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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42화 (4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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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지금 미쳤냐고!’

얼굴로 피가 몰렸다. 갑작스러운 더위가 나를 덮쳤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잘 익은 사과처럼 물들었을 것이다.

“어, 어떻게 하긴요.”

이, 이 남자는 요물이다. 여기서 넘어가면 안 돼! 바람둥이에게 코가 꿰여서 저도 모르는 새 간도 쓸개도 다 빼다 바치는 가여운 여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 즐거움 못 느끼게 확 도망가 버릴 거예요.”

“도망?”

“네, 도망! 도주! 도타!”

같은 뜻을 가진 아는 단어는 일단 다 내뱉고 보았다. 강조하듯 한 말에 그의 아름다운 두 시선이 곱게도 휘었다.

“그래, 어디 한번 도망쳐 봐. 아주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

“네? 재미있는 일?”

“내가 널 느낄 수 있단 건 네가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다는 소린데.”

……어라?

듣고 보니 그랬다. 나…… 어쩌면 나쁜 놈이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놈에게 코가 꿰인 거일지도 모른다.

“숨바꼭질 정도야 뭐, 새삼 귀엽네.”

“허허……. 당신이 무조건 이기는…… 숨바꼭질이네요.”

“대신 내가 늘 술래잖아?”

장난스레 대꾸한 그가 야살스럽게도 눈웃음을 살살 친다.

“뭐, 그래도 이불 속에 얼굴만 집어넣고 있으면 모른 척해줄 수도 있어.”

이건 숫제 바보 취급이었다. 아니, 애 취급이라고 해야 하나.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아이들이 저러니까.

“내, 내가 애예요?”

“애라니. 귀여운 다람쥐지.”

가늘어진 눈이 내 모습을 또다시 훑었다. 그에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괜히 생각해야 했다. 적어도 양 뺨이 둥글게 부풀어 있는 건 분명했다.

이어 그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만큼,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난 애에게는 흥미 없어.”

그 말씀은 다람쥐에게는 흥미가 아주 넘친다는…… 크흠, 큼. 물론 귀여운 게 옳긴 하다.

이윽고 카림은 날렵한 손가락을 들어 저 밑, 비구름과 어둠에 감싸인 성을 하얀 가리켰다.

“이만 갈까? 감기 걸리겠다.”

“……아, 네.”

내가 대답하자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내 앞에 넓은 등짝을 들이밀었다. 업히라는 듯, 자신의 등을 툭툭 쳤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덥석 업혔다가 내팽개쳐지면 어떡해.

“왜 그러고 있어요?”

“업히라고.”

그러니까…… 왜 업히라고 하는 건데? 이런 이유 없는 친절은 익숙하지 않단 말이야.

내가 물끄러미 바라만 보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 아플 거 아냐. 그 상태로 어떻게 걸어가려고.”

발이 아파? 내 상태가 뭘?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깨달았다. 맨발이었다는 걸.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발을 감싸고 돌던 온갖 감촉들이 밀려들어 왔다. 생생하게도 살아난 촉각이 사각거리는 풀의 감촉과 물방울의 차가움을 이야기했다.

“넌 늘 신발을 어디엔가 버려. 이번에는 양쪽 모두.”

“하하하, 하하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발을 신지 않고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 정말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을까.

속으로 고민을 이어가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를 때면 모를까, 이 발로 언덕을 걸어 내려갈 수는 없겠지. 발이 피투성이가 될 게 틀림없다.

별수 없이 카림의 등에 업히던 나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당신 정말…….”

그의 탄탄한 어깨를 꾹 움켜쥐었다. 손가락도 입술만큼이나 바들바들 떨려온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기회주의자야.”

그의 탄탄한 등에 딱 달라붙은 내 부드러운 몸이 진동했다. 익숙지 않은 남자의 몸은 단단했다. 남자의 몸에 뭉개지고 비벼진 가슴이 두근, 두근……. 기분 좋은 떨림을 속삭였다.

그리고 아마 이 두근거림의 원인인 카림은 항상 그렇듯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오, 좋은 칭찬이야.”

“칭찬 아니거든요?”

“맞는데.”

내 양쪽 엉덩이를 잘 받쳐 업은 그는 제법 진지하게 말을 받았다.

“어딜 봐서 칭찬이에요?”

“네게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거고, 덕분에 절호의 기회가 온 걸 내가 주워 삼켰으니까 기회주의자 소리를 하는 거일 텐데.”

카림의 움직임을 따라 애쉬 그레이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그건 바꿔 말하면 네가 내게 기회를 줬다는 거잖아. 이제 좀 너하고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좋은데.”

반박할 수 없는 소리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도 좀…… 카림이 가깝게 느껴지는 건 맞으니까. 적어도 처음 만났을 때하고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하며 그가 속삭였다.

“그거 알아?”

“네? 뭘요?”

“그날도 업어다 모셔드려야 하는 건지, 꽤 고민하고 부른 건데 아주 진심으로 도망가더라고.”

굳이 언제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날이었다. 그날의 일이, 나를 보던 그의 시선이 떠올랐다. 날 빤히 담던 그 무기질적인 눈빛.

지금하고 비교하면 참 다른 눈빛이긴 하다. 이제는 그렇게 냉정하고 차갑게 날 보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런 말을 하려고 그렇게 진지하게 불렀던 거예요?”

“응? 그때 내가 진지했나?”

“네, 그래서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눈앞에서 사람을 쓰, 쓰, 쓱……. 어쨌든 그런 사람이 그러니까 도망갔죠.”

다정한 생각에 그렇지 못한 태도라니. 카림도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인가.

“어쨌든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데 맨발이 참 안쓰럽더라고. 그래서 꺼내 왔지, 그 유리 구두. 어머니 집안의 가보야.”

“레브아의? 그런 걸 제가 받아도 되는 거예요?”

“네가 아니면 누가 받아. 이제는 하나뿐인 법적 딸인데.”

하나뿐인 건 아니지 않나? 말리카께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계시는데.

법적 딸, 소리에 다소 엉뚱한 사고를 이어 나갈 때 그가 나를 고쳐 업었다. 말머리가 돌아갔다.

“그래서 신전은 잘 다녀왔고? 가장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하비에르 얘기를 그냥 넘어갈 수가 있어야지.”

“아, 네. 잘 다녀왔어요.”

“별일은 없었어?”

“별일이라고 할 거까지는……. 그냥 성수에 물을 주라고 하던데요.”

흐음, 하고 중얼거린 카림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의 미묘한 무게를 견딜 수 없던 나는 괜한 걸 물었다.

“나 안 무거워요?”

“무거워.”

“언제는 살 좀 쪄야겠다면서요!”

“잘 아네. 그러면서 왜 물어봐? 너 놀려먹을 기회 주는 거지?”

……우씨. 나는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빈말으로나마 가볍다고 하면 덧나요?”

“네 반응이 재밌는 걸 어떡해.”

웃음기 서린 말이 뒤를 이었다.

“어떻게 나올지 대충 예상을 하고 있으면 그것보다 더한 게 튀어나와.”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입술이 댓 발 튀어나온 나는 툴툴거렸다.

“……정말 제 덕에 심심하시진 않겠어요.”

그리고 뭐, 이왕지사 결혼까지 했겠다. 나도 이런 카림과 조금 더 친밀한 대화를 나누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것이 내 심경의 변화였다.

그렇게 나를 업고 언덕을 내려온 카림은 가장 먼저 욕실로 향했다. 당연히 기겁한 내 발악이 이어졌다. 하맘 타령하면서 날 잡아먹으려고 했던 게 고작 며칠 전의 일이었다. 이건 너무 당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하는 것 같잖아!

“여, 여, 여, 여기에는 왜요?”

“감기 걸릴까 봐.”

카림은 그대로 나를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입수시켰다. 탕 안으로 따라 들어온 그가 내 발을 잡아 들었다. 이어 나지막한 한숨이 울려 퍼졌다.

“어떻게 거기까지 걸어 올라갈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네.”

“네, 네, 네?”

“아프지도 않았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물에 젖은 상처들이 따끔따끔하게 아려오는 듯했다. 그러게, 맨발로 기어 올라갔는데 발이 멀쩡할 리가 없지.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아픈 거 같아요.”

“너, 손이 참 많이 가.”

카림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덧 통증이 사라지고 매끈해진 발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싫어요?”

“아니.”

“……싫다고 해주면 좋겠는데.”

“그래서.”

카림은 피식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싫다고 하면 울 거면서?”

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카림의 양손이 내 어깨 위에 올라왔다. 천천히 다가온 입술이 내 뺨에 조인을 찍었다.

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 * *

그렇게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스르륵 눈을 내리깐 나는 옆에서 자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

그렇게 열심히 떠들어 대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말이나 돼? 가뜩이나 어제는 같이 목욕까지 했는데?

하얀 햇살 틈바귀에 앉은 나는 멍청하게 중얼거려야 했다.

“내 매력이…… 그렇게 빵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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