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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향기로운 구원자 (14)화 (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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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의 말에 남자가 민망한 듯 웃었다.

“그냥… 책잡히기 싫어서요.”

남자의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표정에 해나가 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처음 뵙는 분인데 제가 너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네요. 저는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약은 감사했어요. 이 신세를 어떻게 갚죠?”

해사하게 웃은 남자가 장난스레 대답했다.

“혹시 인연이 된다면, 나중에 갚으세요!”

정말이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웃음이었다.

“네. 그럴게요.”

인사를 마치고 먼저 편의점을 나선 해나가 버스 정류장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이놈의 동네는 버스 정류장도 없나. …아, 버스를 탈 필요가 없겠구나.”

레벨의 차이를 또 한 번 느낀 해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한참을 걸었다.

걷고 또 걸어서 버스 정류장을 찾은 해나가 버스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연락 한 통 없네.”

아무리 그래도 연락 한 통 없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

내심 서운해하던 해나가 머리를 내저으며 자책했다.

“바라지 말자. 바라면 실망밖에 더 해. 이건 비즈니스일 뿐이야.”

한참 원맨쇼를 하다 보니 드디어 해나가 타야 할 버스가 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궐 같은 집에 있던 자신과 버스에 올라 타인과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는 자신이 꼭 다른 사람 같았다.

***

“아빠, 나 왔어!”

우울한 표정을 지우고 병실에 들어선 해나가 부러 밝게 아빠를 불렀다.

“우리 딸, 오늘 힘 좀 줬구먼.”

스타일링한 해나에게 장난을 거는 형우 덕에 하루 종일 가짜 웃음을 짓던 해나의 얼굴에 진짜 웃음이 돋아났다.

“응. 어때? 이러니까 예뻐?”

“우리 딸은 안 꾸며도 예쁜데 꾸미니까 연예인 같네.”

“아빠도 참. 내가 나밖에 모르는 건 다 아빠 때문이야.”

해나의 귀여운 핀잔에 형우가 해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도 않더만 뭘. 남자친구한텐 아주 끔뻑 죽더구먼.”

“내가 언제 끔뻑 죽었다 그래!”

“그냥… 처음으로 남자친구랑 있는 걸 봐서 그런가, 아빠가 왠지 좀 서운하더라.”

“난 아빠밖에 없는 거 알면서 그러네…….”

“에이,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면 좋지 뭐. 언제까지 아빠랑 살래.”

해나의 말을 형우는 그냥 하는 빈말로 알아들은 듯했다.

하지만 해나가 한 말은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이었다.

이 결혼을 하게 된 이유도 아빠를 위해서인데.

“됐네요. 나 씻고 올게. 엄청 피곤해.”

“그래. 얼른 씻고 와.”

해나가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실로 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해나 씨?

발신자를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은 해나가 들려오는 인우의 목소리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네, 인우 씨. 갑자기 전화를 다 하셨어요?”

해나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인우가 입을 열었다.

-그… 잘 들어가셨나 해서요.”

인우는 집에 도착한 순간부터 해나를 혼자 보낸 것을 후회했다.

한 번이라도 잡아 볼걸.

작은 후회로 시작된 생각이 갈수록 살이 붙어 연락해서 물어볼까 한참을 고민했다.

시간이 꽤 늦어 이쯤이면 도착했겠구나 싶어 전화를 건 참이었다.

“네, 그럼요. 인우 씨도 잘 들어가셨죠?”

-네. 잘 들어가셨으면 됐습니다. 쉬세요.

이럴 거면 왜 전화한 거야?

지극히도 사무적인 태도에 황당하면서도 이상하게 한마디라도 더 붙여 보고 싶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해나는 금세 이야깃거리를 찾아냈다.

“회장님은 뭐라 말씀 없으세요?”

-아직까진 따로 연락 받은 건 없습니다. 내일 다시 가 볼 생각이에요.

“모쪼록 맘에 드셨길 바라야죠.”

-맘에 드셨습니다. 제가 보면 압니다.

“과연 그럴까요….”

-맘에 안 드셨어도 상관없습니다. 해나 씨는 제가 선택한 사람이니까요. 회장님이랑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뭐.

인우의 말에 해나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걱정이 좀 덜 되네요. 고마워요. 인우 씨도 이제 쉬세요.”

-네. 

간결한 인우의 대답에 전화를 끊은 해나의 발걸음이 방금 전보다 가벼워졌다.

인우가 하루 종일 얼마나 후회하고 아쉬워했는지 알 리 없는 해나는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샤워실로 향했다.

해나가 콧노래를 불러 가며 샤워하던 그때, 인우는 한참을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잘 자라고 말이라도 할걸 그랬나.”

인우는 해나를 만난 후부터 부쩍 후회를 많이 하게 된 자신을 느꼈다.

살면서 후회라는 걸 딱히 해 본 적이 없는 인우는 그 느낌이 썩 불쾌했다.

의도적으로 해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자꾸만 해나가 떠올랐다.

“그렇게 예쁘면 어쩌자는 거야.”

차에 올라타던 해나가 또 생각났다.

감히 태어나 본 여자 중 제일 예뻤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제 타입이 아니냐고 물어봤을 때엔 정곡을 찔려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집에 들일 탈취제 정도로만 생각했었던 때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해나는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딱 제 타입이었다.

“너무 내 타입이잖아.”

갑작스레 터져 나온 진심에 인우가 또 후회를 하려는 찰나, 영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오늘 네 손님 왔었다며?

아마도 혜영에게 해나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응.”

인우의 짤막한 대답에도 영우는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 갔다.

-하필이면 나 없을 때 왔어. 나도 궁금했는데.

“오늘은 그냥 회장님한테 인사만 하러 간 거야.”

-회장님은 뭐라셔?

“분위기는 꽤 괜찮았는데 아직 별 연락이 없네. 내일 집에 한번 가 보게.”

-그래. 나도 내일은 일찍 들어가야겠다. 비싼 동생 얼굴 좀 보게.

“응. 내일 봐.”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은 인우가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자꾸 생각나네….”

***

해나의 생각을 하다 한참을 뒤척인 인우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냥 한번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 밝아 있었다.

‘일어나기 싫다….’

단잠을 한번 자 봐서 그런가.

해나를 만나기 전 인우는 잠을 깊게 자 본 적이 없어 일어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해나를 만나고부터는 자꾸만 더 자고 싶었다.

힘겹게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친 인우가 회사에 도착했을 땐, 뜻밖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비싼 동생님.”

비서실장의 자리에서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영우였다.

“형이 웬일이야? 오늘 집으로 간다니까.”

“저녁에 급하게 미팅이 잡혀서. 하도 궁금해서 시간 날 때 와 봤지.”

“스케줄 보고는 조금 이따 듣는 걸로 하죠.”

영우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비서실장에게 언질을 준 인우가 영우를 대표실로 이끌었다.

“도대체 누구야?”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본론부터 물어 오는 영우를 가뿐히 무시한 인우가 물었다.

“커피? 티?”

“난 커피. 그래서 누구야? 네가 집에 인사까지 시킨 여자가.”

“있어. 특이한 여자.”

두리뭉실한 인우의 대답이 영우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낸 영우는 물러나지 않고 되물었다.

“얼마나 특이하면 네가 결혼까지 한대. 유라도 마다해 놓고.”

“한유라랑 비교가 안 되지.”

“완전히 팔불출이고만.”

인우를 놀려 대며 호탕하게 웃는 사이, 비서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고마워요.”

영우가 신입 비서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아, 아닙니다….”

영우의 필살 미소에 신입 비서가 완전히 얼어 버렸다.

“나가 보세요.”

그에 비해 차갑고 날 선 인우의 얼굴에 겁을 먹은 비서가 황급히 나갔다.

“직원들에게 좀 따뜻하게 대할 필요가 있어.”

“머리 아파….”

암묵적으로 자신의 회사의 향수만 쓰는 직원들과 달리, 신입 비서에게선 다른 향수 냄새가 났다.

그 냄새에 머리가 아파진 인우가 따뜻하게 대해 줄 리 없었다.

“그래서, 사진은 없어?”

“없어.”

“1년을 만났다며. 사진 한 장 없어?”

“응.”

“에이, 너무 과보호다.”

영우는 능글능글 웃으며 정보를 캐 봤지만, 건질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만난 지 이제 3일 됐는데 정보가 있을 리가.

“그러게. 사진 하나 없네.”

“너도 너지만 그분도 그분이다.”

영우의 말에 인우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안 바쁜가 봐?”

“안 그래도 이제 가 볼 거야. 아, 나 어제 편의점에서 재밌는 여자 만났어.”

“별로 안 궁금한데.”

정말이었다. 인우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해나 생각만 하기도 벅찬데 다른 여자 이야기가 궁금할 리가 없었다.

“들어 봐. 소화제를 사러 갔는데 그 여자도 소화제를 찾더라? 내가 낚아채니까 망연자실해하길래 반을 나눠 주고 같이 소화제를 먹었어. 단단히 체한 것 같길래 왜냐고 물어보니까 결혼할 남자 집에 다녀왔대. 압박 면접 받은 것 같아 죽겠다더라.”

이야기를 듣는 인우의 머릿속에 자신에게 하소연하던 해나의 말이 떠올랐다.

“근데 집에 네 손님이 왔다 갔다잖아. 그래서 생각했지. 설마 네 여자친구는 아니겠지?”

“아닐걸. 어디서 만났는데?”

“언덕 밑 편의점에서.”

“굉장한 우연이네.”

“그렇지. 자기가 많이 기운다고 하소연하던데. 근데 진짜 예쁘더라. 한유라보다 예쁜 여잔 처음 봤어.”

영우의 말에 인우의 의심이 확신이 됐다.

‘오해나다. 형이 만난 여자가 오해나가 확실하다.’

소화제를 먹었다는 말이 신경 쓰인 인우가 넌지시 물었다.

“소화제까지 먹었어야 했대?”

“응. 완전 단단히 체했다더라. 보는 내가 다 안쓰럽더라니까.”

영우의 말에 인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체했었구나.”

“응?”

더 이상 영우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진 인우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아냐. 형 이제 가 봐. 여자친구는 다음에 보여 줄게.”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영우가 눈치껏 대표실에서 나가자 인우가 답답함에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괜찮은 척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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