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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69화 (6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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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직접 경험을 해 봐야, 당시 상황에 놓인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되는 모양이다.

머잖아 상념을 정리한 나는 언니의 말에 대꾸했다.

“근데 하렘에서 얻은 자식하고 사생아하고 무슨 차이야? 결국 둘 다 남의 자식이라는 건 똑같은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둘 다 눈 돌아갈 일이다. 무엇보다 말리카는 자식이 없었으니까 더.

나는 가지지도 못한 아이를 남편의 다른 여자가 낳았다고? 와, 정말 살인 충동이 들어도 이해한다. 무엇보다 아이를 가지는 그 과정이…….

그 비밀스럽고 달콤한 시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면 정말로 끔찍한 일일 터였다. 그 여자는 물론 남편조차 죽여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말리카가 릴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건 당연했다. 눈앞에서 마주하기는커녕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한 존재이지 않나.

다만 이번 소문은 정말 헛소문일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었다. 남모를 진실이 숨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내 대꾸에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쥐새끼야. 그게 말리카가 가져야 하는 자비라는 거야.”

“자비? 갑자기 무슨 자비?”

“궁의 안주인은 아무나 되는 줄 아니? 애초에 하렘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자리야. 하지만 사생아는 다르지.”

“사생아를 낳은 여자를 하렘으로 들이면 어차피 같은 거 아냐?”

훌륭한 조삼모사였다.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어차피 결론은 같은걸.

“근데…….”

궁의 안주인은 아무나 되는 줄 아냐니. 뼈가 있는 말에 오한이 들었다. 몸을 바르륵 떤 나는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해?”

“프리드린, 잘 생각해. 언젠가 네가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니까?”

“그건 절대 싫어. 떠먹여 준다고 해도 사양할래.”

말리카가 날 돌봐준 은혜고 뭐고, 지금은 그런 건 생각나지 않았다. 언니가 말한 하렘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자리, 라는 말이 귀에 뱅뱅 메아리쳤다. 지금의 내게는 저게 가장 중요했다.

나는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엇보다 하렘이라니……. 내가 말리카라면 하렘에 들어온 사람들의 머리를 모조리 밀어버리겠어. 다 대머리로 만들어버릴 거야.”

내 소심한 선언에 언니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끔뻑,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나와 같아진 금빛 눈이 눈꺼풀 새로 곱게도 스며들었다.

머잖아 언니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속삭인다.

“프리드린, 너 정말 임자 만났구나.”

“……응?”

“죽여버리겠다는 말 들었다고 울먹울먹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다른 여자들 머리를 전부 밀어버리겠다고 하고. 대머리로 만든대, 대머리로! 이제 죽인다는 말을 이해했지?”

아, 씨!

내 발끝을 빨갛게 만들 소리였다. 그래, 저게 우리 언니지.

순간적으로 당황한 내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대꾸하지 못하자, 언니는 한 술 더 뜨기 시작했다. 드디어 건수를 잡은 게 틀림없었다.

“그래, 밤에 죽어보니 어때?”

“어, 언니……. 제발…….”

“괜찮은 경험이지? 말로 표현이 안 되지? 이 세상이 정말 딱 너와 그 사람만으로 물든 거 같지?”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우리 언니는 딱 한마디로 저 일을 정리했다.

“쥐새끼야, 그게 ‘밤일’이야.”

언니는 또다시 ‘밤일’을 강조했다. 아, 그놈의 밤일…….

발끝까지 폭탄처럼 새빨개진 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 내가 그때 왜 밤일이라고 말을 해가지고 지금까지 고통 받는 건지…….

그냥 세, 세, 세……. 아, 이게 뭐라고 단 두 음절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거냐고! 미쳐버리겠네, 정말로!

“이제 예쁜 아기만 가지면 되겠다. 리니, 나 얼른 조카 구경시켜줘. 너랑 카림 닮으면 정말 예쁘겠다.”

그 말에는 또다시 흠칫 몸을 떨어야 했다. 아니, 정작 릴과 나는 진지하게 얘기를 해본 적도 없는데 왜 근처에서 난리냐고! 그놈의 아기가 대체 뭐길래!

뺨을 둥글게 부풀린 나는 툴툴거렸다.

“……언니, 나도 조카가 보고 싶거든?”

“어머나. 나도 이제 슬슬 생각은 해봐야 하긴 해. 그런데 클리드가 한동안은 싫대.”

“왜!”

“왜긴. 내가 죽다 살아났으니까?”

“…….”

할 말을 상실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형부에게도 트라우마가 됐겠구나 싶은 일이기는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걸, 죽어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

다만 그 당사자인 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벼웠다.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아들딸 쌍둥이 한 방에 해치우자고.”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잖아?”

“왜 안 돼?”

언니의 손이 내 등을 툭툭 때리듯 건드렸다.

“넌 할 수 있어.”

“…….”

“힘내 보렴. 이 언니가 응원해줄게.”

아니, 사양하겠습니다. 물론 생기면 낳겠지만 굳이 벌써부터 만들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언니와는 그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끝내고 손님방으로 되돌아가던 때였다. 반가운 그림자가 복도 끝에 어른거렸다.

릴의 것이었다. 이제는 그림자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다니, 참 신기한 능력이다.

어쨌든 며칠 만에 보는 릴이 반가워서, 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릴!”

“응?”

가볍게 대답한 릴이 나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우아한 얼굴이 아름답게 물들었다. 어느 때보다 더 황홀한 미소를 보이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게 다가붙은 그는 나를 와락 끌어안고 보았다. 찰나의 순간 오롯이 맞닿은 익숙한 품은 따뜻했다.

“아, 좋다.”

내 걱정이 무색하게, 여전히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네 냄새, 오랜만이야.”

이어 품에서 날 놓아준 그는 다정한 물빛 눈을 휘었다. 내 모습을 각인이라도 시키듯,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속삭였다.

“우리 아내님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신혼인데 참……. 세상이 날 도와주지 않네.”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다뇨?”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 내가 왜 팔자에도 없는 일을 해야 하는지…….”

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무슨 일이길래 며칠째 나랑 만나지도 못하고……. 혼전계약서에 떡하니 쓰여 있는 각방 금지 조항까지 어기면서 작업을 했담?

“무슨…… 일이요?”

“네 기적 때문에.”

……아.

일은 내가 치고 수습은 릴이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죄책감을 느낀 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그의 커다란 양손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고개를 들어 릴을 응시했다. 따사롭게 빛나는 눈빛만큼이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드린.”

“네에.”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사람을 죽음이라는 걸로 영원토록 잃게 돼. 그러면 잃어버린 사람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하지. 되찾을 방법이 없을 뿐이야.”

릴은 지금 내가 직면한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어.”

“…….”

“그래서 지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싸 들고 와서 널 한 번만 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거든?”

돈을 줄 테니 어떻게든 죽은 사람을 되살려달라고 찾아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그드라실이 말했다, 쉬운 일이지만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힘이라고. 사실 언니 일도 이그드라실의 인도가 있었으니 가능했지 없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을까.

내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꽃을 피우는 일 정도였다. 하비에르의 말대로 쓸모가 없는. 정말 원예를 내 부업으로 삼으면 모를까.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언니가 좋아하겠어요.”

“응? 뭘?”

“기부금이요.”

나는 언니가 있을, 복도 저편을 흘끗거렸다. 당연하게도 언니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 이야기가 언니 귀에만 안 들어가면 좋겠네요. 기부금 받고 입 씻자고 난리를 칠지도 몰라.”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릴에게는 몇 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라고요. 릴은 참…… 금전 감각이 빵점이야.”

내 말에 릴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님이 게르드로 돌아갈 때 함께 갈 예정이야.”

“네.”

“가서, 말리카하고 담판을 지으면.”

이제 얌전하게 당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떤 것이 릴 안에 내재되어 있던 마음을 건드린 것처럼.

“그때는 데스테리언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살자.”

“……좋아요.”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오래, 건강하게 사는 거라면 나도 대환영이니까.

그것도 릴과 함께하는 삶이라면 원 없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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