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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엉뚱한 소리에 그는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그렇게 안 작거든요?”
이래 봬도 다들 인정하는 평균 키였다. 사실 말이 평균 키지, 나보다 작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뭐…… 물론 큰 사람도 많지만. 언니라든가, 언니라든가, 언니라든가.
침대에 누워 있던 터에 언니만큼 크지 못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세린가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큰 편이니까.
“그거 이상하네.”
툭 대꾸한 릴이 손이 스물스물 움직였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내 크기를 가늠하는 것처럼.
“아무리 봐도 참 쪼끄만한데.”
“당신이 큰 게 아니고요?”
“내 뭐가?”
“…….”
그 짓궂은 소리에 내 뺨이 둥글게 부푼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 내 표정을 안 봐도 알고 있을 릴은 웃음기 서린 음성으로 덧붙였다.
“큰 다람쥐라니. 그것도 나름대로 귀엽긴 하겠다.”
물론 다람쥐는 뭘 하든 귀엽긴 하지. 귀여운 게 확대되다니, 참 바람직한 일 아닌가.
아니…… 절대로 내가 귀엽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단 그런 건 둘째 치고요.”
“응?”
“말리크께서 정말, 릴 혼자 쫓아내면 어쩔 건데요.”
릴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파들파들 떨려오는 내 손등에 힘줄이 섰다.
“……당신이 없으면 난 혼자란 말이에요.”
하루 종일 이 넓은 저택에 틀어박힌 채 혼자 땅이나 파야 한다니. 가끔 찾아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나와 대화를 해주지 않는 게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니.
그나마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오는 사람들도 신 타령이나 해 대겠지?
나도 썩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릴은 의외로 가볍게 대꾸했다.
“어라. 처형 얘기 못 들었어?”
“네? 언니는 왜요?”
“곧 도착할 텐데.”
그 말에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이고 눈을 반복해서 깜빡여도 보이는 건 그의 옷자락뿐이었지만.
물론 얼마 전에 릴이 언니를 불러온다고 하기야 했지만……. 언니도 참 너무하네. 이렇게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날 거야? 언제쯤 도착한다고 말 좀 해주면 덧나냐고.
“정말?”
“응.”
내 얼굴이 확 밝아졌다. 릴에게 고마웠던 나는 그의 품에서 꼼지락거렸다.
다정하고도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는 짓궂게도 내뱉었다.
“근데 너 말이야.”
“네에?”
“이건 좀 확실히 하자. 나야, 처형이야?”
그…… 유치하기 그지없는 말에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람?
하지만 몇 번을 다시 곱씹어도 자기가 더 좋은지, 언니가 더 좋은 건지를 묻는 게 분명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수준의 질문을 받은 것 같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보다 처형을 더 좋아하는 거 같아서 말이지.”
아마 릴의 예쁜 두 눈이 가늘게 접혀 있었을 터였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언니랑은 평생을 같이 살았는걸요.”
“나하고는 앞으로 남은 평생을 같이 살 건데?”
“이제 하비에르에서 언니로 옮겨 갔어요? 누가 더 좋고 싫고 할 게 어디 있어요?”
“왜 없어?”
“둘이 똑같이 나 괴롭히거든요? 내 안에서는 동급이에요.”
“그럼 내가 더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쩜 저런 착각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당연하게도 입 밖으로 흐르는 내 목소리에는 황당함만 짙게 풍겼다.
“……그건 크나큰 오해십니다만?”
“왜지?”
릴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어조였다. 이보세요,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요! 당신들은 재미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괴롭단 말이야!
“난 귀여워하잖아. 그것도 많이.”
“언니도 저 귀여워하거든요? 그리고 내가 애완동물인가?”
귀여워한다고 무조건 좋아하게!
하지만 내가 생각한 ‘귀여워한다’와 그가 말한 ‘귀여워한다’는 천지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은밀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색스러워졌으니까.
“매일매일 즐겁게 해 주잖아?”
“…….”
얼굴로 피가 몰렸다. 나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서, 설마 그게 그런 의미…….”
“그런 의미가 뭔데?”
“아, 정말!”
매를 벌지, 벌어!
비명을 지른 나는 릴의 등짝을 향해 손바닥을 날려야 했다. 찰싹, 찰진 소리와 함께 그가 장난스레 펄쩍 뛰었다.
“아야,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냐? 품위유지비도 팔천이나 주는데 맨날 때리기나 하고.”
“네, 팔천이나 주죠! 쓸 일이 전혀 없지만요.”
근 몇 달간 얼마나 썼지? 정말 쓸 일이 없었다. 덕분에 차곡차곡 쌓인 내 개인 재산이 이게 다 얼마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액수였다. 이거 참 신기한 일이다. 딱히 쓸 일도 없는데 재산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실실 나오니까.
“이왕지사 쓸 일이 없던 거, 잘 모아두도록 해. 조만간 신년회가 있으니까.”
그 말에 비로소 깨달았다. 조만간 신년이라는 걸.
벌써…… 새해가 밝을 때가 됐구나. 아니, 벌써는 아닌가? 그렇게 많고 많은 일을 겪었는데 고작 몇 달밖에 안 됐다니 말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사랑은 시간을 가게 한다잖아.”
릴은 장난스럽게 속담을 내뱉었다. 사랑이라니, 저 말에 펄쩍 뛰라고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잘못 찔렀다. 나는 한껏 심각해진 채 중얼거렸다.
“그거 지금은 별로…… 어울리는 말 같지는 않은데요.”
“왜?”
“그 뒤에 이어질 말이 그렇잖아요.”
사랑은 시간을 가게 하고, 시간은 사랑을 가게 한다. 달콤한 로맨스를 꿈꾸던 시절, 참 잔인한 속담이라는 생각을 많이도 했었다.
“그러니까.”
날 조금 더 품에 바짝 끌어안은 릴은 달콤하게 물든 목소리로 느끼하게도 속삭였다.
“날 더 예뻐해 줘.”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요.”
난 대체 언제쯤 저런 말에 내성이 생기지? 황당했던 난 그의 얼굴을 냅다 밀어냈다.
“왜긴.”
비로소 시선을 마주했다. 붉은 석양을 등지고 선 릴은 하늘과 대비되는 푸른 눈을 예쁘게도 휘었다.
“아내님을 귀여워하는 만큼 예쁨 받고 싶은 남편의 소망이라고 해 두자.”
“……못 말려.”
피식 웃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야 했다. 가끔 생각하지만 릴이 내게 전하는 애정은 참 깊은 것 같았다.
정작 짤막한 이 몇 달 사이에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 * *
언니가 도착한 건 이틀 후, 낮의 일이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나와 놀아주는 언니가 반가웠던 나는 일단 와락 안겨들고 보았다.
“언니!”
“그래, 우리 쥐새끼야. 언니 왔다!”
“뽀뽀!”
내가 일단 내뱉은 소리에 언니는 내 등짝을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찰싹, 시원한 마찰음이 여름날 하늘을 아름답게도 적셔갔다.
“얘가 정신이 나갔나. 다 큰 게 징그럽게 왜 이래?”
“힝, 왜 때려. 잘해 줬잖아!”
“그건 어릴 때 얘기고. 이제는 너 남편한테 해달라고 하렴?”
남편한테 하면 뽀뽀로만 안 끝나잖아! 난 가벼운 애정 표현을 하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야.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자, 언니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쥐새끼야. 사고 안 치고 있었지?”
“……사고를 치다니. 내가 그럴 사람이야?”
“당연하지.”
언니는 가차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보았다.
……우씨. 하지만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는 게 더 슬펐다.
그동안 여러 의미의 사고를 치긴 했으니까. 오펠에 가야 했던 것도, 말리카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덕에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결국 크고 작은 사고를 친 게 맞지, 뭐.
그나저나 언니나, 나나. 근처 사람이 사고를 당할 게 아니라 칠 걸 걱정하는 게 참…….
“그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이어진 질문에 나는 그간 있던 일을 하나하나 털어놓아야 했다. 오자마자 레브아를 만난 것, 릴이 재상이 된 것, 그리고 할아버지의 잔소리까지.
“말리카께 아미르를 안겨주자고…….”
언니가 가장 먼저 반응한 일은 저것이었다.
“가능할지도 모른다니까 더 무서운데? 근데 그걸로 나 조카 먼저 구경 시켜주면 안 되나?”
“언니……. 정말 왜 나만 보면 다들 애 타령이야?”
그것도 다들 한결같이!
릴은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해 줬지만, 언니는 늘 그렇듯 직설적이었다.
“네 반응이 재밌으니까?”
“씨…….”
내 반응의 어디가 재미있다는 거야, 대체! 나도 좀 알자!
“어쨌든 그거, 가능하다고 해도 절대 해주면 안 돼. 알지?”
“응? 왜?”
이어지는 말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최악의 상황은 말리카가 카림을 죽이려 드는 것이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걸 다들 잘 알잖아?
“왜긴.”
언니는 평소와 다르게 상당히 진지하게 내뱉었다.
“카림의 계승 서열이 밀리니까 그렇지.”
……물론 진지함과 전혀 다른, 사리사욕으로 똘똘 뭉친 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