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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71)화 (71/136)

71화

“혹시.”

그때 닫혀 있던 문이 발칵 젖혀지더니 키는 작지만 살집이 좋은 사내가 사제 도슨과 함께 걸어 들어왔다.

옆구리에 낀 가죽 가방,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가방에서 잔잔히 퍼지는 것으로 보아 의사인 모양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코를 킁킁거리더니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 이쪽으로 오세요.”

의사의 등장에 라비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조금 전 끊어진 대화는 잊었는지 초조한 얼굴로 손을 맞잡았다.

그사이 클라인의 옆으로 온 사제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다행히 투숙객 중에 의사가 있었어요. 천운이죠.”

“…….”

클라인은 말없이 의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는 계단을 올라오는 게 버거웠는지 아직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의사는 가쁘게 호흡하면서도 가방을 능숙하게 펼쳐선 약병과 가위, 메스 등을 늘어놓았다.

그 예리하고 섬뜩한 기운에 라비엘리가 두 손을 모으는 사이, 의사가 루시안을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냈다.

작은 시골 마을 진료소에 있었지만, 그 역시 십여 년이 넘도록 진료를 본 베테랑 의사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끔찍한 장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오, 맙소사.”

의사가 루시안을 덮고 있는 이불을 들치었을 때, 놀란 건 그뿐이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루시안을 내려다보고 있던 라비엘리 역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

그저 단검에 베인 줄로만 알았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검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대체.”

의사는 가방 속에서 안경을 꺼내 쓰더니 낮게 신음을 흘렸다.

화상을 입은 상처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날이 건조해지면 종종 화재가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화상 환자들을 마주해야 했다.

물론 살갗이 녹아내릴 만큼 심한 상처는 수련의 시절, 대학에서 본 게 전부였다.

그래도 나름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흰 가운을 입고 메스를 들며 의사라는 자부심을 느껴왔는데.

“이건 평범한 상처가 아닌 듯한데, 정말 검에 베인 상처가 맞습니까? 화상이 아니고요?”

사내의 왼쪽 팔은 건드리는 것조차 겁이 날 만큼 심각해 보였다.

의사가 라비엘리를 돌아보며 묻자 클라인이 대신 대답했다.

“마검에 찔렸습니다.”

“마, 마검이라고요?”

“좀 어떻습니까?”

한눈에 보기에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클라인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으음.”

의사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뒤 거즈를 한 뭉텅이 꺼내 놓더니 석탄산에 흠뻑 적셨다.

조심스럽게 환부를 닦아 냈으나 여의찮아 보였다. 검게 그을린 것처럼 보이는 팔에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으음…….”

그 이후로도 의사는 왕진 가방에 든 연고들을 꺼내 여러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환부에 말라붙은 혈흔만 조금 지워낼 뿐이라는 걸 지켜보는 이들은 전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더 기대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한동안 땀을 흘리며 사투를 벌이던 의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연고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마검은 지상의 것이 아니니 약재에 반응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요.”

클라인의 말에 의사는 손수건을 꺼내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주 느리긴 하지만.”

그는 맥없이 손에 든 거즈를 떨구며 말을 이어갔다.

“그을린 부분이 조금씩 번지고 있어요. 만약 이대로 둔다면 전신으로 퍼져갈지 모릅니다.”

“뭐라고요?”

의사의 말에 라비엘리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감염을 막는 연고도, 석탄산도 어느 것도 통하지 않으니 남은 방법은.”

그는 목 바로 아래까지 채운 단추를 풀어 셔츠를 앞으로 늘렸다.

“번지는 걸 막으려면 잘라 내는 수밖에 없어요.”

“자르다니요.”

“환부를 완전히 도려내거나 왼팔을 제거하면.”

“……맙소사.”

라비엘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지금껏 불안감을 느끼고 불쾌함에 휩싸였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라비엘리는 입술에 피 맛이 돌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놓으며 의사를 마주했다.

“다른,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설마 정말 그 방법뿐인 건 아니지요?”

“흠.”

의사는 이마를 느릿하게 문지르며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

방 안에 내려앉은 무겁고도 고통스러운 공기가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 루시안은 몹시도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단 제가 가진 것들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다른 약재가 있다면 시도는 해볼 테지만…….”

그의 말에 라비엘리가 반색하며 말했다.

“뭐가 필요한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다녀올게요. 말을 타고 마을로 나가면.”

“아뇨, 레이디. 정확히 뭐가 효과적일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런 환자는 처음이라서.”

그러자 라비엘리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듯하더니 다시 말했다.

“여기 1층에 창고가 있어요. 뭐가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약재도 있다고 들었어요.”

“아, 정말입니까?”

“네, 에몬 씨가 취급하는 약재들이 조금 있는 걸로 알아요. 여기 관리인에게 말하면 열쇠를 주실 거예요.”

“으음.”

의사는 주저하는 눈치였다.

그는 제 실력으로는 여기서 무언가를 더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약재를 가져와 배합한다고 해서 완전히 죽어 버린 팔을 되살릴 수 있을까?

의사가 회의적이라는 걸 알아차린 클라인이 그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대로 후처리를 하지 않으면 육체를 삼킨 기운이 다른 곳으로 퍼져나갈지 모릅니다. 제게는 더 이상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 옆으로 조금씩 번지고 있다고 하니,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맞죠.”

클라인의 말에 의사는 그를 빤히 보았다.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으면서 다른 희생자를 찾아낼지도요.”

“뭐, 뭐라고요?”

“완전히 희생당했다면 소각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불 속에 던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대로 방치하면 엘던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클라인의 말에 의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시, 신관님이 어떻게 하실 방법은 없습니까? 기운을 정화하거나 퇴, 퇴마하면 되지 않아요?”

“퇴마 의식은 이미 끝났습니다만, 육신에 남은 잔해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요. 느리게나마 퍼지고 있다고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마 상처와 뒤섞여 자잘하게 남아 있는 모양이에요. 그건 저 혼자만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젠장.”

그때였다.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라비엘리가 클라인을 쳐다보았다.

“테아노 후작님이라면.”

“…….”

“그분이라면 막을 방법을 알고 계실지도 몰라요.”

라비엘리의 말에 의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설마 대석학 마이어 후작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는 눈을 크게 뜨며 숨마저 헐떡였다.

“다, 당연하지요. 그분이라면 방법을 찾으실 겁니다.”

라비엘리는 지금의 상황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그를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밀려드는 두려움을 완전히 참기 어려웠다.

“도슨, 지금 바로 후작님을 이곳으로 모셔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에몬 씨에게도 여기서 일어난 일을 알려드려.”

클라인의 말에 사제 도슨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라비엘리가 초조함을 숨기는 사이 의사는 소매를 두어 번 걷어붙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려갔다 오죠. 일단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는 다른 의사가 합류한다는 말에 힘이 난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 탓인지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끼익, 쾅.

의사가 나간 뒤 라비엘리는 처연한 눈빛으로 다시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얼굴- 그것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라비엘리를 못 견디게 했다.

“루시안.”

그녀는 등 뒤에 클라인이 서 있다는 걸 잊은 것처럼, 방 안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처럼 루시안에게 말을 걸었다.

“무기력한 기분은 이전에도 충분히 느꼈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불안,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주는 공포……. 이미 차고도 넘쳐요. 충분하다고요.”

클라인은 라비엘리의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다가가 위로를 건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후작이 오면 괜찮아질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잦아든 줄 알았던 라비엘리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래서 차라리 부딪히려고요.”

“…….”

“예측할 수 없고 고통스럽겠지만 무기력한 것보단 나을 테니까.”

작지만 다부진 목소리, 클라인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여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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