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28)화 (28/84)

@28

-응.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몰려오는 불쾌감에 해나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물었다.

그 말에 코웃음을 한번 친 유라가 더 날카롭게 말했다.

-그 정도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야. 나보단 네가 더 대단하지. 뭐 하고 사는지도 몰랐는데 어떻게 인우 오빠를 꼬셨대?

한 번은 참았지만 두 번은 참아 줄 수 없었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해나가 비웃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착각한 것 같은데, 꼬셨다기보단 꼬임을 당한 쪽이야, 나는.”

어떻게든 속을 긁고 싶어 비꼬며 말한 말이었다.

그 말에 한참 말이 없는 걸 보니 유라의 타격이 꽤 커 보였다.

한껏 약이 오른 듯한 유라가 애써 화를 참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회장님이 애초에 점찍어 뒀던 며느릿감은 나야. 넌 왜 그렇게 매번 내 걸 빼앗아가는데?

드라마에서나 보던 전개에 헛웃음을 친 해나가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그래, 네 소식 유명하더라. 인우 씨랑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났는데 인우 씨가 기겁을 하고 싫어한다고. 그리고 하나 더. 내가 도대체 뭘 뺏어 갔는데? 네 성적? 인우 씨? 그게 애초부터 네 거였다고 말할 수 있긴 해?”

해나의 라스트 펀치가 유라의 아킬레스건에 정확히 꽂혔다.

유라가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쥐뿔도 없는 게 진짜! 넌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렇게 당당한데? 네가 한주 그룹 며느리가 된다 한들 그 안에서 어울릴 수나 있을 것 같니?

더 이상 이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해나가 귀를 후비적대며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너 이러는 거 좀 추해 보여, 유라야. 여긴 드라마가 아니고 현실이니까 이렇게 악쓸 시간에 자기 계발이나 하고 살자.”

-뭐??? 너 지금 말 다 했….

해나는 소리치는 유라를 뒤로하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전화를 끊었다.

“얜 뭐야, 이제 와서.”

이제 대부분의 준비를 끝내 진짜 결혼식을 할 날만 남았는데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웃기면서도 애잔했다.

액땜했다 치자며 스스로를 토닥이는 해나에게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하, 진짜.”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은 해나가 소리쳤다.

“나 이제 잘 거니까 너도 그만하고 네 인생 살아, 유라야!!!”

전화를 끊어 버리고 무음으로 설정한 해나가 베개 밑으로 휴대폰을 넣었다.

***

“이건 무슨….”

인우는 황당함에 전화기를 든 채로 굳어 버렸다.

씻고 나와 내일은 몇 시에 병원에 갈까 물으려 전화를 했지만, 돌아온 답은 해나의 고함이라니.

“분명히 유라라고 했지?”

소파에 앉은 인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금세 생각을 마친 인우가 휴대폰을 들었다.

-오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라가 전화를 해도 항상 무시하며 받지 않던 인우가 먼저 전화를 하는 일은.

유라가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너 뭐야.”

잔뜩 기대했던 유라와는 달리 인우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차가웠다.

-무슨 소리야?

“너 뭐냐고. 내가 널 오해하게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내 기억엔 단 한 번도 없었어. 앞으로도 없을 거고.”

-오빤 없었겠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회장님도 사모님도! 다들 나를 가족처럼 대해 주시고! 미국에서도 늘 내 옆에는 오빠가…!”

“그만 좀 해. 네 입으로 네가 말했네. 나는 너한테 여지 준 적 없다고. 난 솔직히 네가 이러는 게 기가 차고 황당해. 그러니까 다시는 해나 씨 앞에 나타나지 말고, 연락하지 마.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내 가족 앞에서 망신당하기 싫으면.”

차가운 말투로 일갈한 인우는 유라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해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잘 거라는 그녀의 말이 떠오른 인우는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고 누웠다.

“내일 웨딩 촬영이 있으니, 내일까지만 기다리면 되겠군.”

내일도 볼 핑계가 생겼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운 인우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몇 년 만에 들어 본 음악이던가. 어릴 적 엄마가 불러 주던 자장가 이후론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계약 결혼을 제의하고 여기까지 온 지 한 달도 채 안 됐다. 그만큼 서둘러 하고 싶은 결혼이었다.

오늘 음악을 들으며 해나와 함께라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사랑까진 안 바랄게.”

해나에게 하는 말인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뱉은 인우도 금세 잠이 들었다.

지이이잉.

자신이 잠이 든 줄도 모르고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눈을 뜬 인우가 휴대폰을 찾았다.

“……해나 씨.”

-죄송해요, 인우 씨. 어젯밤에 전화했던 게 인우 씨인 줄 모르고 소리쳐서.

“괜찮아요. 그보다, 한유라한테 연락이 왔었나요?”

인우는 유라의 뻔한 행동 패턴을 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해나에게 한 번 더 물었다.

해나에게 직접 묻고, 직접 듣고 싶었다.

-아뇨. 그, 꿈! 어제 한유라를 만나서 그런지 꿈에 한유라가 나오더라고요. 잠결에 현실이랑 헷갈려서 그랬나 봐요.

한유라를 눈에 띄게 경계하던 인우를 의식한 해나가 거짓말로 둘러댔다.

“아, 그랬습니까.”

인우는 속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일단 맞장구를 쳐 주었다. 

-네, 네. 아무튼 미안했어요. 참, 오늘 12시까지 스튜디오, 알죠?

인우가 속은 줄 아는 해나는 자연스레 웨딩 촬영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돌렸다.

“네. 압니다.”

-네, 이따 봐요.”

한편, 전화를 끊은 해나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의심하면 어쩌지 했는데.”

유라가 걱정돼서 속였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거짓말을 한 이유가 있다면, 인우와 유라 둘 다에게 나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럼 꼭 내가 인우 씨한테 고자질한 것처럼 보이잖아. 어휴, 머리 아파. 앞으로도 이렇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하자, 도움을 바라지 말고.”

제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중얼거린 해나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잘할 수 있어, 오해나.”

상상도 하기 싫던 웨딩 촬영 날이 다가왔다.

어제 병원에서 어깨를 감아 오는 인우 탓에 떨리던 심장이 아직도 떨리는 것 같은데, 웨딩 촬영이라면 필시 더 진한 스킨십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떨려 왔다.

아침부터 어김없이 걸려 온 인우의 전화에 숨을 한번 고른 해나가 전화를 받았다.

“네, 인우 씨.”

-정말 안 데리러 가도 됩니까.

어젯밤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인우와 있으면 자꾸만 긴장이 돼 오랜만에 혼자 버스를 타고 가면서 평정심을 찾고 싶었다.

-정말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이따 봐요.”

전화를 끊은 인우가 아쉬움에 휴대폰에 떠 있는 해나의 이름을 한참 바라봤다.

어차피 목적지도 같은데 같이 가면 될걸.

“아주 칼 같아, 선 긋는 게.”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집어넣은 인우가 집을 나섰다.

차를 타자마자 어제 해나와 들었던 노래를 재생한 인우가 조수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오해나만 있으면 완벽하겠군.”

기분 좋게 출발한 인우의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해나 씨는 아직인가?”

스튜디오에 도착한 인우가 먼저 해나를 찾았다.

“신부님은 아직이에요. 신랑님 먼저 메이크업 하실게요.”

숍에 들렀다 오고 싶지 않았던 인우가 부른 출장 메이크업팀의 실장이 인우를 안내했다.

인우는 실장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메이크업 룸으로 들어갔지만, 찌푸린 인상은 펴질 줄 몰랐다.

진한 화장품 냄새와 향수 냄새, 그리고 실장 본연의 냄새가 점점 심해져 관자놀이부터 아파 오고 있었다.

인우의 표정을 본 실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불편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닙니다.”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인우의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은 사라질 기미가 안 보였다.

오해나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역시 데리러 가야 했어. 

인우는 몰아치는 냄새와 두통에 오만 가지 후회를 늘어놓았다.

지독하게 인우를 괴롭히던 냄새들이 눈에 띄게 옅어지는 걸 느낀 인우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수수한 차림새와 민얼굴로 수줍게 인사하는 해나의 모습이 보였다.

“신랑님이 신부님을 많이 기다리셨나 봐요. 목소리도 듣기 전에 고개가 먼저 돌아가시던데.”

메이크업 실장이 해나에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까의 기분이었으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한마디 했을 텐데, 해나의 등장으로 기분이 나아진 인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눈을 감고 해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는 데 힘들지 않았어요?”

이마에 집게 핀을 꽂아 앞머리를 고정하고 눈 화장을 받던 중인 인우가 물은 말에 해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전혀요.”

대답한 해나가 인우 몰래 휴대폰을 들었다.

거울에 비친 인우의 얼굴을 찍으려 들이대자 실장이 더 잘 나올 수 있게 몸을 틀어 주었다.

몰래 인우의 사진을 찍은 해나는 인우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화장하는 인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 재밌었다. 

이마에 꽂은 앙증맞은 분홍색 집게 핀 아래로 진하고 라인이 잘 잡힌 눈썹과 감은 눈 덕에 처음으로 본 길고 짙은 속눈썹. 그 밑으로 오뚝하고 날렵하게 잘 뻗은 콧대와 보기 좋은 혈색의 시원시원한 입술까지.

한참을 미소 띤 얼굴로 인우의 얼굴을 훔쳐보던 해나의 숨결에 인우가 감은 눈을 살짝 떴다.

“너무 티 나게 구경하는 거 아닌가.”

실눈을 뜬 채로 정확히 해나를 보고 하는 말에 깜짝 놀란 해나가 의자에서 거의 튀어 올랐다.

들켰다, 하필이면 이때 눈을 뜨고 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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