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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17)화 (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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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무례하게 그런 말을 해, 쯧.”

해나와 아버지가 나가고 제 가족들만 남자 영호가 혜영을 나무랐다.

“걱정되니까 그랬죠. 인우도 그렇고, 앞으로 태어날 아기는 한주의 아긴데….”

“제 아이죠. 한주의 아이가 아니라.”

혜영의 말을 자른 인우가 차갑게 대답했다.

원래 영호와 영우 앞에서는 최대한 화를 참는 편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얘,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너도 기분 나빴니? 너 걱정돼서 한 말이래도?”

“네. 몹시 불쾌했습니다. 영우 형이 나서 주어 다행이었죠. 제 입이 열리지 않았으니까요.”

살벌해진 분위기에 영호가 혜영을 무섭게 노려보는 인우의 이름을 불렀다.

“주인우.”

그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인우가 영호를 보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 보죠. 날짜 정해지면 연락 주세요.”

차갑게 돌아선 인우가 나가 버리고, 영호 앞에서 인우에게 한 소리 들어 화가 난 혜영도 먼저 가 있겠다며 나가 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꽉 차 있던 룸에 영호와 영우 단둘만 남았다.

“이거 참….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구먼.”

“제가 어머니랑 인우한테 잘 이야기해 볼게요. 걱정 마세요.”

영우가 영호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영호는 영우가 있어 다행이라는 듯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데 회장님,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그래.”

“이렇게 쉽게 허락하실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이유가 있으실까요?”

원래라면 인우가 물었어야 했던 질문이었다.

화를 못 이겨 나가 버린 탓에 물어보지 못했던 그 이유가 영우도 꽤 궁금했다.

“밥을 먹더구나.”

“네?”

“인우 그렇게 되고 나서 단 한 번도 인우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다. 늘 한 숟가락도 뜨지 않고 서둘러 나가던 놈이, 그날은 밥을 먹더구나. 집안이고 조건이고 무슨 상관인가 싶더군. 20년 만에 처음 아들과 밥을 먹게 해 준 그 애를 어떻게 안 받아들이겠어.”

영호의 말에 영우가 쓰게 웃었다.

“그렇네요….”

***

[결혼 날짜 정해지면 연락 주세요.]

상견례를 마치고, 문자 메시지 한 통 남겨 놓고는 며칠째 연락이 없는 해나 때문에 인우는 미칠 지경이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병원 앞에 찾아가도 볼 수 없었다.

“휴가가 끝났을 텐데… 회사로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일을 하다 말고 해나가 보낸 문자 메시지만 쳐다보던 인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표님, 한주 전자 전무님 오셨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안 식구라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들어오라고 해.”

인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영우가 들어왔다.

자연스레 소파에 가서 앉은 영우가 인우를 불렀다.

“이리 와. 얘기 좀 해.”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인우가 제 자리에서 앉은 채로 대답했다.

“그때 형 앞에서 형 어머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한 거 따지러 온 거면… 그래, 미안. 형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됐는데.”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니니까 이리 와서 얼굴 좀 보지?”

언제나 그랬다.

세상 밖으로 나가기 싫어 숨어 버린 인우를 꺼내 올린 것은 늘 영우였다.

먼저 찾아와 저를 살살 달래는 영우에게 결국 져 버린 인우가 영우의 앞으로 가 앉았다.

“그럼 뭔데.”

“내가 편의점에서 만났던 그 여자.”

“알아. 오해나인 거.”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인우와 달리 영우는 잔뜩 상기된 채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그날 형이 말했을 때 알았지. 상황이며 상대방 말투며 전부 딱 맞아떨어지길래.”

“왜 말 안 했어? 그 여자가 네 예비 신부인 거.”

“말할 거 뭐 있어. 어차피 상견례 때 보게 될 거.”

정말 남의 일처럼 대답하는 인우에 영우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영우에게 인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해나는… 출근했나?”

집안사람이라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던 인우가 영우를 들여보낸 이유.

오해나는 한주 전자 직원이고, 제 형은 한주 전자 전무이니, 혹시라도 회사에서 해나를 마주쳤을까 물어보려는 수작이었다.

“난 마주친 적 없는데. 딱히 찾아가 보지도 않았고. 물어보면 되잖아.”

“물어볼 수 없으니까.”

“싸웠어?”

“싸운 건 아니고. 그냥… 연락이 안 돼. 그뿐이야.”

말을 뱉는 인우의 얼굴이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처량해졌다.

얼마 만에 보는 제 동생의 이런 얼굴인가.

제 어머니의 말에 해나가 화가 난 걸까 싶은 영우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설마… 상견례 이후로 연락이 안 된 건 아니지?”

정곡을 찔린 인우가 아무 말도 못 했다.

“맞네, 맞아. 그걸 여태 끌고 오면 어떡해. 병원에는 가 봤어?”

제 형과 이런 사생활 이야기까지 하게 될 줄 몰랐던 인우가 민망함에 헛기침을 한번 내뱉고 대답했다.

“큼… 가긴 가 봤지. 근데 마주치진 못했어.”

귀여워라.

20년간 본 인우의 모습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귀여웠다.

“말고, 해나 씨 아버지를 뵀냐고. 그날 해나 씨가 화가 났던 이유도 아버지 때문이잖아. 어머니가 해나 씨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해서. 그럼 먼저 해나 씨 아버지를 찾아가 사과드리는 게 순서지. 해나 씨 아버지한테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풀리면 해나 씨도 자동으로 풀리게 돼 있단다, 동생아.”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를 만나 보는 인우가 그런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일이라면 똑 부러지게 잘 해내는 인우가 연애에서는 말로만 듣던 연애 고자라니.

영우가 세상 귀엽다는 표정으로 인우를 바라보고 있던 때에 인우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조언 고마워. 잘 가.”

자리에서 일어난 인우는 외마디 인사만 남기고 먼저 나가 버렸다.

대표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영우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어디 가시냐며 묻는 비서실장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내려간 인우가 급하게 차를 몰았다.

그날 일로 화난 것 같긴 한데 차마 미안하다고도 못 하겠어서 여태 찾아가 보지도 못했었다. 영우도 아는 답을 자신은 생각도 못 한 게 한심했다.

***

급하게 차를 몰아 병원에 도착한 인우가 향수를 연신 뿌렸다.

해나 없이 병원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안 났지만 어떻게 해서든 오늘 해나의 아버지께 사과를 드려야만 했다.

향수를 실컷 뿌리고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마친 인우가 병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장인어른.”

병실에 들어간 인우는 6인실의 시끄럽고 복잡한 광경에 잠시 멈칫했지만 예의 바르게 형우를 찾아가 인사했다.

해나의 어릴 적 앨범을 보고 있던 형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가 어쩐 일로?”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인우의 말에 무슨 용건인지 알아챈 형우가 인우를 휴게실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인우가 또 한 번 사과해 왔다.

“그날 일은 죄송했습니다. 더 일찍 찾아뵀어야 했는데, 지금에야 오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인우의 정중한 사과에 형우가 손사래를 쳤다.

“난 괜찮아요. 그보다 해나가 속이 상해서 그렇지. 나는 괜찮아.”

“해나 씨… 많이 속상해했습니까?”

“속상해했지. 그 녀석이 가족이라곤 나 하나뿐이라 나랑 관련된 일은 끔찍하게도 생각해요.”

맞구나. 그래서 연락이 없었구나.

며칠을 추측만 하던 인우가 드디어 답을 찾았다.

“그래도 자네가 이렇게 찾아와서 사과도 해 주고 고맙네. 내가 해나한테 잘 얘기 전할 테니 주 서방도 얼른 들어가서 일 봐요. 보니까 일하다 말고 나온 것 같구먼.”

따뜻한 말에 인우의 걱정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렸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병원 안의 수많은 냄새에 한계에 다다른 인우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다시 한번 죄송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나 먼저 일어나요. 잘 가요.”

인우를 보내고 병실로 들어선 형우가 힘겹게 침대에 누웠다.

“우리 딸 오면 나 좀 깨워 줘요. 좀 피곤하네….”

해나에게 인우가 왔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온몸의 힘이 빠진 형우가 옆 침대의 환자에게 말을 전하고 눈을 붙였다.

***

그 시각, 인우의 회사에서 나와 다시 제 회사로 들어선 영우는 인우의 말이 떠올라 커피를 사 들고 해나의 팀 사무실로 향했다.

“전무님, 오셨습니까?”

저를 반기는 마케팅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영우의 눈은 계속해서 해나를 찾았다.

영우가 제 자리에서 열심히 밀린 서류들을 보고 있던 해나에게 커피를 내밀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 팀장님.”

“누구… 아, 안녕하세요!”

서류에 고정한 눈을 커피 컵이 가리자 불쾌함에 올려다본 해나가 영우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인사했다.

“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은데, 잠시 커피 한잔할까요? 할 얘기가 많죠, 우리?”

“아, 네네. 그럼 휴게실로 가실까요?”

“아뇨. 휴게실은 좀 그렇고, 옥상으로 가죠.”

자연스럽게 해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가는 영우의 모습에 팀원들이 술렁였다.

“뭐야? 전무님이 왜 커피를 사 들고 오셔서 팀장님을 찾아?”

“그러니까. 뭐야, 뭐야. 수상해…. 근데 두 사람, 좀 잘 어울리는 것 같지?”

팀원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알 리 없는 두 사람이 옥상에 도착했다.

“그땐 미안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좀 할 말, 못 할 말 구분을 못 하세요. 곱게만 자라셔서.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고, 누구에게나 그러는 사람이에요. 미안했어요.”

“괜찮습니다. 전무님이 사과하실 일도 아닌걸요. 오히려 그때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소화제도 감사했고요.”

“그러네. 인연이 되면 만나겠지 했는데 이렇게 인연이 됐네요. 난 해나 씨를 도와줘야 하는 운명인가 봐.”

장난스러운 영우의 말에 웃어 보인 해나가 주위를 둘러보다 속삭였다.

“이왕 도와주시는 김에 제가 저번에 편의점에서 했던 이야기, 꼭 비밀로 해 주셔야 해요!”

“그때 뭐라고 했었지? 비밀로까지 해야 할 말이었나? 기억이 잘 안 나서.”

능청스러운 대답에 한시름 놓은 해나가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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