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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렇게 두 사람은 신혼을 보내야 했다
수도 게르드에서 남부 지방의 중심지, 오펠까지의 여정은 짧고도 길었다. 넓고 좋은 마차긴 했지만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올해는…… 카림의 영지인 데스테리언부터 수도 게르드, 남부 오펠까지. 짤막한 몇 달 새에 프레이르 전역을 돌아다닌 기분이다. 당연하게도 살면서 이보다 더 많은 곳을 구경한 적은 없었다.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느긋하게 움직이는 마차 안, 무료한 듯 창밖을 바라보는 카림이 있었다.
독특한 애쉬그레이 빛깔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물빛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따금 카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정작 나는 그의 껍데기만큼은 제법 괜찮다는 엉뚱한 생각을 다시 하고 있었지만.
왕족, 하면 연상할 완벽한 우아함이지 않을까?
동시에 품고 있는 분위기가 참 고혹적이었다. 그 오묘한 모순 덕에……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정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을 홀릴 것만 같다.
입을 여는 순간 그 모든 환상이 와장창 무너지니 문제지.
휴, 이 남…… 편 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요즘 내가 끌어안은 최고의 난제였다.
아니, 물론 이것보다 더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적인 문제도 존재했다.
“근데요.”
내 부름에 카림이 스르륵 나를 돌아보았다. 붉은 입술이 열렸다.
“응?”
“정말 나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내 질문에 카림은 기막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얄밉게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릴 아니면 누구한테 물어보라고요.”
“그러니까 누가 덥석 수락하래?”
내 툴툴거림에 그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을 읊조렸다.
…아, 정말 치사하게 사실로 때리는 게 어디 있냐고. 공평하게 날조와 선동으로 때려 달라니까?
속으로 궁시렁대던 내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잖아요.”
“……어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 카림은 머리가 아팠던 건지, 자신의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지은 죄가 있던 나는 우물쭈물거리며 카림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어쨌든 잘못은 내가 하고 수습은 카림이 같이 하는 거긴 하니까……. 민폐도 이런 민폐가 어디 있지. 새삼스레 그의 수고에 감사 인사라도 올려야 할 것 같다.
머잖아 생각을 정리한 듯,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프리드린. 넌 할 줄 아는 게 있으면 뭘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음…… 일단 역병을 치료해주자?”
“그렇지, 그게 정석이지. 근데 그거 알아?”
내 대답이 당연하다는 듯 카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이어 묻는 말에 멍청한 소리를 내야 했다.
“네? 뭘요?”
“지금 이 일을 해결해도 문제고, 해결 안 해도 문제거든.”
그건…… 그럴 터였다.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가짜 이그드라실이 되는 거겠지? 그러면 말리크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다.
내가 잘못한 일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일단 말단 시녀 주제에 카림의 성후가 된 것부터 잘못이었다. 이런 벼락같은 신분 상승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이그드라실이 재림했다고 사기 쳐서 카림의 옆자리를 꿰찼다고 하는 게 차라리 더 신빙성이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모든 걸 다 뒤로 제쳐놓고 봐도…… 말리크의 가발을 벗겨서 개망신을 줬잖아! 이게 제일 문제라고!
그렇다고 일을 무사히 해결한다면 신전이 난리를 칠 것이다. 카림의 정통성이 더욱 굳건히 서고, 말리크와는 좀 더 첨예하게 대립하겠지.
그렇게 되면…… 으으, 정말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을까?
‘와,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잖아?’
이걸 잘 알 말리크는 왜 우리를 보낸 걸까? 어디 한번 엿 먹어보라고?
설마 가발을 벗긴 복수를 이렇게 하는 건가?
“솔직해지자면…… 누구를 치료하는 건 어렵지 않지. 굳이 네가 안 나서도 내가 좀 혹사당하면 되니까.”
“그, 그럼 릴이!”
“됐거든요?”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리며 한 말이 끝나기도 전, 카림은 딱 잘라 대답했다. 당연히 볼멘소리를 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렇게 냉정하게 됐다고 하셔요?”
“대신 해 달라고?”
그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어, 어떻게 알았지? 내 속을 고스란히 읽힌 기분이다.
“독심술 맞다니까.”
“독심술은 무슨. 네가 할 말이야 뻔하지.”
……아, 네. 그러십니까.
내가 입술을 비죽 내밀자, 카림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강아지를 달래는 것처럼.
“물론 오해하지는 마. 너 대신 뭔가를 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왜 안 해 주려고 하세요.”
“골치 아프잖아.”
순간적으로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내가 미간을 모았다. 카림이라면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말이 뒤를 이었다.
“한 사람의 일을 해결해주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그 한 사람을 도와주면 다른 사람이 올 건 뻔하고, 그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불러오겠지? 그렇게 둘, 셋…… 프레이르 제국민 전부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 상황이 오는 건 시간문제야.”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맞는 말이라고 생각돼서.
하나를 받으면 둘을 달라고 하고, 둘이 채워지면 세 개를 원하는 게 사람이잖아? 아니, 이건 예시가 좀 틀린 건가?
“그때는 어쩔까.”
그가 묻는 말에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카림은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그 사람들을 돌려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를 찾아온 모든 이들을 도와줄 수도 없어. 전자는 불만의 소리가 나올 테고 후자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나 혹사당하다 죽을까?”
…그러게, 카림이 백만 명쯤 있으면 모를까. 하지만 내 예쁜 입술에서는 퉁명스러운 말이 흐를 뿐이다.
“과로사라니, 그거 좋네요.”
“뭐라고? 와, 벌써부터 남편을 죽일 생각이야? 우리 아직 신혼인데.”
“신혼이고 만혼이고, 예쁜 구석이 있어야 안 죽이죠.”
카림의 얼굴이 훅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야살스럽게도 눈웃음을 살살 친다.
“그래? 그러면 어디 한번 예쁜 구석 좀 만들어 줄까?”
소름이 오싹 돋는 속삭임이었다. 이유 모를 기묘한 긴장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야 했다.
“……다른 방법은요?”
“다른 방법? 예를 들자면, 뭐?”
순순하게 나가떨어진 카림이 보다 구체적인 것을 물어왔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꾸했다.
“지금 상황을 놓고 생각해보자면……. 어, 병을 낫게 하는 성수를 만든다거나, 강을 정화해서 약으로 쓸 수 있게 한다든가…… 그런 거요?”
“일단 분명히 말하자면…… 둘 다 나는 못 하는 일이야. 그런데 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말입니까?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데요.
생각을 할수록 의문이었다. 대체 말리크의 머리털은 어떻게 나게 한 걸까.
술을 다시 먹어보면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음, 근데 어차피 술을 마시면 기억이 안 나잖아?
“하지만 만에 하나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실용성은 없어.”
“왜요?”
“신전이나 귀족들이 독점해서 팔아먹을 테니까.”
“……아.”
그, 그렇겠네. 수긍한 내가 조용히 입을 다물자 그는 호수 같은 깊은 눈으로 나를 품었다.
“그러니까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치료법을 찾아서 의원들에게 넘기는 것 같거든.”
아무래도 내내 지금 상황을 수습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던 듯했다.
…일은 내가 치고 수습은 카림이 하는 것만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하지만 내 못된 입은 따로 놀 뿐이었다.
“못 찾으면요?”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지.”
카림은 항상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툭 내던졌다.
“안 돼도 되게 하라.”
……윽.
내게는 저 말이 ‘일을 쳤으니 해결해야 한다.’라고 들렸다. 아무렇지 않게 툭 내던진 것 치고는 무거운 소리였다.
“그런데 말야, 다람쥐야.”
“네?”
“너 혹시 할 줄 아는 게 생기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마. 절대로.”
날 바라보는 카림의 물빛 눈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간 내가 보아왔던 카림의 모습 중 가장 진지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함이다.
가끔 카림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자 강경하게 한마디 한다.
“가만히 있기만 해.”
“……네.”
꼬리를 말고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 그래. 카림의 말대로 얌전히 앉아 구경이나 해야겠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면 어쩐지, 말리크의 가발을 벗긴 것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