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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135)화 (135/136)

135화

“부인께선 2층에 있나?”

“네, 주인님. 르휜 양과 함께 계십니다.”

클라인은 저택에 도착한 직후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마차에서도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본래 서두르지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도 않는 사람인데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할 만큼.

근래 바쁘다는 이유로 레브리안을 신경 쓰지 못한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내가 얼마나 믿음을 주지 못했으면.’

클라인은 괴로웠다.

몸이 좋지 않은 걸 숨겼다는 것도, 제가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도 전부 다.

이런 위태로운 마음으로 도착했는데, 레브리안이 맥 없이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울컥하고 말았다.

“레비.”

하지만 감정을 전부 드러낼 수 없었다.

침실에 이미 손님이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인기척에 라비엘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비엘리와 루시안은 이온에 더 머무를지 말지를 이야기하러 2층에 올라와 있었다.

클라인은 세 사람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세 사람, 이야기 중이었군요.”

예를 갖춘 라비엘리가 두어 걸음 걸어 나오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축하드려요, 공작님. 소식 듣고 오신 거죠?”

“네, 고맙습니다.”

클라인은 어딘가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고맙습니다. 레비의 곁을 지켜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럼 두 사람, 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

라비엘리와 루시안은 레브리안을 향해 한 번 웃어 보인 뒤 몸을 돌렸다.

문가로 나온 두 사람은 복도에 나른히 몸을 기대었다.

열린 문틈으로 레브리안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라비엘리가 즐거운 표정을 짓자, 루시안이 말했다.

“봤죠? 이온 부인께 필요한 게 누구인지.”

라비엘리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온에 남겠다고 했을 때, 레브리안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루시안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러니 우리는 로튼으로 돌아갑시다.”

루시안이 라비엘리를 제 쪽으로 돌려세우며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이 필요해.”

“…….”

“가요, 나랑 같이.”

라비엘리는 어깨를 한번 들썩이더니 말했다.

“그래요, 가요. 아직 그곳에 정리되지 않은 내 삶이 남아 있으니까.”

“정말 그뿐입니까?”

루시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로튼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정말 그것뿐이에요?”

라비엘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그야 새롭게 시작될 내 인생이 궁금한 이유도 크죠.”

루시안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기대해 봅시다.”

“뭘요?”

“앞으로의 우리를.”

이번에는 라비엘리가 천천히 루시안에게 다가갔다.

그는 다소 놀란 얼굴이었지만, 부드럽게 웃으며 라비엘리를 품에 안았다.

그 사이, 클라인은 침대로 달려가 레브리안 앞에 몸을 낮추었다.

“나의 레브.”

그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레브리안의 손을 붙잡았다.

“공작님, 바쁘실 텐데 어떻게 오셨-”

클라인은 말없이 레브리안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나른한 온기가 느껴지는 여인의 손. 이 작고 사랑스러운 여인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는 사실이 경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쉬이 믿기지 않았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클라인의 말에 레브리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해, 레비.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니요.”

“바쁘다는 핑계로 레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그대를 지켜주겠노라 다짐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몰랐다니.”

레브리안은 싱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데 아이가 생겼다는 거 정말일까요?”

레브리안의 말에 클라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전 사실… 믿어지지 않아요.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걸요.”

클라인이 온화하게 웃자 레브리안은 이불로 덮인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해요. 믿기지 않아.”

“아기가 그대 품 안에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면서.”

클라인의 말에 레브리안이 배시시 웃었다.

“산파가 말하길 지금은 아주 작은 씨앗이래요. 조금씩 아주 천천히 자랄 거래요, 공작님.”

클라인은 조심스레 레브리안을 안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하지만 레브리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에 잔뜩 힘을 주더니 몸을 움찔거렸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클라인이 레브리안의 양팔을 잡고 뒤로 물러서자, 레브리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레비?”

“공작님, 죄송한데 조금 뒤로 물러나 주시겠어요? 갑자기 냄새가 너무.”

레브리안은 고개를 팽 돌리며 코를 두 손으로 막았다.

“…냄새가 이상해요. 속이 좋지 않아요.”

“뭐? 어떻게 하지? 밖에 누구 있는가!”

클라인이 고개를 돌리고 손을 드는데 레브리안이 그를 만류했다.

“아뇨, 그냥 물 한 잔만.”

“물? 알았어.”

클라인이 허둥대며 물잔을 가져왔다. 그는 물을 건네고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레브리안이 물을 넘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괜찮아?”

레브리안은 말아 쥔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죄송해요. 갑자기 공작님의 향기가… 막.”

“막?”

“막…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러더니 생각만 해도 속이 좋지 않은 듯 연신 얼굴을 구깃거렸다.

말이 좋아 이상하게지, 사실은 너무 역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클라인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복도에 나가 있던 루시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공작님, 부인께서는 지금 입덧 중이십니다.”

클라인은 루시안을 돌아보더니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촉촉해진 눈으로 레브리안과 루시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부인께서 원하는 걸 해드려야지요.”

“원하는 것.”

클라인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레브리안을 보았다.

“레비,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진 거면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레브리안은 여전히 코를 감싸 쥔 채 흐릿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가끔… 모든 냄새가 한 번에 느껴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레브리안은 말하기 난처한지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클라인의 향기가 거북하게 느껴지니 그가 나가 주었으면 싶은데, 그 앞에서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클라인은 얼굴을 감싸 쥐더니 말을 계속했다.

“레비가 걱정되는군요. 음식 냄새뿐 아니라 이런 식으로 모든 냄새에… 예민해질 수도 있는 겁니까?”

루시안은 레브리안을 한 번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아기가 제 존재를 알리는 방법입니다.”

“언제까지 이렇습니까?”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클라인은 안타까운 눈으로 레브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대를 안을 수도 없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전 괜찮아요.”

물론 레브리안의 표정은 괜찮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특히 더 민감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 혼자 계시는 게 제일 편하실 거예요. 창문을 자주 열어 환기하고 힘들어하실 때는 자리를 비우는 게-”

루시안의 말에 레브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님 말씀이 옳아요.”

“아, 알았어. 레비, 그럼 나가 있을게. 대신 어디 불편하거나 내가 필요하면 바로 불러줘.”

“네, 그럴게요.”

침실 밖으로 나왔을 때, 클라인은 길고도 느릿하게 숨을 토해냈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여전히 레브리안이 걱정되었고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루시안의 말에 클라인이 어설픈 미소를 보였다.

“고맙습니다. 한데 벌써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능숙하게 대처하셨다면 수상했을 겁니다.”

“그런가요?”

“네, 어색하고 이상하고 낯선 게 당연하죠.”

“…….”

“부인께서도 마찬가지실 테니,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물론 공작님께서 잘하시겠지만.”

루시안의 말에 클라인은 처음보단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말씀 고맙습니다. 아무튼 두 분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아.”

루시안은 라비엘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저희는 다시 로튼으로 돌아갈 겁니다.”

“조금 더 계시지 않고요?”

“네, 집을 너무 오래 비웠어요.”

“아쉽군요. 레비의 상황도 그렇고… 함께 있어 주시면 힘이 될 것 같았는데. 물론 제 욕심이지만요.”

“알릭스를 찾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직접 만나 이 말씀을 전하고 싶었어요.”

루시안은 태연히 말을 돌렸다. 클라인은 그의 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루오 씨와 알릭스는 포도 농사를 지어 와인을 만들 건데, 첫 수확이 끝나면 공작님께 인사를 드리러 오겠대요.”

라비엘리의 말에 클라인도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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