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자꾸 욕심 나
“넌?”
“너무 오랜만에 인사드리죠? 잘 지내셨어요? 저 하은이에요. 백하은.”
“알지, 하은 양.”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티가 좔좔 흐르는 최고급, 최신상으로만 꾸민 하은을 숙영은 한 번 쓱 훑어봤다.
그러고는 하은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예전 서현에게 보여주었던 미소로.
“하은 양, 이게 얼마 만이야?”
“얼마 전에 미술관 갔었는데, 안 계셔서 뵙지도 못하고 그냥 왔어요.”
“어, 그랬어?”
“네. 그땐 아쉬웠는데 이렇게 밖에서 뵙게 되니까 더 좋은데요?”
살가운 미소를 짓는 하은을 숙영은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아이고, 언제나 예쁜 말만 하지.”
“쇼핑 오셨어요?”
“응, 쇼핑도 좀 하고, 우리 태성이 신혼살림도 좀 볼 겸.”
“아… 오빠, 결혼 하나 봐요?”
“그렇게 됐어.”
“그랬구나… 아쉽네요. 제가 태성 오빠 많이 좋아했었는데.”
“뭐? 하은 양이 우리 태성이를?”
“네. 오빠가 약혼했다는 거 아는데도… 마음이 잘 안 접어지더라고요.”
“어머… 우리 태성이도 알아?”
“글쎄요, 괜찮으시면 차 한잔하시겠어요?”
“그래, 그래.”
한편, 백화점 밖으로 나가던 서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Rrrrrr- Rrrrrr-
태성이 벌써 왔나 싶어 서현은 얼른 휴대전화를 받았다.
“벌써 왔어요?”
- 서현아, 나야.
서현은 얼른 휴대전화 액정을 확인했다. 민혁의 전화였다.
서현은 아차 싶어 다시 수화기에 귀를 가져다 댔다.
“오빠, 미안해요. 다른 사람인 줄 알고.”
- 통화 가능해?
“네, 왜요?”
- 연습실에 있나 했더니 갔다 그래서… 급하게 나갔다며?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뇨, 아무 일 없어요.”
- 서현아,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너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저녁이나 같이 먹자.
“어쩌죠? 오늘은 약속이 있어요.”
“그래? 네가 알아두면 좋은 분인데… 그럼 내일 저녁은?”
“내일 저녁요?”
순간 서현의 머릿속에 태성이 떠올랐다.
“저기 그게….”
약속은 따로 없었지만 서현은 선뜻 대답하지는 못했다.
지금 태성을 만나면 언제 헤어질지 장담할 수가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간을 비워둬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걸 신경 쓰는 제 자신이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서현이 말을 잇지 못하자, 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왜? 약속 있어? 사실은 너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말 안 했는데, 이번에 내한 공연 온…
“헉… 설마….”
- 그래, 네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잖아. 어렵게 시간 마련한 건데… 미룰 수 없는 약속이야?
“아 그게… 죄송해요, 오빠. 미룰 수 있는 약속이 아니에요.”
- 아, 그래… 아쉽네.
그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저 지금 급한 전화 들어와서… 미안해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 어, 그래…
서현은 얼른 전화를 끊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저 지금 나와 있어요. 어디에요?”
* * *
민혁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애꿎은 휴대전화만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서현이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누구의 전화를 기다렸길래… 누구랑 약속이 있길래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피아니스트를 만나는 자리까지 거절하고… 설마… 이태성?
얼마 전, 서현과 대화를 하던 중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가 태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슬쩍 액정에 뜬 이름을 보는데 분명 이태성이었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서현과 태성의 약혼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인데… 두 사람이 연락하는 게 당연한 건데…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인가? 이렇게까지 기분 나쁜 일인가?
얼마 전, 서현이 자기와 잘 수 있냐고 묻는 질문을 했을 때,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그녀와 자는 상상을 했었다.
오랫동안 예쁜 여동생 같았던 서현을 두고 감히 이런 상상을 할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상상하는 순간,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러고 싶다는 욕망이 갑자기 밀려들었다.
그 당시엔 이러한 욕망이 당황스러워 서현의 질문에 대답도 못 할 정도였다.
그리고 며칠째 이 감정은 도대체 뭐지?
자꾸 욕심이 난다, 장서현이.
이 욕심이 정확히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건지… 단순한 욕망인 건지, 그녀를 향한 진심인 건지 확실히 하고 싶어졌다.
태성이 귀국을 하고, 그와 연락하는 서현을 보는 순간 감정이 엉키고 말았다.
서현이 욕심났다… 어떤 욕심일까?
더 이상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그동안 어영부영 넘겼던 이 감정이 뭔지…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좀 전, 들어갈 틈조차 없게 느껴지는 서현과의 통화는… 숨통이 조여왔다.
민혁은 서현과의 통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그러다 휴대전화 사진 속에서 서현의 사진을 찾았다.
무대 뒤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예뻐서 저도 모르게 카메라 버튼을 눌렀었다.
“서현아….”
서현의 사진을 보는 민혁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오랜만에 만난 그였다.
근데 태성은 무척 바빠 보였다.
지난번과 같았다.
차 안에서 내내 업무 통화를 하느라 눈길조차 주지 않는 태성이었다.
일주일 만에 만났는데, 그 흔한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채 서현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태성의 집에 도착해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업무를 하느라 서재에 들어가서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부른 건지….
왜? 이러고 자기 할 일 끝나면 또 몸만 탐하려고?
그러다 또 연락을 끊겠지?
그러고는 며칠 뒤에 생각나면 또 연락하겠지.
그리고 또… 또 몸만 탐하겠지.
이럴 줄 알고 시작한 관계였지만 서현은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먼저 그에게 결혼을 요구한 것도 자신이었으면서…
돈 때문이라고 말해 놓고…
받을 건 다 받으면서 이제와 혼자 상처까지 받는 거 너무 웃긴 일이잖아.
그래, 근데 웃긴 거 아는데….
나 진짜 왜 이러지?
그는 그의 세상을 살고 있는데, 나 혼자만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그도 그의 집안도 내가 주제 파악을 잘해서 좋다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서현이었다.
그에게 서운해할 필요도, 그런 주제도 못 되면서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라니….
이미 원하는 건 얻었고, 이 이상은 더 바라면 안 되는 관계인 건데, 어느새 바라고 있었다. 그에게 뭘 더 바라고 있어 괴로워졌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진 서현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쪽지를 써놓은 채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일을 마친 태성은 거실로 나왔다.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일이 터지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장은그룹에게 거래를 밀린 업체의 악의적인 모함이었다.
다행히 큰 소동 없이 빠른 대처로 일을 처리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밖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고, 집 안도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태성은 불을 켜 서현을 찾았다.
그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장서현?”
태성은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서현이 없는 그 며칠 동안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어 예민한 나날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서현이 떠올랐다.
서현을 안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그녀를 출장지로 데려오는 미친 짓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장은그룹 때문에 출장을 간 걸 알면, 서현의 성격에 불편해할 게 뻔했다.
불편해하는 그녈 보느니 그냥 참고 말겠단 생각으로 욕망을 억눌렀는데… 이젠 한계였다.
태성은 출장에서 돌아와 서현부터 찾았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도 걸렸고.
어떤 취급을 당할지 알기에….
하지도 않은 약속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어머니에게서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빨리 일을 끝내고 그녀를 안을 생각이었다.
근데 일이 끝나고, 안아야 할 그녀가 사라졌다.
안 그래도 예민해진 신경이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태성은 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수화음 뒤에 전화를 받는 그녀였다.
“어디야?”
- 연습실요.
“말도 없이 거긴 왜 간 거지?”
- 쪽지 써놓고 나왔는데, 못 봤어요?
“쪽지?”
태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불이 켜져 있는 바 테이블 위에 서현의 쪽지가 있었다.
연습실에 있겠다는 쪽지였다.
태성은 그 쪽지를 확인한 후, 다시 통화를 이어갔다.
“돌아와.”
-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연습도 더 해야 하고….
“연습실로 차 보낼게.”
“아뇨, 오늘은 안 갈래요.”
서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어진 휴대전화를 보며 태성은 어이가 없었다.
“뭐지, 지금?”
안 그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근데 이 와중에 신경을 긁는 그녀였다.
태성은 이 상황 자체가 짜증이 났다. 제 맘대로 안 되는 이 상황이,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쌓인 욕정이 분노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태성은 스마트키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 * *
똑똑- 똑똑-
여러 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서현은 피아노 연주를 멈췄다.
“누구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문틈 사이로 누군가 커피를 빼꼼 내밀었다.
“누구세요?”
서현이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문 뒤에서 민혁이 나타났다.
“커피 배달시키셨죠?”
“오빠… 집에 안 갔어요?”
연습실에 간 서현은 집에 가는 민혁과 마주쳤었다.
분명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데, 집에 간 줄 알았던 민혁이 다시 돌아온 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저녁 같이 먹을 걸 그랬다.”
멋쩍게 웃는 서현에게 민혁이 커피를 내밀었다.
“자, 네가 좋아하는 바닐라라테. 휘핑크림 듬뿍.”
“어? 고마워요.”
“너 기분 별로일 때 항상 이거 마시잖아. 지금 이게 필요해 보여서.”
“이거 주려고 다시 온 거예요?”
커피를 마시려던 서현이 흠칫 놀라 민혁을 바라보자,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