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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77화 (7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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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림께서 자꾸 그런 식으로 책임 회피를 하시니 다들 미쳐버릴 지경입니다. 말을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곁에서 보고 있으면 얼마나…… 속이 터지는지 아십니까.”

좋게 표현해서 속이 터진다지, 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노는 모습을 보면 살인 충동이 들 것이다. 나도 시녀로 일을 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한 사람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할 일은 배로 늘어납니다. 감히 카림께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어서 그렇지 불만이 큽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의 주름진 눈 밑이 평소보다 몇 배는 새카만 것 같다. 겨우 일주일 만에.

물론 국정이라는 게 처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긴 하지만…….

내가 귀를 기울이는 눈치자 할아버지는 다시금 입술을 뗐다.

“가뜩이나 자와는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와를 쫓아내고 재상 자리를 차지하셨더라면 책임감은 가지셔야지요.”

……릴 덕에 쫓겨난 전임 재상까지 언급하며, 할아버지는 혹사당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피력했다. 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있었다.

‘애초에 달라고 한 적이 없는 자린데요.’

물론 차마 내뱉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할아버지 편을 들어줄 수도 없었다. 릴이 왜 저러는지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아서.

오펠에 있을 때에는 나름대로 할 일을 다 하면서 뛰어다니는 걸 두 눈으로 보았다. 릴도 마음만 먹으면 이것저것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저 온몸으로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꿈은 무병장수인 것처럼, 릴의 꿈은 프레이르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거니까. 말리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어쨌든 양심이 쿡쿡 찔린 나는 할아버지를 외면하며 책임을 전가했다.

“말리크께서는 뭐라고 안 하시나요?”

“그냥 웃고 넘기십니다……. 아직까지는요.”

허탈한 음성으로 답한 할아버지가 쓰게 웃었다.

‘아직까지는’이라고. 할아버지의 말버릇을 잘 아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어야 했다.

“수틀리면 말리크께서 뭔가 하실 수도 있다는 말씀, 맞죠?”

“예. 이그드라실이여, 애석하게도 말리크께서는 정사에 있어서는 가차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아끼시는 카림이라 하셔도 봐주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으실 겁니다.”

사실 신전이 자꾸만 릴을 걸고넘어지는 이유가 무색하게도, 말리크 레반의 치세는 완벽에 가까웠다. 눈을 씻고 뒤져봐도 딱히 실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지 않을까?

그나마 대머리였다는 게 약점……. 음, 그럴 리는 없으려나? 본인이 창피하게 생각했을 뿐이지.

게다가 지금 신화까지 재현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아참, 나와 릴이 그 주인공이지?

“적당히 지켜보시다가 최후의 수단을 쓰실 것 같습니다.”

“최후의 수단? 그게 뭐예요?”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웃음을 머금어야 했다. 그 지방에 해당하는 오펠에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의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좌천시킨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그러면 더 좋아할걸요? 지금도 제발 파직시켜달라고 아무것도 안 하시는 거잖아요.”

“혼자 가신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네?”

“이그드라실과 함께 가는 게 아니라, 카림 혼자서 지방으로 쫓겨날 거란 말입니다. 지금 카림께서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실 일이겠지요?”

순간적으로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릴이 자꾸만 나를 놀려 먹어서 그렇지, 나름대로 굉장히 예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뜩이나 그렇게 신혼 타령을 하는 걸 생각해보면……. 앉은 자리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꺼이꺼이 울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 말씀에 수긍한 나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그러니 부디, 이그드라실께서 카림을 잘 달래 주소서.”

할아버지는 반쯤 애걸복걸하셨다. 얼마나 골치가 아팠으면 내게 쫓아와서 이런 말씀까지 하시는 건지, 사정을 얼추 알 법도 했다.

다만…… 릴이 어떤 사람인데.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처럼 내뱉어야 했다.

“할아버지, 그분이 제 말을 들으실 것 같아요?”

“듣게 하셔야지요.”

날 보는 할아버지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그드라실을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아뇨, 믿지 마세요.”

“아닙니다, 믿습니다.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 과도한 기대와 다르게 난 정말…… 자신이 없었다. 내가 릴의 말을 들으면 모를까, 릴이 내 설득에 넘어간다고?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내 불신과 다르게, 할아버지는 온화한 웃음을 내비쳤다.

“제가 아는 사람이 이그드라실 안에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겠지요. 그 사람은 제 믿음을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내 손이 굳은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말하는 걸까. 옛날의 내가 꼭 죽어 없어진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할아버지 눈에는 제가 달라진 게 있어 보여요?”

“이그드라실께서는 우리 눈앞에서 아리엘을 되살리셨지요.”

거리감 있게 부르는 이그드라실과 친밀하고 애정 가득한 아리엘. 그 안에서 느껴지는 차이에 내 뺨이 둥글게 부풀었다.

“……언니는 여전히 아리엘이고요.”

“그게 서운하십니까?”

그러면 서운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반쯤 삐진 나는 자연스럽게 툴툴거렸다.

“할아버지도 어느 정도 아시니까 제게 오신 거잖아요.”

“그 말씀이 어떤 의미신지……. 우매한 제게 가르침을 주소서.”

“제가 다른 가문의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찾아와서 카림 흉을 못 보셨을 테니까요. 제가 할아버지 말씀을 귀담아들을 걸 아시니까 오셔서 부탁도 하시는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미동조차 없이 나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정곡을 찔린 눈빛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덧그렸다.

“그런데도…….”

이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놈의 이그드라실에 꽃이 핀 이후, 그렇지 않아도 좁았던 내 세상은 더 협소해졌다.

이제 내 세상에는 릴만 존재했다. 그러니까 릴이 좌천되어서 지방으로 쫓겨나면 난 정말…… 완벽한 외톨이잖아?

시무룩해진 내 어깨가 바닥으로 하강했을 때, 문뜩 할아버지의 손이 내 머리 위에 올라왔다. 갑작스러운 애정에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제법 오래 살았지만…… 아니, 오래 살았기에 더 어려운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 예쁜 손녀가 저희가 오래도록 믿고 섬겼던 신이라는 것이 가슴으로는 믿기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아, 그놈의 신 소리. 정작 나는 실감이 안 난다니까?

“하지만 이그드라실이여,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면…… 마냥 제가 알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의외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늘여야 했다.

“왜요?”

“무언가 바뀌셨으니까요.”

뭔가가 바뀌었다고.

할아버지의 그 말씀은 내게 고뇌를 선사하기에는 충분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귀가하신 후, 나는 대문 앞에 서서 릴을 기다려야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석양이 하늘을 서서히 붉게 물들일 때가 되어서야 릴이 돌아왔다.

“릴.”

이름을 부른 나는 일단 그를 와락 끌어안고 보았다. 릴은 얼결에, 자신의 품으로 안겨드는 날 끌어안았다. 따뜻한 손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쩐 일로 마중을 다 나왔대?”

“당신, 일 안 하고 놀고 자기만 한다면서요. 궁에서요.”

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릴은 늘 그렇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내 읍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였다.

“프리드린. 나 같은 고급 인력이 일까지 해야 해?”

저게 무슨 억지 논리란 말인가. 고급 인력일수록 써먹어야 할 거 아냐, 이 인간아!

“고급 인력이니까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에게 조금 더 바짝 다가붙은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할아버지 우시겠어요.”

“아하?”

그가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마 아름다운 두 눈을 가늘게 떴을 것이다.

“세린 재상이구나.”

“네? 뭐가요?”

“네게 내 비행을 고자질한 사람.”

고자질이라니, 마치 할아버지가 아랫사람 같은…….

아랫사람 맞지, 참. 내게는 내 아버지를 낳고 기른 할아버지지만 그에게는 한 번도 윗사람인 적이 없었다.

“어, 어쨌든 말리크께서 쫓아내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거야말로 바라는 바야.”

예상했던 답이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려야 했다.

“혼자 쫓아내면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넌 주머니 속에 넣고 가면 되니까.”

나는 당연하게도 반박했다. 늘 그렇듯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지만.

“내가 당신 주머니 속에 들어갈 크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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