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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내가 눈을 떴을 적, 나는 이름 모를 공간에 서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곳은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여긴 어디?’
다만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곳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안에서 울리던 질문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자욱한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기 시작했다. 머잖아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가 보였다.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호수 한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었다.
그 섬 위에 거목이 한 그루 우뚝 선 채였다. 여린 도백색 꽃잎이 흩날린다. 고운 화우가 세상을 수놓았다.
보기만 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세계수. 어떻게 생각하자면 그저 나무 한 그루일 뿐인데, 당장이라도 저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려야 할 것 같은 신성함.
아름다움과 신성함에 오롯이 압도된 나는 눈을 깜빡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왕실 신전?’
……그런데 내가 왜 이곳에 있지?
나는 지금 오펠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또다시 의문을 남길 적,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음성이 있었다.
[너로구나.]
그 기묘한 전음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나뭇가지에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람이 걸터앉아 있었다. 하얀 털과 황금빛 눈을 가진 귀여운 고양이와 함께.
저번에 카림과 함께 한번 본 적이 있던 그 고양이였다.
다만 나를 알은체하지 않은 고양이는 제 곁에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붙을 뿐이었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았지만,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저 사람의 비현실적인 외모 때문일까. 지금 이 장소에서는 그때 느꼈던 것보다 더한 신비로움이 물씬 풍겼다.
정말 신전다운 신전인 느낌이다.
[어서 오렴.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찾아왔니?]
나를 응시한 그 사람이 선선하게 웃었다. 나는 그 사람을 아득하게 올려다보았다.
내가 여길 찾아온 건가? 애초에 어떻게 온 거지?
무엇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속삭였다.
“저…….”
[응?]
“일단…… 뭐라고 불러야 하죠?”
내 소심한 목소리에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아름다운 사람이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 사람이 옆에 다가붙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이 기분이 좋았던 건지 고양이가 갸르릉거렸다.
[나와 이 아이는 너희가 섬기는 세계수의 드리아스란다. 너희들은 날 이그드라실이라고 부르니 그렇게 부르면 되겠구나.]
“네에…….”
소심하게 대답하자 이그드라실이 부드러운 눈웃음을 덧그렸다. 그런 이그드라실은 눈앞이 아득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 걸까. 아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걸까.
나는 한동안 그런 이그드라실을 홀린 듯 올려다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저게, 제가 정말…….”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지. 내 자신이 이그드라실이 맞느냐고 입에 얹기에는 너무…… 닭살이 돋았다.
내 자신이 예쁘고 귀엽고 어쩌고 하는 자뻑은 잘도 떨어댔지만, 저것만큼은 차마 스스로의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내 신앙도 신앙이거니와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본 이그드라실이 중얼거렸다. 묻지도 않은 질문을 알아들은 것처럼.
[네가 내 힘을 이어받았느냐를 묻는 것이라면, 맞다.]
“정말요?”
[그럼.]
“근데 왜…… 할 줄 아는 게 없죠?”
[왜 없지?]
한 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이그드라실이 되물었다.
[내게 꽃을 피우게 하고, 레반 프레이르의 머리카락을 자라게 했잖니. 대머리 치료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윽!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창피한 역사였으니까. 대꾸하는 내 목소리가 당연하게도 덜덜 진동했다.
“그, 그건……. 저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걸요.”
[저런, 그랬구나.]
가볍게 혀를 찬 이그드라실이 부드럽게 허공에서 뛰어내렸다. 이그드라실은 마치 중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별로 높지 않은 곳을 가볍게 날아 내려왔다. 이어 내게 손짓했다.
[이리 오렴.]
내가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가자, 이그드라실이 내게 손을 겹쳐왔다. 투명한 손은 스르륵 내 손을 통과하긴 했지만 이그드라실이 나를 만지고 있다는 것은 선명하게도 느낄 수 있었다.
‘어, 엄마야.’
그 기묘한 감각에 괜히 식겁했을 때, 이그드라실은 반대쪽 손으로 바닥에 있는 초목을 붙잡았다. 순간 내 안을 통해 무언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
동시에 초목에서 푸른빛 꽃이 피어났다. 이그드라실은 상냥하게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된단다.]
“오.”
나지막하게 감탄을 토해냈다.
“신기해…….”
정신을 집중하고, 방금 전에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내 안에서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것처럼……. 몸 안에 흐르는 피를 내 멋대로 다스릴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옳을까.
그 순간 내 손이 닿은 초목에서 푸른빛 꽃이 돋아났다. 곧 초록빛 벌판이 온통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푸른 꽃밭은 무척이나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꽃들 틈바귀에 앉은 나는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이제야 뭔가 할 줄 아는 게 생긴 걸까. 카림처럼.
[행복해 보이는구나.]
그때 들려오던 쓰디쓴 중얼거림이 있었다. 날 보는 이그드라실의 신비로운 눈빛이 가라앉은 채였다.
그 황금색 눈빛이 내 목덜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마 조금 전 카림이 새겨뒀을 붉은 흔적을 살펴본 것 같아서.
이그드라실의 단아한 입매가 조금은 폭력적으로 비틀렸다.
[사랑의 꿈은, 한때는 참 달콤하지.]
“사, 사랑의 꿈이라뇨…….”
[내게도 그랬거든.]
순간적으로 발끈한 내가 반발했지만, 이그드라실은 내 말을 무시하고 중얼거렸다. 그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자연스레 되물었다.
“이그드라실께도요?”
[그래……. 살아가며 가장 달았던 한때였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가장 후회하는 일은.]
신비로운 황금빛 눈이 한순간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사하크를 만나고.]
순식간에 근처의 세월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여전히 이그드라실은 분홍빛 화우를 흩뿌리는데, 그 선명한 봄이 마치 가을처럼 다가왔다. 꽃이 아니라 낙엽이 세상을 물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아이를 낳고.]
눈이 내리깔렸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 서글픈 눈물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일까. 지금만큼은 눈앞의 이 사람이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도, 우리가 섬기는 위대한 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나나 카림처럼 평범하디 평범한 한 사람의 인간처럼…….
[끝내 그의 곁을 벗어나지 못한 것.]
내리깔린 속눈썹이 처량하게 떨려왔다. 그 분위기에 압도된 나는 멍청하게 입술만 달싹거렸다.
이윽고 쓰디쓴 중얼거림이 아련하게도 울려 퍼졌다.
[……조만간 너도 알게 될 거다.]
이그드라실의 품에 찰싹 달라붙은 고양이가 야옹, 하고 울어댔다. 나는 두 드리아스를 보며 그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 * *
“잘 잤는지 모르겠네.”
……꿈?
정신이 몽롱했다. 그 혼미한 뇌리를 꿰뚫고 뒤에서 날 안온하게 끌어안은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허리를 단단하게 결박한 손은 마치 거미줄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놓아주지 않을 듯했다.
이어 척추를 따라 쪼옥, 쪽…… 타인의 숨결이 미끄러졌다. 끈적한 마찰음이 들렸다. 내 몸 구석구석에 자신을 아로새겨 가는 그의 행동에 야릇한 감각이 발끝을 휘감았다.
날 좀먹어 가는 감각에 순간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겨우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으며 겨우 속삭였다.
“오, 옷 좀 주세요…….”
“옷은 왜?”
“입게요!”
“뭐 하러 입어. 또 벗을 건데.”
그 노골적인 말에 발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얼굴로 피가 몰려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닌가. 입고 하는 게 더 좋나?”
들려오는 말에 기겁한 나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손을 가볍게 찰싹 때려야 했다. 지금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이, 이 변태야.”
“변태라서 좋을 날이 올 거래도?”
뻔뻔하게 중얼거린 그의 입술이 열심히도 미끄러졌다. 그의 입술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불에 데인 것만 같았다.
괜히 숨을 크게 들이켰을 적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네가 찾던 밤은 이제 시작인데, 우리 아내님.”
“내, 내가 언제 밤을 찾았어요?”
“어두운 게 좋다면서.”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은근슬쩍 허리에서 손이 미끄러져서, 나는 반 박자 늦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언제요!”
“밝은 게 싫으면 어두운 게 좋은 게 아닌가?”
……우씨.
내가 말로 릴을 이길 수 있을 날은 죽는 날까지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