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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매번 이렇게 도와주시고. 인우 씨가 해야 할 일도 대신해 주시고. 인우 씨는 정말….”
다시금 실망스러운 인우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에 떠 있던 웃음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그 모습을 눈치챈 영우가 인우를 도와주려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인우가 그렇게 보여서 그렇지, 사실은….”
이제 막 인우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하는데, 돌연 해나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해나가 양해를 구하고 몇 걸음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네, 이모님. 네? 아빠가요? 어… 제가 지금 가 볼게요.”
전화를 끊은 해나가 커피도 챙기지 않은 채로 황급히 나가며 외쳤다.
“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해요!”
나가 버린 해나와 덩그러니 남겨진 커피를 바라보던 영우가 피식 웃었다.
“잘 만났네, 잘 만났어. 둘이 아주 똑같네.”
커피와 영우를 두고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황급히 병원에 도착한 해나가 곧 병실로 뛰어들어 왔다.
간병인의 말대로 형우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좋지 않았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해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간병인이 해나를 안심시켰다.
“잠을 오래 주무시길래 피곤하신가 했지, 식은땀을 흘리시길래 닦아드리는데 열이 펄펄 나서 간호사 호출 불렀었어요. 선생님들 오셨다 가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오후 회진 시간보다 30분 일찍 오신다니까, 해나 씨도 좀 쉬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어휴, 해나 씨 보니까 우리 아버지 간병할 때 생각나서 맘이 안 좋네. 간병이 많이 힘들죠? 그래도 해나 씨 아버님은 젊으시고, 또 워낙에 해나 씨를 아끼셔서 금방 일어나실 거야.”
“힘들긴요, 이모님이 고생하시죠…. 오늘은 저 왔으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이모님도 좀 쉬셔야죠.”
“괜찮아요. 나도 다 돈 받고 하는 건데.”
“아니에요. 둘이 있기엔 병실도 좁고, 이모님 먼저 들어가세요.”
손사래 치는 간병인을 간신히 퇴원시킨 해나가 보호자 침대에 앉아 아빠의 손을 붙잡았다.
회진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한 번도 깨지 않고 잠만 자는 형우를 보는 해나의 근심이 깊어졌다.
시계 보는 것도 잊고 형우의 곁을 지키다 보니 어느새 회진 시간이 다가왔다.
“열은 많이 떨어지셨네요. 해열제는 더 투여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요. 보호자님은 잠시 저랑 이야기 좀 나누실까요?”
30분 더 일찍 온다는 이유가 뭘까.
내내 해나를 괴롭히던 불안함이 코 앞까지 들이닥쳤다.
축 처진 어깨로 터벅터벅 복도로 나간 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여러 검사를 추가적으로 한 결과, 간암 2기로 판정이 됐어요. 아버님 기존에 있던 간경변증도 상태가 많이 악화됐고요. 그 탓에 절제 수술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다행히 종양이 하나에 크기도 크지 않아서 색전술을 먼저 해 보기로 했어요.
“색전술을 하면 완치가 될 수 있는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색전술 후 부작용이 올 수도 있고, 간 기능이 떨어진다면 간 이식도 고려해 봐야 해요.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절대 따님 간은 못 받으신다고 먼저 색전술부터 해 보겠다고 하셨지만, 저는 간 이식을 추천드려요. 그리고….”
해나가 곧 눈물을 떨굴 듯한 표정으로 간절히 의사를 바라봤다.
“아버님 복수가 또 차오르기 시작했어요. 황달은 육안으로도 확실히 심해진 게 보일 정도예요. 색전술이든 간 이식이든 이 상태로는 할 수가 없어서 일단 집중 케어실에 모셔서 급한 불부터 끌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대화를 마치고,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형우를 보고 있자니 해나는 눈물이 쏟아져 급히 병실을 나와 주차장 한구석으로 향했다.
“역시 무리였나 봐…. 어떡해….”
히끅, 히끅. 나오는 울음을 틀어막은 해나가 또다시 그날을 떠올렸다.
무리까지 하며 나간 자리에서 아빠에게 면박을 주던 사모님과 아무 말도 못 하던 제 남편이 될 사람.
“아빠를 위해서 하는 결혼인데, 아빠를 아프게 하면 어떡해….”
자신을 뒤덮는 죄책감에 자꾸만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소리가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니 주인우 세 글자가 화면에 떴다.
뻔뻔하게 떠 있는 그 이름이 꼴도 보기 싫었다.
“사과는커녕 한마디도 없던 인간이… 아빠가 이렇게 되자마자 전화를 걸어 오네.”
차오르는 화에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낸 해나는 거절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꺼 버렸다.
“재수 없는 놈.”
***
해나가 인우에게 온 연락을 무시한 지 어언 일주일이 다 되어 갔다.
그 말인즉슨 인우가 해나의 탈취 테라피를 받지 못한 지도 일주일이 다 되어 갔다는 뜻이었다.
온몸에 피가 마르는 듯한 인우는 급기야 한주 전자로 직접 걸음 했다.
“마케팅팀 사무실이….”
인우는 답지 않게 요리조리 살펴 가며 마케팅팀 앞까진 왔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멈칫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보이는 안쪽에선 해나가 팀원들과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었다.
“예쁘게도 웃네.”
상견례 후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웃음이었다.
처음엔 그 예쁜 웃음에 홀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점점 울화가 치밀었다.
“따지고 보면 계약 불이행 아닌가.”
해나의 아버지까지 찾아가 봤지만 만나 주지도 않고, 갑자기 연락을 끊어 사람 피가 마르게 만들더니 자기는 저렇게 예쁘게 웃고 있다니.
그 웃음에 인우는 이제 억울하기까지 했다.
“누구 찾아오셨어요?”
때마침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해나의 팀원이 인우를 보고 말을 걸어왔다.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두려다 자동문이 열려 버렸다.
낯선 외부인의 방문에 팀원 모두가 인우를 쳐다봤다.
물론 웃고 있던 해나도 인우를 발견하고 삽시간에 얼굴을 굳혔다.
“주인우 씨?”
차가운 표정의 해나가 더 차가운 목소리로 인우를 불렀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던 인우가 대뜸 질러 버렸다.
“오해나 씨, 나 좀 봅시다.”
저를 부르더니 먼저 몸을 돌려 나가는 인우를 보던 해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까지 찾아오는 건 아니지 않나?
팀원들의 의아한 표정과 들려올 뒷말까지. 해나는 이 상황이 치 떨리게 싫었다.
“누구세요? 팀장님,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 오늘 손님이 오기로 했던 걸 깜빡했네, 잠시만요.”
팀원의 물음에 대충 둘러댄 해나가 사무실을 나섰다.
이미 저 먼발치에 걷고 있는 인우를 향해 뛰어간 해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인우를 옥상으로 데려갔다.
“뭐 하는 짓이에요, 지금?”
옥상에 도착해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해나가 매섭게 인우를 다그쳤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질 리 없는 인우도 차갑게 대꾸했다.
“회사까지 찾아오는 건 아니죠. 사생활 존중. 계약서 항목에 있지 않나요?”
따져 묻는 해나에 기가 찬 인우가 받아쳤다.
“계약서 이야기를 본인이 꺼내니 하는 말인데, 이거 따지고 보면 그쪽이 먼저 계약 불이행한 거 아닌가?”
“뭐요?”
“계약금 받았다고 이런 식으로 먹고 배 째라인가? 그쪽은 필요한 돈 받았다 이건가? 난 그쪽 때문에 일주일 동안 머리가 아파 돌아가시겠는데.”
아차, 괜히 계약서 이야기를 꺼내 인우에게 빌미를 주었구나.
인우의 말에 말문이 막힌 해나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해라, 두뇌야. 지금 뭐라고 받아칠지 빨리 생각해 내.’
돌연 말이 없어진 해나를 보며 너무 심했나 싶은 인우가 적당히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물론 그날 기분 나빴던 건 압니다. 그래서 내가 병원….”
인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자른 해나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결혼, 아직 안 했잖아요.”
그 당당하고 무심한 말에 인우의 미간에 주름이 짙게 졌다.
“따지고 보면 아직 결혼 안 했잖아요. 탈취제 노릇도 결혼하고 그 집 들어가서 하는 걸로 계약한 거고. 그리고,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말이 짧지?”
계약서로 당한 거, 계약서로 갚는다.
짧은 시간 머리를 굴려 낸 해나가 계약서 내용으로 맞받아쳤다.
“뭐라고요?”
“됐으니까 날짜 나오면 연락 줘요. 그전까진 나도 탈취제 노릇 할 생각 없으니. 무례를 범했으면 먼저 사과하는 게 맞지, 회사까지 쫓아 와 따져 댈 줄은 몰랐네요, 주인우 씨. 그럼.”
제 할 말을 끝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가는 해나를 보며 인우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진짜 사람을 돌게 만드네, 저 여자가….”
분명 열이 받는데, 열이 받아 미치겠는데.
그 잠깐 새에 두통이 옅어졌다.
화를 내고 싶어 죽겠는데, 화내고 돌아선 모습조차 예뻐 보였다.
“이게 아니면 당사자가 사과를 해야 하나.”
병원에 찾아가 해나의 아빠에게 사과를 했던 걸 꿈에도 모르는 해나와 그 사실을 해나가 모른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인우의 오해의 골이 점점 깊어졌다.
사과가 소용없었던 건가 싶은 인우가 옥상을 벗어나 찾아간 곳은 제 본가였다.
“사과하시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간 인우가 혜영을 찾아 밑도 끝도 없이 내질렀다.
날씨 좋은 오후,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고 티타임을 즐기던 혜영이 갑자기 당한 봉변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니? 경우 없다 했더니 하다 하다 이젠 무슨….”
“사과하시라고요, 그 사람한테.”
“무슨 사과를 하라는 거야, 자꾸!”
갑자기 들이닥쳐 사과하란 말만 염불처럼 외는 인우 탓에 혜영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상견례 날 제 예비 신부와 예비 장인께 끼쳤던 무례, 직접 사과하세요.”
“너 미쳤니?”
“말씀드렸습니다. 하루 빨리 진심을 다해 사과하세요. 그리고 다음번에 또 그런 무례를 범하면 영우 형이든 회장님이든 누구 앞에서라도 안 참습니다, 저.”
또다. 또 할 말을 마치자 제 말은 듣지도 않고 나가 버린 인우의 뒷모습이 혜영의 이성의 끈을 끊어 버렸다.
“여우가 들어왔다 했더니, 뒤에 숨어서 뭐라고 지껄였기에.”
잔뜩 화가 난 혜영이 티 세트를 내버려 둔 채 나갈 채비를 했다.
차에 올라타 차 문을 쾅 닫은 혜영이 날카롭게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한주 전자로 가.”
잔뜩 화가 난 듯 보이는 제 사모에 운전기사가 잔뜩 긴장했다.
백미러로 힐끔힐끔 쳐다보다 사모와 눈이 마주친 운전기사가 바로 초점을 흐리며 진땀을 닦았다.
‘뭔진 몰라도 잔뜩 열이 받았구먼. 최대한 신경 거스르지 말아야겠다.’
속으로 다짐한 기사가 빠르게 차를 몰아 한주 전자에 도착했다.
혜영은 운전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먼저 문을 열어 내렸다.
손을 한 번 휘저어 기사를 물린 혜영은 혼자 정문으로 들어갔다.
회장에게 들어 해나가 마케팅팀 팀장이라는 걸 알고 있는 혜영이 성큼성큼 사무실로 향했다.
“아… 사, 사모님, 여긴 어쩐 일로….”
난데없이 찾아온 혜영을 알아보고 맞이하는 직원들에 한껏 기품 있는 척을 한 혜영이 도도하게 해나의 행방을 물었다.
“여기 오해나 팀장 만나러 온 건데, 지금 자리에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