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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15)화 (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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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우가 해 준 해나 이야기 탓에 하루 종일 심기가 불편하던 인우가 평소보다 빨리 퇴근했다.

퇴근한 인우가 곧바로 향한 곳은 영호가 있는 본가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인우를 맞은 것은 영호가 아닌 혜영이었다.

“회장님은요.”

“연락도 안 하고 왔니? 골프 약속 가셨다.”

혜영의 말에 대답도 않고 돌아서려는 인우에게 혜영이 한마디 했다.

“경우 없기는.”

늘 듣던 혜영의 날 선 말을 듣지도 않고 넘겼지만, 뒤에 들려온 말은 참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그런 여자를 데려와서는. 제 아비를 닮은 건지, 원.”

그런 여자. 아비를 닮았다.

그 말인즉슨 제 친어머니와 결혼하려 했던 영호를 두고 하는 말이며, 동시에 해나와 친어머니를 욕보이는 말이었다.

그 의미를 단박에 알아챈 인우가 나가려던 몸을 틀어 차갑게 말했다.

“당연히 닮았겠죠. 친자식이니.”

“뭐? 너 지금 말 다 했…!”

그 말이 혜영의 아킬레스건에 정확히 꽂혔다.

잔뜩 화가 난 혜영의 말을 끊어 먹은 인우가 더욱더 독한 말을 뱉었다.

“영우 형은 아마도 친아버지 쪽을 닮았나 보네요. 당신을 닮았다기엔 수준이 너무 차이 나잖아.”

노발대발하는 혜영을 뒤로하고 집을 나선 인우는 자신의 차에 타자마자 향수를 뿌렸다.

“역겨워.”

영우는 인우에게 꽤 특별한 존재였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재벌계에 들어온 인우를 편견 없이 대해 준 유일한 사람이자, 세상의 모든 냄새가 역겨워 방 안에만 갇혀 있던 인우를 꺼내 준 사람이었다.

혜영뿐만 아니라 그런 형을 들먹여 혜영을 도발한 제 자신 또한 역겨웠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당장이라도 해나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화제를 먹을 만큼 불편해했던 여자인데, 영호를 만나지 못해 아무런 소득 없이 찾아갈 만한 염치가 없었다.

관자놀이를 부여잡은 인우가 하루빨리 담판을 짓기 위해 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일로 전화를 다 하냐.

“어제 어떠셨나 해서요. 이렇다 할 말씀이 없으시길래 연락드렸습니다.”

-사내 녀석이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하고 원.

“제가 꽤 급해서요.”

직설적인 인우의 말에 영호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쯧…. 자리 한 번 더 만들어 봐라. 

됐다. 영호의 말에 인우의 눈에 총기가 돌았다.

“긍정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 없이 전화가 끊겼지만, 인우는 그마저도 기뻤다.

“이 정도면 됐어. 볼 이유가 생겼으니.”

자리를 만들어 보라는 영호의 말보다 기쁜 건 해나를 보러 갈 핑계가 생긴 거였다.

인우는 영호에게 전화를 걸 때와는 상반된 기분으로 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3초 전까지만 해도 기뻤었는데, 꺼져 있다는 해나의 휴대폰에 인우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뭐야. 왜 휴대폰이 꺼져 있어….”

혀를 한번 쯧, 찬 인우가 조금은 격하게 차를 몰아 주차장에서 벗어났다.

***

그 시각, 집에 다녀온 해나는 제 몸만 한 가방을 들고 병실에 들어섰다.

“우리 딸 왔어?”

잠에서 깬 형우가 해나를 반겼다.

“응. 아빠, 별일 없었지?”

“그럼. 종일 누워 있는 것밖에 아빠가 뭘 할 게 있나….”

힘이 없는 목소리에 해나가 자랑스럽게 가져온 물건을 꺼내 보였다.

“쨔쟌….”

부러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한 해나가 꺼내 보인 건 폴라로이드 사진기와 일기장이었다.

“이게 뭐야?”

형우의 물음에 해나가 마치 초등학생이 자랑하듯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게 뭐냐면, 그것은 바로바로! 아빠의 병원 일지!”

해나의 말에 형우가 사진기를 집어 들며 말했다.

“아파서 병원에 있는 게 뭐가 자랑이라고 일지를 다 써….”

풀 죽은 아빠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해나는 더 오버하며 형우를 설득했다.

“봐 봐, 아빠. 나 이제 곧 출근도 해야 하는데 아빠 혼자 병원에 있기 너무 심심하잖아. 필름도 많이 사 왔으니까 오며 가며 보이는 것들 사진도 찍고! 그때그때 느낀 감정들도 일기장에 사진이랑 같이 써 놓으면 얼마나 좋아. 아깝잖아. 그냥 이대로 흘려보내기엔.”

해나의 청산유수에 형우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리고 이건!”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 든 것은 책이었다.

“아빠가 또 책 읽는 거 좋아하니까. 심심할 때 읽으라고 가져왔지.”

“무겁게 뭐 하러 이렇게 바리바리 들고 왔어….”

자꾸만 미안해하는 형우 탓에 마음이 아픈 해나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과연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해나가 꺼낸 것은 그녀의 앨범이었다.

종종 혼자 앨범을 보며 추억을 떠올리던 아빠를 아는 해나가 챙겨 온 앨범 몇 권에 형우의 얼굴이 환해졌다.

“앨범도 가져온 거야? 무거웠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광대가 한껏 올라간 형우를 보며 해나도 밝게 웃었다.

“별로 안 무거웠어. 어차피 택시 타고 왔는데, 뭘.”

“그래도…. 집에 가서 좀 쉬지, 이런 걸 다 찾아왔어.”

“곧 회사도 다녀야 하는데 혼자 있을 아빠가 눈에 밟혀서 딸내미 출근도 못 하겠어서 그렇지.”

“잠은 좀 잤어? 요 며칠 통 못 잤잖아.”

“그럼요. 아주 푹 잤으니 걱정하지 마셔.”

해나는 집에 돌아가 챙겨야 할 물건들을 챙기고 병원에 오기 전까지 한참을 잠만 잤다.

딱딱한 보호자 침대와 시간마다 도는 회진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던 해나는 오랜만에 누운 푹신한 침대와 암막 커튼 덕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잘 수 있었다.

“어쩐지, 아빠가 전화해도 안 받더라.”

“아빠 나한테 전화했었어?”

“응. 우리 딸 뭐 하고 있나 전화했는데, 꺼져 있더라고.”

형우의 말에 화들짝 놀라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니 정말 꺼져 있었다.

“병원에 충전기를 두고 갔었거든. 배터리 다된 건지도 몰랐네.”

말을 하며 충전기를 연결하고 나니, 휴대폰이 금세 켜졌다.

켜진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던 해나가 깜짝 놀라 말했다.

“어? 인우 씨한테 전화 왔었네?”

“그래? 아이고, 기다렸겠네. 얼른 다시 전화 걸어 줘.”

“응, 아빠.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휴대폰을 가지고 복도로 나간 해나가 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인우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상기돼 있었다.

-해나 씨?

“네, 인우 씨. 전화했었어요?”

-할 말이 있어서요.

“그래요? 전화로 할까요?”

-해나 씨, 어디십니까.

“저 지금 병원이요. 방금 막 도착했어요.”

-잠깐 시간 됩니까?

“아… 네, 얼마나 걸리세요?”

-내려오세요.

“네?”

-주차장이니까 내려오세요.

주차장이니 내려오라는 말을 끝으로 배터리가 또 방전되었다.

급하게 병실로 들어간 해나가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뭐라든? 많이 기다렸대?”

형우의 질문에 넋이 나간 듯한 해나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어… 지금 주차장이래. 나 잠깐 인우 씨 좀 보고 올게. 아빠 조금만 기다려!”

형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병실 문을 나선 해나가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시간마저 너무 길게 느껴진 해나는 급기야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달렸다.

주차장까지 뛰어 내려온 해나의 눈에 여전히 깨끗하다 못해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인우의 차가 금방 보였다.

다가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리니 인우가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뭐예요? 말도 없이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전화를 했는데 휴대폰이 꺼져 있길래….”

말도 없이 찾아온 인우에 잔뜩 흥분한 해나의 물음과는 달리, 너무나도 심플한 대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만약 제가 전화를 계속 꺼 뒀으면요? 그럼 내일 아침까지 여기서 기다리셨을 거예요?”

자신을 다그쳐 오는 해나에 당황한 인우가 해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제가 말도 없이 와서 화났습니까?”

“화난 게 아니라요! 전화가 꺼져 있으면 일단 집에 가 계시든가 해야지.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는 사람이 어딨어요?”

“어차피 병원으로 오실 걸 아니까…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지 했습니다.”

단순한 건지, 뭔지. 

어쩐지 바보 같은 모습에 화낼 힘도 없이 진이 빠진 해나가 한숨을 섞어 물었다.

“도대체 어떤 얘기를 하러 오신 거예요, 무섭게.”

“무섭다니요?”

“꼭 무슨 중요한 얘기인 것처럼…. 저 계약금 못 돌려 드려요. 이미 좀 썼어요.”

해나의 말에 피식 웃은 인우가 말했다.

“돌려받을 생각 없습니다. 계약을 깰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그럼 무슨 말인데요?”

“회장님이 해나 씨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자리 한번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자리라면… 상견례인가요?”

“네. 합시다, 상견례.”

오 마이 갓. 

결혼을 하려면 상견례를 하는 건 당연한데, 막상 상견례라는 말을 들으니 벌써부터 긴장되고 어색한 해나가 늘 그렇듯 손톱 거스러미를 뜯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해나가 버벅대며 물었다.

“어… 음… 언제가 괜찮을까요?”

“해나 씨만 괜찮으시면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럼, 일단 올라가서 아빠와 언제가 좋을지 상의해 볼게요. 주치의 선생님이랑도 이야기해 보고요.”

“그래요. 충분히 상의하고 연락 주세요. 저희 쪽은 언제든 괜찮으니.”

“네. 하, 벌써부터 긴장되고 그러네요.”

“어제는 괜찮았습니까? 볼일은 다 보셨고요?”

인우가 하루 종일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꺼내며 은근슬쩍 해나를 떠보았다.

“그럼요! 괜찮았어요. 볼일도 다 봤고요.”

또 괜찮은 척해 오는 해나를 모른 척해 주는 인우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졌다.

처음 만난 영우한텐 솔직히 잘도 말하면서 왜 자신에겐 괜찮은 척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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