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구원하지 마세요 (31)화 (31/136)

31화

“신관님!”

“쉿.”

묵직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소녀가 어깨를 움츠린다.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린 소녀는 손에 든 것을 만지작거리며 마른침을 넘겼다.

거대하고 웅장한 신전 한복판. 비향나무로 만든 제단 앞에서 신관이라 불린 사내는 중요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쳇…….’

소녀가 클라인을 부른 음성보다 클라인이 그녀를 제지하느라 낸 소리가 더 크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레브리안은 입술을 꾹 닫았다.

해봐야 좋은 소린 돌아오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

소녀에겐 태후 전하의 병증이니, 로튼에서 아주 훌륭한 의원이 오느니 하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클라인이 낸 수수께끼를 며칠 만에 풀었고, 그녀가 낸 답이 맞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수수께끼는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레브리안이 귀찮아 억지로 낸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저 멍청히 서서 클라인이 돌아보기만을 기다렸다. 그것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소녀는 괜찮았다.

레브리안의 자리는 늘 거기였으니까.

그때, 잔뜩 구겨진 얼굴의 클라인이 돌아섰다.

“레브리안.”

“레비라고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

“네?”

말없이 서 있다 해도 누군가 저를 기다리는 걸 계속 지켜보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면 더더욱.

“레비라고 부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레브리안 루즐은 녹색 원단으로 만든 모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좋은 재질도, 화려한 장식이 달린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입었다면 그저 누더기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겐 낡은 드레스를 고급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커다란 두 눈동자는 어린이의 것처럼 천연했으며, 피부는 갓 짜낸 우유처럼 맑고 고왔다.

볼록하게 솟은 이마, 곱게 뻗은 콧날과 그 아래 놓인 생기 넘치는 입술까지.

누구든 레브리안과 시간을 보내면, 그녀에게 단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살짝 눈을 접은 클라인이 손으로 제 미간을 문지르며 돌아섰다. 답답한 공기를 잔뜩 실어 입 밖으로 내뱉곤 나지막이 그녀를 부른다.

“레브리안.”

“싫어요, 레비라고 불러줘요.”

“아니, 레브리안은 레브리안이지 레비가 아냐.”

“쳇…… 그 이름은 남자아이 이름 같아서 싫은걸요.”

레브리안이 아랫입술을 내밀며 실금같이 눈을 떴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웃음이 터질 것 같지만, 애써 안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얼굴로 몰린 흥분까진 완벽히 제어했는지 의문이었다.

클라인 이온.

제국의 신인 루미온을 모시는 사제이자 대신관 다음으로 뛰어난 신력을 가진 신관.

회갈색 머리카락, 바다를 뚝 떠다가 넣은 듯 짙은 청색 눈동자를 지닌 사내다.

그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해 신전 어디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러니까 말 그대로 클라인은 신처럼 완벽하고 품위 있는 외형을 자랑하고 있었다.

더는 여인을 품을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이 애석하게 느껴질 만큼.

“레브리안,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 바쁘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하지만 신관님께서 주신 수수께끼를 풀었는걸요.”

레브리안이 커다란 눈을 영롱하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무척 소중하게 움켜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클라인이 준 종이와 연필이었다.

‘수수께끼를 벌써 풀었다고?’

클라인의 반듯한 눈썹이 흔들렸다.

역시, 놀라실 줄 알았어!

그의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레브리안은 이곳이 대신전이라는 것을 또 까맣게 잊고 깔깔거리고 말았다.

“쉿, 여기선 안 돼.”

클라인이 다소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레브리안이 작은 두 손으로 제 입을 급히 막으며 중얼거렸다.

“힘들게 풀었단 말에요.”

그렇지 않아도 작은 얼굴이 전부 다 가려지고, 눈만 빼꼼히 보이는 것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물론 클라인의 매끄러운 얼굴 위엔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따라오너라.”

클라인은 조용히 한마디만 던지고 다시 돌아섰다.

보이지 않지만, 레브리안이 치맛단을 슬며시 쥐고 발끝을 종종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눈앞에 자꾸 맴도는 잔상을 지우려,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가 뜨고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아앗!”

우당탕, 하는 소리에 다급히 돌아서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서 있던 레브리안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야…….”

그녀는 발목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했다.

클라인은 놀라 흰 사제복이 바닥에 닿는 것도 잊고 주저앉으며 물었다.

“괜찮은 것이냐!”

“네…….”

레브리안은 어설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린 어깨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넘어지며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다.

“손님 때문에 물질을 계속하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바닥이 미끄러우면 조심을 해야지!”

클라인은 상한 제 속을 감추려 레브리안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넘어져 다친 것은 레브리안인데, 무엇이 죄송하단 말인가. 클라인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얼굴까지 붉히고 말았다.

“봐야겠다. 아픈 곳이 어딘지.”

클라인의 말에, 레브리안이 움켜쥐었던 발목에서 손을 떼었다.

톡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늘고 여린 발목이다. 희고 매끄러운 복숭아뼈에 손을 대자, 레브리안의 다리가 움찔거렸다.

“읏.”

클라인이 발목을 살짝 잡았을 때였다.

한쪽 다리를 세우고 다른 한쪽은 길게 뻗은 터라 세운 다리 사이로 치마 속이 은근히 드러났다.

곧게 뻗은 종아리…….

보이지 않는 그녀의 허벅지도 분명 희고 곱겠지.

허벅지 안쪽은 어떨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큼 보드랍고, 매끄러울까.

그리고 그것보다 더 깊은 안쪽은…….

좁고 음습한, 깊은 안쪽은 어떨까.

“아아, 그렇게 잡으시면 아파요.”

생각에 빠져 저도 모르게 클라인의 발목을 세게 움켜쥐고 말았다.

그녀의 비명에 정신이 돌아온 클라인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러나 여인의 온기가 여전히 손바닥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달큰하게 클라인을 감아 안으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조만간 클라인을 잡아먹을 듯, 느른하지만 잔인하게.

“……신관님?”

레브리안이 클라인을 부를 때까지, 그는 멍청한 눈으로 제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

“신관님.”

벌어진 입을 다물며, 클라인이 레브리안을 응시했다. 그러자 레브리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환히 웃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자주 넘어지는걸요.”

잘게 흔들리는 손과 멍한 신관을 번갈아 쳐다보던 레브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

클라인이 그녀의 마른 손목을 움켜쥐며 말문을 열었다.

“안 돼, 의사에게 데려다줄 테니 진찰을 받도록 해.”

“…….”

“설 수 있겠니?”

“네.”

클라인은 레브리안을 부축하며 단단한 목소리를 내었다.

조금 전보다 더 진하게 풍겨오는 소녀의 향기에 정신이 아득하였으나, 어금니를 세게 물며 참아냈다.

그때,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시종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대신관님, 로튼에서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시종의 목소리에 클라인이 몸을 일으켰다.

황제께서 태후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토록 의사를 빨리 보낼 줄은 몰랐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 로튼에서 오신 분은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는 매우 높은 분이시다.”

“네.”

레브리안이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샐 뻔하였다.

그때, 신전 안으로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은으로 수를 놓은 짧은 연미복, 단단해 보이는 얼굴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예리한 눈매를 가진 사내였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태후 전하께선 좀 어떠십니까?”

테아노가 짧은 수염을 씰룩이며 물었다. 어쩐지 조급해 보이는 사내 모습에 클라인은 다소 의아했다.

“의원의 말로는 처음 보는 증상들이라 처방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어제부터 산책도 삼가고 누워 계십니다.”

클라인의 설명을 듣던 중이었다.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던 테아노의 시선이 뒤편에 얌전히 서 있던 소녀에게 향하였다.

“……!”

커다란 두 눈동자, 희고 창백한 피부, 볼록하게 솟은 이마. 결정적으로 희귀한 백금발에 푸른색 눈동자.

‘맙소사. 라비엘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군.’

테아노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레브리안에게 멈춘 것을 발견한 클라인이 서둘러 테아노에게 말을 걸었다.

“고단하실 텐데 짐부터 푸시죠. 에디!”

클라인의 말에 체격이 좋은 시종 하나가 다가왔다. 그러나 테아노는 여전히 레브리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금발이로군. 차림으로 보아 귀족은 아닌듯한데…….’

물론 클라인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고고한 석학이 도착하자마자 하녀를 살폈다는 게 알려진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고맙소.”

테아노는 호기심을 묻어두곤 에디를 따라 신전을 벗어났다.

* * *

“휴…….”

레브리안을 의원에게 보내고 방으로 돌아온 클라인이 침대에 털썩 몸을 떨어뜨렸다.

고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피로가 잔뜩 쌓인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린다.

해선 아니 될 생각과 행동을 참아내느라 온몸에 불필요한 힘을 잔뜩 준 탓이다.

“너는 파면당해 마땅하다.”

마치 한숨처럼 새어 나온 목소리에 클라인은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