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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36)화 (136/136)

136화

“오, 세상에.”

라비엘리와 루시안이 저택에 들어섰을 때, 풋맨 다음으로 두 사람을 발견한 건 로제였다.

“아가씨!”

로제는 그대로 달려와 라비엘리를 끌어안았다.

“…로제.”

“세상에, 아가씨. 아가씨.”

로제는 벅찬 나머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미안해요, 로제. 인사도 없이 떠나서.”

“어휴, 아가씨…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생각지도 못한 격한 반응이었다. 라비엘리는 제 무심함에 죄책감을 느끼며 로제의 등을 도닥였다.

“미안해요.”

“아녜요, 아가씨. 미안하다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뭐라고.”

급기야 눈물마저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제에게는 말했어야 했는데.”

“아가씨.”

“미안해요, 정말.”

로제는 고개를 저으며 잔뜩 젖은 눈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아녜요, 아가씨. 다만…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없으셔서 걱정했어요.”

라비엘리가 편지 한 통만 남겨두고 떠난 지 꼬박 석 달이 흘렀다.

그동안 로제는 마이어 가의 집사로서 입지를 다지고 루시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맡은 일을 척척 해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제게 믿음을 보여준 루시안과 라비엘리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로제, 이제 마이어 가의 집사님이라면서요. 일을 정말 잘해주고 있다고 칭찬이 자자하던데.”

라비엘리의 말에 로제는 얼굴을 붉혔다.

그 부분에 대해선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이미 집안 곳곳에서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녜요, 부족하기만 한걸요. 누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 더 잘해야지요.”

“로제.”

“제가 여기서 이렇게 사람답게 지낼 수 있는 건 전부 아가씨 덕분이에요. 한시도 그 사실을 잊은 적 없어요.”

“그런 말 말아요. 나야말로 이 모든 게 로제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로제는 붉어진 뺨을 한 번 매만지더니 말을 돌렸다.

“그보다 아가씨, 어디 아프신 데는 없으시죠? 괜찮으신 거죠?”

“그럼요. 아주 멀쩡해요.”

“다행이에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아가씨를 위해 기도했어요. 이렇게 건강한 얼굴로 다시 뵐 수 있어서 기쁘고 또 행복해요.”

드디어 입이 풀렸는지 로제가 제 감정을 장황하게 쏟아냈다.

그때,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내민 사용인들 사이에서 메이지가 튀어나왔다.

“아가씨!”

“메이지.”

“잘 다녀오셨어요? 말씀도 없이 가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루시안이 앞으로 걸어 나온 건, 메이지까지 훌쩍거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전부 당신만 보이는 모양이군.”

“루시안.”

라비엘리가 고개를 돌리자 루시안은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이 집 주인은 엄연히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그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자 라비엘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인이라고 늘 환영받아야 하는 법은 없죠.”

“다른 사람이었다면 꽤 언짢았을 테지만, 당신이니까.”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으며 로제와 메이지, 사용인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오늘을 잊지 말고 기억해. 늘 오늘처럼 르휜 양을 주인으로 생각해주길.”

루시안의 말에 라비엘리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지 말아요.”

“내가 말실수했네요.”

그러더니 이내 능청스럽게 다시 말했다.

“주인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실 르휜 양이 주인이에요.”

라비엘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사용인들의 얼굴은 달랐다.

그들은 제법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라비엘리와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자, 환영 인사가 끝났으면 이제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루시안의 말에 전부 가벼운 얼굴로 돌아섰다.

“르휜 양께서 돌아오시다니.”

“목욕물을 준비해야겠지?”

“집사님 말씀대로 아가씨 방 청소를 열심히 해두길 잘했네.”

“선견지명이 있으시다니까.”

마이어 가에는 전에 없던 활기로 가득 차고 있었다.

* * *

탁.

방 안으로 들어온 라비엘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몸을 움츠렸다.

낯설어서도, 환경이 달라져서도 아니다.

그녀가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눈앞에 죽은 듯 누워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

테아노 마이어는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목 바로 아래까지 이불을 덮은 모습이 얼핏 평화로워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눈 밑이 검고 피부가 푸석했다.

온몸이 마비되어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라비엘리는 그가 두려웠다.

지금의 모습은 그저 연막일 뿐, 언제고 다시 일어나 제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마른침을 한 번 넘긴 라비엘리가 조심스레 걸어선 테아노의 침대 앞에 섰다.

더는 마이어가의 주인도, 후작도 아닌 사내.

그의 뛰어난 의술은 이제 굳어버린 육신 속에 갇혀버렸다.

라비엘리는 마이어가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를 죽이거나 혹은 제가 죽는 상상을 끝없이 해왔다.

“어쩌면 오늘.”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테아노의 목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잠에서 깬 테아노가 눈을 떴다.

혼탁한 눈동자를 마주한 라비엘리가 놀라 머뭇거렸으나 그에게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테아노는 움직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이마에 올라온 땀방울이, 공포에 질린 두 눈동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여운 사람 같으니. 당신에게 내려진 형벌은 충분한 것 같네요.”

라비엘리는 손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서늘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날 밤, 라비엘리는 제 침대에 기대앉은 채 닳도록 들여다보았던 소설을 읽고 있었다.

수십 번을 읽어도 재미있었는데 오늘은 영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책을 덮고 멍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무 평화로워서 불안한 것일까, 어딘가 공허한 감정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라비엘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로제인가 싶어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루시안이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군요.”

라비엘리는 무릎에 올려둔 책을 한 번 흔들어 보였다.

“잠이 오지 않네요.”

“산책이라도 할까요?”

루시안의 물음에 라비엘리는 고개를 저었다. 잠이 오지 않는 건 사실이었으나 밖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루시안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라비엘리 옆에 앉았다.

“원래 피곤할수록 잠이 오지 않죠.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는데… 가벼운 산책이나 마사지 같은.”

그의 말에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수작이 뻔히 보인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산책도 마사지도 됐어요.”

“그럼 남은 건 하나네.”

루시안은 라비엘리의 얼굴을 감싸 안더니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도 따뜻한 숨이 불안으로 굳어져 있던 그녀의 몸을 천천히 녹인다.

라비엘리도 피하지 않고 루시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금 저를 사로잡은 나른한 기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루시안은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그녀의 침대 위로 올라왔다.

다정하지만 묘한 긴장감을 주는 손길. 라비엘리는 빠르게 뛰는 호흡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라비엘리.”

어둠 속, 사내의 눈빛은 어쩐지 맹수의 것처럼 요요한 빛을 띠었다.

라비엘리의 속내를 읽은 것인지 루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침대 시트에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사내의 손길이 닿은 손목이 뜨겁다.

온몸의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지만, 섣불리 호흡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이제 우리의 감정에 완전히 솔직해지고 싶어.”

“이미 솔직…….”

라비엘리는 뒷말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 어느덧 잔뜩 집요해진 루시안의 입술에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탓이다.

“당신을 증오했는데.”

라비엘리는 루시안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루시안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변해서는 목소리를 바꾸었다.

“…날 봐줘요.”

“싫어.”

“싫다면 그냥 꿈이라고 생각해요.”

축축한 사내의 음성이 여인에게 스며들었다.

“이러면 안 돼요.”

“늦었어요. 이미.”

동시에 두 사람의 호흡이 뒤엉킨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루시안의 희고 고른 이가 슬쩍 보였다가 어둠 속에 묻혔다.

햇살보다 곱다 여겼던 회금발이 제 앞으로 쏟아지려는 순간이었다.

아래서 올려다본 루시안의 얼굴은 평소에 보던 것과는 몹시 달랐다.

피어난 홍조, 벌어진 입술과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게 뜨인 두 눈.

루시안 역시 여인을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었다.

그동안 그녀를 생각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던 것을 떠올린다.

저를 밀어낼 때마다, 그러는 동시에 제 옆모습을 힐긋거릴 때마다 그녀를 끌어안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나날들을.

“이게 시작할게요.”

거친 호흡을 내뱉던 사내가 몸을 세우더니 여인을 똑바로 누였다.

여인은 이마에 들러붙은 금발을 손등으로 대충 쓸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비엘리 르휜.”

말갛게 빛나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구가 피어난다.

“루시안 마이어.”

그녀의 음성에선 마른 장미 같은 향기가 난다.

“나의 라비엘리.”

흐릿하게 피어난 여인의 미소를 완전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여인은 오늘에야 비로소 그녀에게 억지로 씌워졌던 무수한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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