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땡, 땡땡-
마우드 렉토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카운터에 놓인 종을 계속 눌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크고 아름다운 두 눈은 여관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있었다.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여관이었다.
우선 위치가 형편없었다.
흉흉한 소문이 많고 지대가 험하기로 소문난 사냥터 초입에 있다는 것도, 인근에 농가들이 있긴 했으나 마을과는 제법 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마뜩잖았다.
“어휴, 진짜…… 이런 시골에서 대체 뭘 하라고!”
마우드는 갈색 비로드 모자를 벗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보들보들한 실크 장갑을 벗으려다 말고 그만두었다.
손가락만으로 카운터에 놓인 장부를 한번 들춰보고는, 이내 짜증스러운 얼굴로 정면에 있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탱글탱글하고 잘 말린 붉은색 머리, 흰 피부에 갈매기 모양 눈썹, 작고 뾰족한 코는 어딘가 예민해 보였다.
그녀는 턱 끝이 묘하게 하늘로 향해 있는 여인이었다.
“내가 미쳤지. 사랑에 눈이 멀어서.”
홀로 중얼거리던 마우드는 에몬의 얼굴을 생각해내곤 피식 웃었다.
‘한 이틀만 가 있어. 딱 이틀이면 돼.’
‘싫어, 그런 외진 곳에서 낯선 사람들 빨래와 밥을 해주라고? 내가 미쳤어?’
‘아냐, 그런 거. 자기더러 그런 허드렛일을 하라는 게 아냐. 그냥 가서 관리 감독만 한다고 생각해. 으응, 관리자로 가는 거야.’
‘왜 갑자기 관리자가 필요한데? 그리고 나 그런 답답한 곳에 하루도 못 있어. 알면서 그래?’
‘아잇,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봐줘, 응? 이틀만 연기해주면 극장에 후원 크게 할게.’
‘얼마나 할 건데?’
‘자기 서운하지 않을 만큼 하지. 나 못 믿어?’
‘아니, 겨우 하녀 한 명 겁주려고 나 같은 고급 인력을 동원하는 게 말이 돼?’
‘이번에 기를 팍 꺾으려는 거야. 다신 딴생각 못 하게만 만들어 줘. 응?’
“휴, 사랑이 아니라 돈이 원수다, 원수야.”
마우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카운터 구석을 집게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보았다.
새하얀 실크 장갑에는 먼지 한 톨 묻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른 곳도 구석구석 만져 보았다.
하지만 어디를 만져도 장갑은 깨끗했다.
손이 닿는 곳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도 잘 관리하는 것 같았다.
“뭐 일을 영 못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거야? 하여튼 성질머리하고는.”
마우드 렉토르는 오페라 가수로 에몬과는 꽤 오래 만나왔다.
에몬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업을 하는 남자였기에 그녀에게 그리 충실하지는 않았지만, 만나는 동안에는 깊은 애정을 표현하였다.
그는 마우드의 아름다움을 취하였고 마우드는 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왔다.
에몬이 그리 좋은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런데도 마우드는 그와의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수완이 좋고 호탕한 사내였다. 거짓일지라도 제 앞에서 사랑을 속삭일 줄 아는 사내였으며 무엇보다 가진 게 많았다.
무대에 서는 직업을 사랑했으나 이따금 거리에서 어린아이들을 마주할 때면 안정적인 삶을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때 생각나는 게 에몬이었다.
“사장이 없는 와중에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거 아닌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홀로 지독한 삶을 견뎌왔다.
지금에야 젊음과 목소리를 팔아 살아갈 수 있었으나 이것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소 엉뚱하고도 과한 에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 외진 곳까지 달려온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에몬의 환심을 얻고 싶은 마음은 분명했다.
그녀의 혼잣말처럼 돈이 원수가 아니라 애정이, 외로움이, 불투명한 미래를 향한 불안이 문제였다.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무거워진 마우드가 감정을 환기하려 종을 더 세게 내리치려던 순간이었다.
탁, 탁탁탁.
누군가 계단을 타고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온 여인은 낡은 면모자를 둘러쓰고, 제 체형보다 한 치수는 큰 것 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에몬이 말한 하녀로군.’
처음에는 엘던을 도맡아 관리하는 하녀가 있다기에 에몬과는 어떤 사이인지, 혹시 그가 건드리지는 않았는지 조금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다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온 하녀는 푹 꺼진 볼에 눈 아래가 새카만 것이 피곤함에 절어 있어 보였다.
게다가 지나치게 마른 몸에 살이라곤 조금도 붙어 있지 않은 볼품없는 외형이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데.’
어쨌든 에몬의 취향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불쾌한 기운이 다소 누그러진 마우드가 로제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마우드 렉토르예요.”
실크 장갑을 낀 그대로 로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로제는 앞치마에 오른손을 한 번 문질러 닦고는 마우드의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렉토르 양. 로제 클렌스예요.”
마우드는 저도 모르게 편하게 이름을 부르라고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녀가 여기 온 이유는 친구를 사귀러 온 게 아니라 여인의 기를 꺾어 놓으려고 온 것이니 말이다.
마우드는 고고하게 치켜든 턱에 한 번 힘을 바짝 주고는 말문을 열었다.
“이미 에몬에게 들었겠지만, 오늘부터 내가 엘던을 맡게 되었어요.”
“네, 그런데 렉토르 양.”
로제는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여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리 없는 마우드는 그저 로제가 더는 여기서 일을 못 한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아뇨, 내 말이 먼저 끝난 뒤에 이야기하세요.”
“……네?”
“못 들었어요? 내가 먼저 말을 다 마치면 얘기하라고요.”
마우드는 손을 들어 로제의 말을 가로챘다.
‘기를 꺾어 놓을 필요도 없는 애송이인데, 에몬에게 정말 그렇게 대들었단 말이야?’
낯선 여인의 기세등등한 목소리에 로제는 입 한번 제대로 열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저, 하지만…….”
로제는 위층에 홀로 남겨두고 온 여인이 걱정되어 불안했다.
이제 저를 대신할 사람이 왔으니 당장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으나, 그 전에 우선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여차하면 엘던의 투숙객이 되어서라도 라비엘리의 곁을 지키겠노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우드는 로제의 말을 막았다.
“에몬은 오늘부터 내게 모든 걸 일임했어요. 아마 그가 당신에게 짐을 정리하는 대로 나가라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요.”
마우드는 대단히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도도하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지금껏 엘던을 어떻게 꾸려갔는지 정도는 내가 알아야겠어요. 일종의 인수인계 기간이랄까?”
가냘픈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마우드가 말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에몬이 그녀에게 지시한 내용이었다.
로제가 설명하면 계속 일할 생각이 있는지를 묻고, 앞으로 이따금 들려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조건으로 에몬에게 말해보겠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으로 불평 없이 일하라고 전하는 게 마우드가 할 일이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틀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
“이틀간 엘던에 남아 내가 묻는 것에 대답을 해주었으면 해요.”
“……대답이요?”
“그래요, 먼저 제안하거나 말하는 건 금지입니다.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요.”
마우드가 말을 마치자 로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일하러 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과한 차림이었다.
보들보들한 실크 장갑과 넓은 챙이 달린 모자, 화려한 레이스로 치장된 드레스까지.
‘엘던이 아니라 무도회장에 가야 하는 차림 아냐?’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뇨, 내가 하는 질문에만 대답하라고 했잖아요. 구구절절 설명 듣는 건 딱 질색이라고요.”
마우드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냈다.
‘뭐야?’
로제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헛웃음을 한 번 토해냈다.
“잘 알겠지요? 우선 지금까지 어떻게 일을 했는지 한 번 설명해봐요.”
마우드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
로제는 지금의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에몬이 보낸 사람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진 탓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했다.
로제는 마우드가 시키는 대로 장부를 전부 내보이고, 청소 순서와 투숙객을 응대하는 법까지 장황하게 설명해야 했다.
‘어서 올라가서 부인의 곁에 있어 드려야 하는데.’
생각보다 길어지는 응대에 로제가 불안해하고 있을 때였다.
쿵쿵쿵!
누군가 위층에서 급히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