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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목소리에 입술을 비죽거렸다. 결국 내가 꿈꾸어 온 모든 걸 모래성으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그걸 처절하게 부숴버린 게 어디의 누구더라.
물론 그게 꼭 카림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을 생각해본다. 내가 왕실 신전의 이그드라실을 마주하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긴 어떻게 왔어요.”
“네가 어디에 있든, 난 널 느낄 수 있다고 했잖아.”
웃음기 서린 대꾸가 떨어졌다. 처량하게 젖은 등에 온기가 다가붙었다. 오른쪽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는 손이 있었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품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던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닭살 돋으니까.”
“저런. 더한 얘기 해줄까?”
“아뇨? 사양할게요.”
“네가 슬프면 내가 슬퍼.”
정중히 거절했건만 부득불, 카림의 입술에서 그런 말이 흘렀다. 닭살 돋는 대사에 내성이 없는 나는 온몸을 배배 꼬면서 들을 소리였다.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고, 네가 괴로우면 내가 괴로워. 근데 이게…….”
어울리지 않게도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거든?”
“…….”
“난 네 기분에 철저하게 지배당하거든.”
그러는 분께서 매일매일 날 잘도 놀려대십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밀어 넣으며 입술을 한 차례 달싹였다. 눈을 내리깔자 어둡게 물든 풀이 보였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동그랗게 방울진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가 부서진다.
“그 말이 사실이라고 쳐 봐요.”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럼 지금 내 기분은 어떤데요?”
“혼란스럽네.”
내가 질문할 걸 알고 있었던 듯, 답은 바로 들려왔다.
“울적하고, 슬프고 마음 아파? 왜 그래, 너 안 같게.”
…카림의 말이 맞았다.
나조차도 뭐라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내 복잡한 심경을 그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그런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하루아침 전복된 내 세상은 내가 견딜 수가 없었다. 나만이 견디지 못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부서졌고, 원했던 것들도 산산이 조각났다. 절대로 가질 수 없다고 속삭인다. 그걸 지금 선명하게도 깨달았다.
곁눈질로 흘끗, 그를 살핀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내가 입술만 달싹거리자 차분하게 기다리던 카림이 되물었다.
“그래, 넌.”
“……바퀴벌레가 싫어요. 무서워요.”
아까 상황 덕에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 선생님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달콤한 케이크를 좋아하고, 밀크티보다는 온도를 잘 맞춰서 깔끔하게 우려낸 홍차가 좋아요. 잘 때는 아직도 언니가 어릴 때 준 곰 인형이 없으면 무섭고요.”
“……어이고.”
곰 인형 타령에 카림이 가볍게 혀를 차는 듯했다.
어린 시절 잠이 들 때는 늘, 다시 무사히 눈을 뜰 수 있을지 걱정하며 침대에 누웠다. 그때 언니가 안겨 준 곰 인형은 내게는 수호신과 같은 것이었지만 굳이 지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악기 다루는 건 싫어요. 음악은 듣는 것만 좋아. 예쁜 걸 보면 눈이 뒤집히고, 카림도 잘 알듯 돈 좋아하고.”
다른 때였으면 카림 소리에 한마디 했을 그가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섬세한 손놀림에서 나를 향한 애정이 느껴지는 이유는 왜였을까.
“또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뭘 잘하는지 뭘 잘 못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들 그렇듯 그냥 그런…… 사람이라서.”
최대한 담담하게 내뱉고 싶었는데 숨이 차올랐다. 울음에 찬 목소리가 흘렀다.
“친구가 가지고 싶어요.”
“친구?”
“네. 아팠던 시간 동안 내가 가질 수 없던 것들 중 하나니까요. 근데 앞으로도 못 가질 것 같아요.”
짧지 않은 시간 내가 가질 수 없던 걸, 경험할 수 없던 것들을 원했다. 친구도, 연인도, 추억도.
솨아, 비 쏟아지는 소리가 한층 더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끊임없는 비에 젖어 가던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그냥…… 프리드린이고 싶어요. 지금은 이상해. 다, 이상해.”
무엇 하나 정상인 게 없었다. 하다못해 나까지.
허리에서 미끄러진 손이 내 손을 움켜쥐었다. 비에 젖어 차갑게 식은 내 손과 다르게 그의 손은 따뜻했다. 이어 한숨 서린 음성이 들려왔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볼래? 넌 이그드라실이 나타났다고 하면 어떻게 했을까.”
“……물론 저도 저랬겠죠?”
사실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같지만 무조건적인 신앙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이 내 신앙에 위배되고 있을 뿐.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나, 지금 이 상황을. 이윽고 카림이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랬을걸?”
“……예?”
“네가 날 대하는 걸 봐. 넌 처음부터 날 지나가는 범죄자 대하듯 대했다고.”
“제, 제, 제, 제가 언제!”
“이크.”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내 목숨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순간적으로 내 머리에 턱이 부딪칠 뻔한 그가 재빠르게 고개를 꺾었다.
…뭐가 됐든 내게 있어 카림은 지나가는 범죄자가 맞긴 했지. 첫 만남이 그럴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카림을 그렇게 만났기에 우연히 만난 라일라에게 은연중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걸.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세상이 좁았던 나와 라일라는 달랐다. 라일라는 나보다 훨씬 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프리드린, 내가 자꾸 묻잖아. 넌 내가 누구인지 잊는 것 같다고.”
당장 오늘도 들은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 눈앞에서 침 묻힌 유리 구두 타령을 했던 그 순간부터…… 이 작자가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남자라는 것에 대해 그렇게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다. 엉뚱하지만 잔인한 면도 있던 모순적인 인간이라는 게 더 크게 다가왔을 뿐.
“사실 난 네가 자꾸 잊어줘서 좋거든.”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카림이 조금 더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지금만큼은 이 사람의 온기 속에서 끝없는 안도를 느꼈다. 이 사람이 있는 한 혼자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이상한 감각.
“있지, 프리드린. 나도 너처럼 생각하면서 살아왔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거든.”
“……그건 위로가 안 되잖아요.”
“그래도 날 그냥 릴로 만드는 건 있어.”
단정한 음성이 귓가로 떨어졌다. 카림이 내 손을 잡아 왔다.
“너.”
맞잡힌 손을 괜스레 꼼지락거렸다. 다른 때였으면 닭살이 돋아 식겁했을 저 말이 지금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연고처럼 스며들었다.
“네 곁에서만 나는 그냥 사람이야. 이그드라실의 무엇도 아니고, 카림도, 아미르도 아닌. 그냥 평범하고 사소한 인간 하나.”
어쩌면 저게 카림이 날 선택한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잖아?
…이번에는 닭살이 돋았다. 처음부터 납작 엎드려서 길 걸 그랬다. 그랬으면 이럴 일이 없진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네 옆에 있으면 즐거워. 행복해. 이 시간이 모두…… 이렇게,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들이 네 곁에서 피어나.”
온화하게 물든 목소리가 작은 소망을 속삭였다.
“너도 그러길 바라.”
그의 말을 곱씹던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 뭘 어떻게 했든 간에 애초에 우리 두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신과 나, 서로를 제외하고는.
그게 내가 원하던 것이든, 원하지 않는 것이든 간에.
지금의 혼란스러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카림뿐이고, 카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일 테니. 그러니 내가 어떻게든 피하려고 애를 썼어도 카림이 날 놔줄 일 따위, 없지 않았을까.
카림이 내게 청혼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그가 했던 강렬했던 한마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날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요?”
카림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끊임없는 빗소리 사이로 그의 웃음소리가 시원하게도 퍼져 나갔다.
“프리, 드린.”
오늘도 너무 웃어서 숨을 헐떡거리던 그는 겨우 내 이름을 불렀다. 이어 턱으로 내 정수리를 내리누르며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은밀하게 물든 목소리가 귓가를 낭창하게도 진동시켰다.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가 꼭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닌데?”
“……네?”
멍청하게 되물은 내 머릿속에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발끝까지 새빨개진 나는 냅다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 변태야!”
변태야, 변태야, 변태야……. 내 목소리가 빗속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