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30)화 (3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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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아, 정말.”

자리에 앉은 해나의 어깨가 무거웠다.

재벌가, 게다가 다니는 회사의 회장의 며느리가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정작 나는 변한 게 하나 없는데 내 위치가 변했구나.”

달라진 주변인의 태도에 왠지 씁쓸한 해나가 잡생각을 떨치려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점심 먹을까요?”

평소 같으면 구내식당 메뉴가 뭔지, 나가서 먹을 건지 식당에서 먹을 건지 이야기했을 직원들이 다들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저는 오늘 외근이 있어서 나가서 먹으니까 점심 식사 맛있게들 하세요.”

불편한 분위기에 외근 핑계를 댄 해나가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 점심은 꼼짝없이 혼자 먹겠네….”

화장실에 들른 해나가 작게 한탄했다.

“좀 불편해.”

일을 다 보고 나가려는데, 익숙한 말소리가 들려 멈칫한 해나의 귀에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긴 해요. 옛날에는 막 임원들 불만도 얘기하고 그랬는데, 이제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할 것 같고.”

해나를 유독 잘 따르던 아영과 김 주임이었다.

“그러니까. 벌써 위에다 다 말한 거 아냐?”

이런 식으로도 오해를 사는구나.

해나는 어쩐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저를 가장 잘 따르던 아영이 해나의 편을 들었다.

“에이, 설마. 그래도 그러실 분은 아니잖아요.”

“좋겠다, 팀장님. 바닥부터 올라와서 7년 만에 팀장 달고 이제 한주 그룹 며느리까지.”

“그러니까요. 우리 팀장님이 진짜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 오늘 뭐 먹지? 오늘 구내식당 메뉴 별로던데.”

“칼국수 먹을까요? 요 앞에 새로 생긴 데 맛있대요.”

“그래! 칼국수 좋지.”

화장을 고치며 수다를 떨던 직원들이 칼국수 이야기에 금세 꺄르륵 웃으며 나갔다.

그렇지만 해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 직원들의 말을 곱씹었다.

“좋겠다. 난 혼자 먹어야 하는데….”

늘 함께 밥을 먹던 팀원들이 이젠 저와의 식사를 불편해하는 탓에 순식간에 우울해진 해나가 힘없이 화장실을 나섰다.

“맛없어.”

아무 분식집이나 들어가 김밥 한 줄을 시킨 해나는 몇 조각 먹다 말고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우울한 기분으로 혼자 먹는 식사가 맛있을 리 없었다.

식사를 끝낸 해나가 물 한 컵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아빠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조금만 더 참자.”

우울한 마음을 애써 누른 해나가 밝은 가면을 쓰고 거래처로 향했다.

거래처에서조차 해나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사람들은 다 그 이야기뿐이었다.

종일 연기를 하느라 잔뜩 지친 해나는 가방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아름이었으면 좋겠다.”

기대를 안고 본 휴대폰엔 인우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

눈에 띄게 가라앉은 해나의 목소리에 인우가 흠칫 놀랐다.

-어딥니까.

“지금 막 거래처에서 나왔어요. 왜요?”

왜냐고 묻는 해나가 어쩐지 날 서 보였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은데,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어딘가 지친 것 같기도 했다.

-병원 가야 하지 않습니까.

“아직 두 시간 남았는데….”

웨딩 촬영 후 이렇다 할 연락도, 만남도 없어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던 인우였다.

생각나지 않는 핑곗거리에 할 말을 고르던 인우에게 반가운 말이 들려왔다.

“……밥 먹을래요?”

저녁마저 혼자 먹긴 싫었던 해나가 용기 내 물은 말에 인우는 기회를 놓칠세라 황급히 대답했다.

-회사로 갈게요.

“저 오늘은 회사로 안 들어가요. 병원 앞에서 만날까요?”

-지금 위치 찍어요.

인우는 해나가 어디 있든 상관없는 듯했다.

위치를 말하래서 일단 말은 했는데….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아무 카페라도 들어가 있을까?

해나가 고민하는 사이, 인우는 이미 내비게이션에 위치 입력을 마쳤다.

-십 분 안에 가요.

전화를 끊은 해나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오늘 저녁은 같이 먹어 줄 사람이 있어서.”

학창 시절엔 늘 아름이 함께했고, 사회에 나온 후로는 늘 직원들과 점심을 먹었다.

저녁은 꼭 집에 들어가 형우와 함께 먹었었다.

형우가 병원에 가게 된 후로 혼자 먹는 저녁밥을 때때로 거르기도 했다. 그래도 점심은 직원들과 함께 먹을 수 있음에 위안을 삼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점심도 혼자 먹었기에, 저녁은 정말 혼자 먹고 싶지 않았다.

“타요.”

기다리기 지루해 노래를 듣고 있던 해나의 앞에 이제는 익숙해진 인우의 차가 섰다.

인우의 차를 발견한 해나가 이어폰을 빼자 차만큼 익숙해진 인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좋아합니까.”

차에 탄 해나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인우가 메뉴부터 물어 왔다.

“다 잘 먹어요.”

딱히 생각나는 메뉴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대답하자 인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제일 어려운 대답인데.”

열심히 메뉴를 정하던 해나는 인우와 싸우고 아빠의 면회도 놓쳤던 날 영우가 데리고 갔던 낙지집을 떠올렸다.

그 뜨겁고 매운맛에 잔뜩 땀을 흘리고 나면 우울한 기분도 나아질 것 같았다.

“어! 우리 회사 근처에 매운 낙지집이 있는데, 거기 가실래요? 스트레스 푸는 데 그거만 한 게 없더라고요.”

“스트레스 받았습니까.”

낙지가 아닌 스트레스에 초점을 맞춘 인우가 물었다.

“그냥 조금요. 회사 생활이 다 그렇죠.”

“그럽시다, 그럼.”

해나가 알려 준 가게 이름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인우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매번 해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 길게만 느껴져 거칠게 운전했었는데, 해나가 옆에 타 있으니 운전하는 인우의 표정부터가 달랐다.

가게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입구에 도착한 인우는 약간 벙찐 듯했다.

“정말 이거면 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둘이 처음 하는 식산데….

비싸고 좋은 음식을 사 주고 싶었던 인우의 눈에 불낙 특선 14,000원이라는 홍보물이 띄었기 때문이었다.

“네. 오늘은 꼭 이걸 먹어야겠어요.”

비장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대답한 해나 탓에 인우는 그저 해나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이모! 불낙 특선 2인분이요!”

한번 와 봤다고 자연스레 주문을 한 해나가 식당 구석에 놓인 방석 두 개를 들고 총총총 달려왔다.

하나는 인우에게 주고, 하나는 본인 자리에 놓고 앉은 해나가 멀뚱멀뚱 서 있는 인우를 불렀다.

“뭐 해요? 얼른 앉아요!”

덩달아 신발을 벗고 바닥에 앉게 된 인우는 조금 얼떨떨했다.

열한 살 이후로 어떤 식당이든 들어가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인우에게 식사는 늘 하기 싫은 일이었다. 혼자 제 회사의 대표실이나 집에서 아무거나 배에 채워 넣기만 하는 일이 꼭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랬던 인우가 일반 식당에서 해나와 마주 앉아 밥을 먹게 된 건 꼭 꿈만 같은 일이었다.

“맛있겠다! 먹어 봐요.”

먹음직스러운 낙지 요리가 나오자 해나가 아이같이 기뻐했다.

빨갛다 못해 까맣게 보이는 소스 색이 약간 겁나지만, 그 사실을 티 낼 순 없었다.

인우는 먹어 보라며 낙지를 한가득 떠 주는 해나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젓가락을 들었다.

“와,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그렇죠?”

“그렇네요.”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려 보이는 해나를 위해 인우가 애써 맞장구를 쳐 주었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인우는 딱 죽을 것만 같았다.

입과 혀가 쓰리고, 등에서 땀이 나 셔츠가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혹시 해나에게 들킬까 싶어 코를 박고 힘겹게 한 그릇을 다 먹은 인우가 고개를 들었다.

“아, 배부르다.”

고개를 들자 발견한 것은 만족한 듯 웃고 있는 해나였다.

광대가 빵실하게 솟은 웃음이 귀여웠다.

그 웃음에 꾸역꾸역 먹던 낙지볶음 탓에 알싸한 혀도 잊히는 듯했다.

“스트레스가 좀 풀렸습니까.”

“네, 완전.”

인우가 은근슬쩍 물은 말에 해나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럼 됐습니다.”

정말 그거면 됐다.

아린 혀도 타는 듯한 속도 우유 한 잔을 부은 듯 괜찮아졌다.

“이제 아빠만 보면 딱 행복할 것 같아요.”

“가죠.”

자리에서 일어난 인우가 앞서 나가 계산을 마쳤다.

인우의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가던 해나가 카운터에 놓인 박하사탕을 두 개 쥐었다.

“안 사 주셔도 되는데.”

“3억도 줄 수 있는 내가 2만8천 원을 못 내겠습니까.”

“맞는 말이지만 재수는 좀 없네요.”

해나의 핀잔에 인우가 피식 웃었다.

“여기요.”

차를 빼려는데 옆에서 꼼지락대며 부스럭거리던 해나가 박하사탕을 까 인우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안 그래도 매운 낙지 탓에 얼얼했던 입 안에 박하사탕의 알싸한 맛이 더해져 혀에 마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단맛은 하나도 없는 맵디매운 박하사탕이라 정말이지 고문이 따로 없었다.

인우는 당장이라도 뱉어 버리고 싶었지만, 해나가 앞에서 직접 입에 넣어 준 사탕을 차마 뱉지 못하고 말했다.

“고맙, 고마워요.”

인우의 타는 입 안 사정을 모르는 해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아니에요. 내가 더 고마워요. 오늘 저녁도 혼자 먹었으면 진짜 우울할 뻔했는데.”

경계가 조금은 풀린 걸까.

제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오는 해나에 인우가 넌지시 물었다.

“점심을 혼자 먹었습니까.”

“네. 이 나이 먹고 밥도 혼자 못 먹냐 할 수도 있지만, 늘 아빠랑 먹던 저녁을 혼자 먹으려니까 좀 어색하더라고요. 그래도 점심은 직원들이랑 같이 먹어서 괜찮았는데 오늘은 점심도 혼자 먹었거든요.”

“왜요?”

하마터면 오늘 있었던 일을 다 말할 뻔했다.

좋아진 기분 탓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고 생각한 해나가 재빨리 다른 핑계를 찾았다.

“그, 외근! 외근 나갔잖아요, 오늘.”

“아, 그래서.”

해나는 거짓말을 할 땐 꼭 말을 한번 더듬고 목소리가 떨린다.

그 패턴을 알아챈 인우는 이번에도 거짓말임을 알았지만 적당히 속아 주는 척했다.

‘더 파고들다 도망이라도 가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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