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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14)화 (14/111)

14화 

늘 이렇게 불쑥

“연습하러 갈 때도, 집 앞 슈퍼를 갈 때도 신경 써. 신경 쓴다고 될 것 같진 않지만….”

“…….”

“하여간… 우리 태성이 체면은 생각도 안 하지?”

“…….”

지금 서현의 눈앞에 있는 숙영은 그동안 봐왔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서현은 태성과 약혼을 하고 나서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숙영을 만났었다.

그때마다 구박을 하거나 이런 못마땅한 얼굴을 한 숙영은 본 적이 없었다.

다정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 정도 천대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받은 전화에서 흘러나온 숙영의 목소리는… 서현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굉장히 불만이 가득했고, 못마땅한, 누가 들어도 싫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얘가 왜 대답이 없어? 너 우리 태성이 앞에서도 이렇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답답하게 구는 건 아니지?”

굉장히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차는 숙영을 보며, 서현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얘?”

숙영이 서현을 부르는 소리는 한 글자였지만, 그 글자 안에 애정이 없다는 건 누구도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서현이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뒤늦게 답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그것도 못 참은 숙영이 먼저 말했다.

“너 내 말 안 들리니?”

“죄송합니다.”

“휴, 너 원래 이런 애였니? 답답한 것투성이니, 이거 원… 우리 집안, 너 마음에 들어서 이 결혼 진행하는 거 아니다. 그건 알지?”

“……?”

서현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치고 있었다.

확 달라진 숙영의 태도에 정신이 멍하기만 한데, 정신 차릴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서현에게 퍼붓고 있었다.

“모르니? 우리가 이 결혼을 계속 진행하는 이유… 그걸 모르면 곤란하지. 솔직히 우리 집안이 부족할 게 뭐가 있니? 넘치면 넘쳤지. 안 그러니?”

“네….”

“그래서 다 망해가는 집안의 딸인 널 받아들이는 거야. 적어도 조금 있다는 이유로 설치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없이 자란 애들은 격이 안 맞고, 그래도 너는 어느 정도 수준이 맞으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그리고 앞으로 네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겠지?”

서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취급은 처음이어서 적잖이 당황한 탓이었다.

지금 숙영이 왜 제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알았다. 그녀가 분명히 말해 줬으니까.

“왜 대답이 없어?”

“네….”

“그래 너는 그렇게 네. 네만 잘하면 되는 거야, 알겠니?”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말 길게 하지 마라. 난 수다스러운 며느리는 딱 질색이니까.”

“네.”

“태성이 말대로 주제 파악이 빨라서 좋구나.”

‘주제 파악이 빨라서 좋다… 아….’

그가 그런 말을 했구나.

상처받을 이유 없는데, 그럴 주제도 안 되면서… 그게 잘 안 됐다. 심장이 조금 욱신거렸다.

이런 거에 상처받을 주제 아니잖아, 장서현.

서현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숙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쇼 시작할 때 됐다. 후… 옷이 그게 뭐니?”

다시 봐도 아니라는 듯 대놓고 혀를 끌끌 차는 숙영이었다.

서현은 숙영에게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잃을 게 너무 많았으니까.

그리고 주제 파악이 빨랐으니까.

“오늘 쇼에서 태성이한테 어울리는 거 있는지 잘 봐라.”

숙영이 오늘 백화점에 온 목적은 VVIP들만 입장할 수 있는 패션쇼를 보기 위해서였다.

평소에는 퍼스널 코디네이터들이 의상을 준비하기 때문에 이런 쇼에 올 필요가 없는 숙영이었지만, 그녀의 변덕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워낙 쇼핑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숙영은 오늘 일부러 서현을 부려 먹으러 나온 거였다.

제대로 기를 죽이고, 잔소리도 하고, 길들이기 위한 숙영만의 작전이었다.

그런 속셈을 모르는 서현이었지만, 앞으로 숙영과 이런 곳을 계속 와야 하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있었다.

* * *

화명그룹 회장실.

출장 보고를 마친 태성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이 회장이 물었다.

“안색이 안 좋구나. 어디 아픈 게냐?”

“아뇨. 괜찮습니다.”

이 회장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라. 네 엄마가 오늘 서현이 데리고 같이 저녁 먹자고 하던데, 안색을 보니 그냥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구나. 괜히 네 엄마 비위 맞출 필요 없이 다음에 먹자고 해.”

서현의 이름을 듣자마자 태성은 신경이 곤두섰다.

“서현이요?”

“오늘 네 엄마가 서현이 데리고 백화점 갔다가 장도 본다고 하던데… 아직 연락 안 했나 보구나?”

“네.”

이 회장은 숙영을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네 결혼 마음에 안 든다고 펄쩍 뛸 때는 언제고, 이젠 서현이를 잡겠다고… 아무래도 서현이가 힘들게다. 네 엄마 성격 알잖아?”

분기마다 히스테리를 부리는 숙영이었다. 이 회장은 그녀가 왜 히스테리를 부리는지 관심은 없었지만, 귀찮긴 했다. 신경 건드리는 게 싫었으니까. 

이번에도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 이 회장이었다.

태성이 작게 한숨을 삼키고, 이 회장을 쳐다봤다.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행여 여자들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말아라. 여자들 일은 여자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그런 데 신경 쓰면 괜히 머리만 아프지. 회사 일에나 신경 써.”

“네.”

회장실에서 나온 태성은 한숨을 쉰 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 비서와 걸음을 옮겼다.

“부회장님, 일이 좀 생겼습니다.”

“무슨 일?”

고 비서가 태성에게 태블릿을 보여주었다.

내용을 살피는 태성의 미간이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지?”

“이번 거래에서 탈락한 업체가 자신들이 아닌 장은그룹과 계약한 것이 부당하다며, 사돈 될 사이끼리 뒷거래를 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더니 이제는 언론에 취재 의뢰를 하겠다, 협박을 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미리 막지 못했습니다.”

고개 숙이는 고 비서를 보며, 태성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출장 내내 자신 못지않게 고생을 했던 고 비서였다. 

미안할 정도로 혹사당한 부하직원에게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됐어. 지금 와서 이런 얘기 소용없고, 회장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장은그룹과의 거래가 부당하지 않다는 근거 자료 준비부터 해.” 

“네, 알겠습니다. 근데 부회장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장은그룹 일 때문에 요즘 너무 무리를 하시는….”

“고 비서 안색부터 챙겨. 그리고 급한 것부터 처리하는 것뿐이니까 행여나 이런 말 회장님 귀에나 서현이 귀에 들어가지 않게 입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차부터 대기시켜.”

* * *

서현은 쇼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숙영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일부러 고용인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숙영이었다.

서현을 부려 먹을 심산으로….

“이거 어때?”

“잘 어울리세요.”

벌써 명품백만 수십 가지… 아니 백 개 가까이 본 것 같은 서현이었다.

숙영은 지치지도 않는지 백을 왼쪽으로 들어봤다, 오른쪽으로 들어봤다, 어깨에 걸쳐 봤다, 손으로 들어봤다, 팔에 끼워 봤다… 포즈를 바꿔가며 서현에게 물었다. 

“이건 이렇게 드는 게 좀 낫지 않니?”

“네, 예쁘세요.”

“얘! 넌 다 예쁘다고 하면 어떡하니? 그럼 이건?”

“그것도….”

“그럼 어떤 게 제일 나은 것 같니? 네 보기에는?”

솔직히 너무 많은 걸 봐서 이게 어떤지 저게 어떤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래도 겨우 머리를 짜내서 대답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Rrrrrr- Rrrrrrr-

서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성이었다.

일주일 만에 온 그의 전화였다.

순간 서러움이 북받치는 걸 꾹 참아냈다.

서현이 전화를 받지 않고 멍하니 보고만 있자, 숙영이 닦달했다.

“뭐 하니? 끊을 거면 얼른 끊고, 받을 거면 얼른 받지 않고?”

“태성 씨 전화예요.”

“태성이 전화면 빨리 받아야지. 뭐 해?”

“네.”

서현은 숙영의 성화에 못 이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지금 어디야?

잘 지냈냐는 안부 정도는 늘 가볍게 생략하는 태성이었다.

서현도 물을 생각은 없었다.

“백화점이에요.”

- 10분 뒤, 백화점 앞으로 나와.

“지금요? 지금 어머님….”

서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성은 전화를 끊었다.

다시 인생에 들어온 그였다.

이렇게 불쑥, 아무렇지 않게 쓱.

“저기 어머님, 저….”

“왜?”

“태성 씨가 지금 나오라고 연락이 와서요.”

“태성이가? 벌써 출장에서 돌아왔나?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출장 중이었구나.’

서현은 눈치껏 대답했다.

“네, 출장에서 돌아왔나 봐요.”

“그래?”

숙영은 서운함에 태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너 출장에서 돌아왔으면… 뭐? 알았다.”

숙영은 전화를 끊고 서현을 째려봤다.

“넌 애가….”

“네?”

“태성이랑 약속한 것도 잊고 여기 있으면 어떡하니? 젊은 애가 기억력이 왜 그래?”

“네?”

아무래도 태성이 약속을 먼저 했다고 거짓으로 둘러댄 것 같은 눈치였다.

서현은 숙영 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네, 제가 깜빡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그럼 먼저 가 봐라. 태성이 거의 다 왔다니까.”

“네. 어머님은요? 그리고 오늘 저녁은…?”

“말 길게 하지 말랬지?”

“네.”

숙영은 서현을 끝까지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보고는 턱으로 가라는 듯 백화점 입구를 가리켰다.

서현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백화점 입구로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숙영이 다시 몸을 돌려 쇼핑을 시작하려는데, 그때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선정그룹의 막내딸 백하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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