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
할 말이 없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프레이르의 사람인 이상, 이 나라에서 신화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아니까.
그런데 내가 왜?
어쩌다가 내가 저런 사람이 된 거지?
“그런데 그런 건 안 중요해.”
카림이 슬그머니 내게 이마를 맞대 왔다. 나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반문했다.
“……왜요?”
“왜냐고?”
가까이에서 보이는 눈이 씨익, 하고 휘었다.
“그 이전에 내 아내거든. 너 이제 프리드린 데스테리언이야.”
“그렇군요…….”
정신이 반쯤 나가 대답하던 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이마가 맞닿아 있던 터라 카림과 내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도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 같았지만 멍청한 음성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프리드린 데스테리언이라니?
이그드라실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공식적인 아내라고 선언하는 것은 맞았지만, 벌써부터 성이 바뀔 시기는 아니었다. 정말 식장에 들어가고, 족보에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니까?
“저기요, 제 성이 언제부터 원대하신 카림을 따라갔어요?”
“원대하신 카림이 아니라 릴이야.”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그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계약서 썼잖아. 지켜.”
“계약서는 무슨 계약서예요! 아직 도장 안 찍었다고요! 합의도 더 하자고 하셨잖아요!”
“아니, 찍었는데.”
내게서 슬그머니 멀어진 카림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혼전계약서>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그 종이 끝자락에는 내 이름과 사인과 덧붙여 도장까지 깔끔하게 찍혀 있었다.
……당연하게도 내 언성이 높아졌다.
“대체 언제! 누가 찍었어!”
“언제긴, 또 누구긴.”
그는 얄미운 미소를 남겼다.
“네 꿈속에서, 네가 찍었지.”
아, 정말 한 대 때리고 싶다.
이건 무효야. 당장 물러! 아직 품위유지비는 얼마 받을지 정하지도 못했단 말이다!
내 발악과 다르게 카림은 당당하게도 내뱉었다.
“자, 그러니까 잘 지키도록 해.”
“이리 줘 봐요!”
나는 카림이 들고 있는 종이를 냅다 뺏어 들었다. 깊게 숨을 들이켜며 떨리는 시선으로 차분하게 그걸 읽어 나갔다.
나중에 생각하자면 소꿉장난 같은 귀여운 계약서였다.
혼전계약서
남편, 릴 데스테리언과 아내, 프리드린 라비아는 이와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 조건
1. 혼인이 성립하기 전까지 릴 데스테리언은 프리드린 라비아의 몸에 손대지 않는다.
2. 혼인 후 두 사람은 다른 호칭 대신 서로를 반드시 이름으로 부른다.
3. 혼인 후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각방을 사용하지 않는다.
4. 릴 데스테리언은 프리드린 라비아의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면 그 어떠한 것도 해치지 않는다.
(단, 바선생은 예외로 한다.)
5. 릴 데스테리언은 왕족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해 행동거지에 각별히 유념한다.
6. 두 사람은 이혼할 수 없다.
7. 두 사람은 서로의 책임을 알고 성실하게 임한다.
8. 프리드린 라비아의 한 달 품위유지비는 최하 팔천으로 한다. 부족할 시 더 요구할 수 있다.
이 계약 조건을 어겼을 시, 한 달 동안 얼굴에 상대방이 원하는 문구를 새기고 살아야 한다.
릴 데스테리언과 프리드린 라비아는 이 모든 조건을 조율하고, 동의하였음을 인정함.
이름 위에는, 정말 저 사람과 내 이름자가 있는 도장이 붉게도 찍혀 있었다.
품위유지비가 최하 팔천이라니.
원래 말한 것보다 삼천이나 올라갔다. 게다가 부족하면 더 준댄다. 그것만 보면 정말 후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내가 혼전계약서를 쓰자고 했지만, 왜 내용들이 묘하게…… 내게 불리한 것 같은지 모르겠다.
결국 지금 1번 조항은 있으나 마나잖아?
7번은 뭐야? 언제 합의했어?
게다가 계약 조건을 어기면 얼굴에 뭐…… 뭘 새겨?
체면이 무척이나 중요한 왕족에게는 딱 맞는 벌이긴 했다.
그런데…… 애초에 내가 도장을 언제 찍었는데! 내가 언제 저런 내용에 협의했냐고!
파들파들 떨던 나는 종이를 북북 찢었다. …아니, 찢으려고 했다.
이 종이 자식이 얼마나 질긴지 있는 힘껏 위아래로 잡아당겨도 내 팔만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이거 왜…… 왜 안 찢겨?”
“어허, 이거 참 몹쓸 손버릇이로고.”
카림은, 아니 이 나쁜 놈은 내 손아귀에서 종이 쪼가리를 가볍게 들고 가버렸다.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품 안에 갈무리하는 모습을 보다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나, 이 옆에서 한 달만 있으면 목이 나갈지도. 내 꾀꼬리 같던 목소리야, 안녕. 흑흑.
“제, 제가 언제 도장을 찍었어요!”
“네 꿈속에서 네가 찍었다니까?”
“제 기억에는 없는 일이에요! 이거 무효야!”
“이봐. 먼저 쓰자고 한 것도 너야. 그렇게 나쁠 것도 없는 조건이잖아?”
아니야, 뭔가 모르겠지만 느낌이 불길했다. 사람에게는 촉이라는 게 있었다.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나한테 분명히, 뭔가, 이상하게 불리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할 수가 없으니 씩씩거리는 것만 가능할 뿐이었다.
대체 누가 저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도전적으로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이 작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언니죠?”
“응? 뭐가?”
“제 도장 훔쳐 온 사람! 그리고 조건에 협의한 사람! 품위유지비 팔천을 보니 틀림없어. 남는 돈 자기 달라고 할 거 같아.”
그래, 저 금액을 보면 언니밖에 없었다. 카림이 순간 할 말을 상실한 듯 입을 다물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제법 어렵게 중얼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 거짓말은 못 한다는 걸까.
“……너 진짜 감 좋다.”
― 내 화신인데 당연하지. 속일 거면 귀신을 속이거라, 물비린내 나는 놈아.
소파 위에서 앞발을 핥던 고양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 고양이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 감이 좋은 건지,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머리가 좋은 건지. 도통 구분이 안 가네.”
…지금 그게 칭찬이냐, 욕이냐. 꾹 움켜쥔 내 두 주먹이 파들파들 떨렸다.
“저기요.”
“저기가 아니라 릴이라니까. 너 벌써 몇 번이나 어겼다? 무슨 글자를 원해?”
“뭐, 어쨌든 간에요.”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허리를 주욱 폈다. 나쁜 놈에게 당당하게 삿대질을 하는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렸다.
“지금 살아 있는 신께 그게 무슨 태도예요?”
내 말이 의외였던 걸까. 멀뚱히 날 보던 나쁜 놈이 눈을 끔뻑거렸다.
나는 그런 그에게 애써 떨지 않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물론 소심한 내 허리는 남몰래 떨리고 있었지만.
“얼른 엎드려서 절부터 하지 못할까! 당장 내 말이 다 옳다고 하지 못해!”
“오.”
― ……걸작이네.
고양이의 비웃음을 뒤로한 그가 혀를 내둘렀다.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살아 있는 신이라면서! 그러면 내가 설탕으로 바다를 만들었다고 해도 믿어야지!
이윽고 카림이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예에, 그렇게 합지요.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계약서도 내놔! 당장!”
이 지옥에 떨어질 나쁜 놈은 깔끔한 동문서답을 하는 것으로 내 요구를 묵살했다.
“와, 너 지금 카리스마 넘친다? 딱 그만큼만 하면 다들 기꺼이 발밑에 꽃 뿌리면서 절하겠어.”
“저 진지해요! 계약서 당장 이리 주세요! 찢어버리게!”
“그건 절대 안 돼.”
“대체 왜요! 다시 쓰면 되잖아요!”
“나도 좀 진지해지자면.”
카림이 가득 흥분한 나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부드럽게 내 양어깨를 붙잡았다. 턱으로 흘끗, 굳게 닫힌 방문을 가리켰다.
“지금 이 방 밖에, 네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정확하게 여섯 명 있거든.”
그야말로 뜬금없는 소리였다.
가만, 그럼 내가 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친 걸 다 들은 건 아닐까…… 는.
방 밖도 쥐 죽은 듯 고요한 걸 보면 소음을 차단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 듯했다.
“……갑자기 그건 무슨 고양이가 수영하는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형님, 말리카, 세린 성주 부부와 네 부모님이 와 계셔.”
“왜……. 결혼 축하 선물이라도 주신대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말리크와 말리카, 부모님까지는 그렇다고 치지만, 내 조부모님까지 와 계신다니까. 아버지가, 내 결혼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가 기뻐하셨다고도 했고.
조부모님을 뵌 것도 꽤 오래된 일이었다.
“살아 있는 신을 현알하러.”
하지만 카림의 입에서는 다른 소리가 튀어나왔다.
‘7. 두 사람은 서로의 책임을 알고 성실하게 임한다.’
라는 조항이 눈앞에 다시 나타나는 것만 같은 이유는 왜지. 결단코 그냥 써넣은 조건은 아니었을 텐데.
“프리드린, 내 말 좀 귀담아 들어줄래? 내가 경험자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카림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질 거야.”
“……달라져요? 뭐가요?”
“다들 널 어려워하기 시작할 거야. 어제까지 사이좋았던 사람들이 차츰 멀어져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