 릴의 너른 가슴팍에 안긴 채 눈을 두어 차례 끔뻑였다.

“그냥…… 여기에 더 있고 싶은 거죠?”

내 말에 순간적으로 릴이 몸을 움찔거렸다. 오호라, 정곡을 찔렸구나!

배시시 웃은 나는 친절하게 뒷말을 이어 나갔다.

“돌아가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달릴 테고, 말리크께서 또 어떤 일을 시키실지 모르니까.”

그에 어깨를 다정하게 안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강해졌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내 말이 정답이라는 걸.

…일하기가 참 싫은가 보다. 나는 너무 심심해서 일이라도 하고 싶은데 말이야.

어쩌면 릴과 나는 이렇게 정반대의 성향일까. 나는 성격적으로 가만히 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훅, 한숨이 저절로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릴, 조금만 성실하게 살아봐요. 그러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릴을 아주 사랑해줄 거야.”

“싫은데.”

얄미운 목소리였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난 네 사랑만 받으면 돼.”

“성실해지면 아낌없이 사랑해줄게요.”

사람이 최소한 성실하기라도 해야지. 릴은 어울리지 않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프리드린……. 놀고먹는 백수가 얼마나 좋은 직업인지 알아?”

“백수는 직업이 아니거든요?”

“이거 정말…… 엄청 따지네.”

언젠가 한 번 들었던 말이 릴의 입술을 비집었다. 이번에는 그때와 다르게, 세상 당당하게 그의 말에 꼬투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람한테 이거 저거 하지 말고요!”

“…….”

릴은 할 말을 상실한 듯, 기막힌 시선으로 나를 볼 뿐이었다. 어허허, 이것 참 장족의 발전이다.

* * *

아그리스에서 보내는 릴과의 시간은 달콤할 뿐이었다.

눈치를 볼 것도 없었고, 우리를 방해할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냥 릴의 곁에 찰싹 달라붙은 채 그가 하는 일을 구경했다. 가끔 캄신이 올 기세가 보이면 그걸 가라앉히거나 하면서.

물론 지독한 광신도 하비에르는 성에 떼어놓은 채로.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늦은 밤, 분명 릴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잠에 들자마자 나를 반기는 것은 왕실의 중앙 신전이었다.

[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내 앞에 선 이그드라실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어왔다. 그 얼굴은 결단코 부드럽지 못했지만.

“못 한다고, 안 하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이그드라실과 내가 할 이야기는 저것뿐이었다. 하비에르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겠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따지기 시작했다.

그 광신도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니 다행이다.

“세상에 어떤 신이 사람을 죽여서 오라고 해요?”

[착각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그드라실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 비틀린 미소를 덧그렸다. 묘하게 등골이 서늘한 얼굴이었다.

[아가야, 난 너희에게 신으로 섬겨달라고 한 적이 없다. 너희들은 너희 멋대로 날 신으로 삼고, 섬기고, 오천 년이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어.]

뭐라고…… 반박할 말이 순간 사라졌다. 내가 들었던 해석이 전혀 먹히지 않을 말이었으니까.

……그 광신도, 전혀 쓸모가 없는 게 맞네.

[나는 이제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을 뿐이야.]

오천 년.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배신감에 떨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꾼 이그드라실이 가엾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그드라실보다 나와 릴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누군가의 목숨이 걸렸다면 더.

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화를 참는 듯한, 사나운 얼굴의 이그드라실을 보며 물었다.

“근데 왜,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릴 사람이 저와 릴이어야 해요?”

[왜?]

내 질문에 이그드라실이 반문했다. 이윽고 답을 남겼다.

[넌 내 후예니까.]

“……네?”

[내 복수는 네가 해줘야지. 그게 당연하지. 그러니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나를 바라보는 이그드라실의 눈이 처량했다. 그 목소리도 애원하듯 물들었다.

[내가 정말 너의 신이라면, 너는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니?]

“그를 사랑하니까요. 왜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시는 거예요?”

엉겁결에 대꾸한 말에 깨달았다.

그래, 사랑이구나. 내가 입버릇처럼 외쳤던, 잘생긴 기사님과의 로맨스를 남편과 하고 있었구나.

뒤늦게 깨달은 설렘에 두근거리는 내 마음과 반대로 이그드라실은 으득, 이를 갈았다. 고요했던 공간을 가득 채우는 소리가 유달리도 섬뜩했다.

[사랑?]

애틋했던 음성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내가 분명히 경고를 해주지 않았더냐? 사랑의 꿈은 단 한 순간만 달콤할 뿐이라고. 누구든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지난 며칠이 달콤하긴 했다.

사하크에게 배신당한 이그드라실은 이 모든 게 허상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잘 사는 부부가 훨씬 많잖아?

내 표정에서 저런 생각이 읽혔던 듯 이그드라실은 사납게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나는 또다시 오천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만 년을 이렇게 더 보내야 할지도 모르지.]

화가 난 걸까. 순간 나를 노려보는 흰자위에 핏발이 섰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모양새였다. 더 이상 이그드라실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삼킨 나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분명히 기회를 줬는데.]

이그드라실은 끝없이 뒷걸음질 치는 내게 훅 가까이 다가왔다. 분명히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한다고 말했던 손이 나를 붙잡는 것만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겁에 질린 성대는 목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나를 내려다보던 이그드라실은 사납게 읊조렸다.

[이제부터 있을 일은 모두 네가 선택한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그드라실이 사라졌다. 내 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움직이고 싶어 한 적이 없던 손끝이 저절로 움직였다.

‘왜 이래?’

당황할 때, 얼굴도 저절로 움직였다. 천천히 숙여진 시선에 담기는 손끝이 마냥 하얗다.

마치 갓난아이가 처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내 손가락이 움직였다.

‘뭐, 뭐야?’

내가 내뱉고 싶은 말은 입술 밖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입술이 분명히 움직였다. 내 의지가 아닌 말을 만들어낸다.

“참 오랜만이야. 육신을 입는 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