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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끌림 (3)화 (3/111)

3화 

잘 보여 봐

고급스러운 재즈 선율이 흐르는 HM 그랜드호텔 라운지 바는 풀파티가 열리는 야외와는 완벽히 대조되는 분위기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다른 분위기라니.

서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홀의 가운데에는 바텐더 두 명이 서 있는 바 테이블이 있었고, 그 주위로는 넓은 간격을 유지하며 유니크한 테이블과 의자가 감각적으로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자리한 사람들 중에는 TV에서 보던 연예인들도 제법 있었고, 정재계 유명 인사들, 예술가들도 눈에 띄었다.

이런 모임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서현으로서는 생경한 분위기에 조금 경직돼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어색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서현을 부르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서현 씨?”

“아, 네… 안녕하세요.”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를 보며 서현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어디서 봤더라… 누구지?’

난감해하고 있는 틈에 그가 또 말을 걸어왔다.

“태성이 찾는 거죠?”

자연스럽게 태성의 이름을 말하는 그를 보며 서현은 속으로 ‘아!’를 외쳤다.

이태성 친구구나? 서현은 이렇게 짐작하고는 그를 살폈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당연히 서현이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서현은 서로 민망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안다는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잘 지내셨죠?”

“그럼요, 태성이 위에 있어요.”

그의 시선을 따라 서현의 시선이 절로 2층으로 향했다.

그 순간, 그가 눈에 들어왔다.

5년 전에 약혼한 남자, 화명그룹의 후계자 이태성.

187cm가 넘는 키에 뛰어난 피지컬, 잘생긴 외모를 가진 그는 어디에 있든 한눈에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늘 튀었다.

“진짜 왔네… 진짜 왔어….”

5년 만에 한 공간에서 마주한 약혼자를 보는 순간 서현은 멍해지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 순간, 시선을 내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

“…….” 

마치 모두를 군림하듯 거만한 눈빛과 여유로운 표정으로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 약혼식 이후, 5년 만에 처음 그와 눈이 마주치는 거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너무 놀라서 짧은 시간 멈칫했지만, 서현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렸다.

날 알아봤을까?

그냥…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이대로 그냥 있다가 가면 돼.

장 회장은 서현이 태성과 무슨 일이 있길 바라겠지만, 서현은 그가 그냥 모르는 척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장 회장이 바라는 무슨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약혼을 한 사이라지만 5년 동안 만난 적 한 번 없었고, 지금 파혼 얘기까지 나오는 마당에 도대체 그를 만나서 뭘 하라는 건지….

결혼할 마음이 있었다면 5년 동안 연락 한 번 없었겠냐고…

서현은 그저 한숨만 나올 뿐, 두 다리와 눈을 바닥에 딱 붙인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 이 자리에 자신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왔는지 그가 알고 있을 게 뻔하다고 생각하니 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더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만날 때마다 당황스럽게 만드는 사람인데…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 어떻게 당황스럽게 할지… 그것도 겁이 났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행여나 날 알아보더라도 예전처럼 당황해서는 안 돼.’

서현은 태성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더 자연스럽게 얘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남자와의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졌고, 그를 아는 사람들까지 합세해 졸지에 친분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대화를 나누는 꼴이 되어버렸다.

서현은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 틈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은 좀처럼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대화는 분명 앞에 있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고 있는데, 서현의 신경은 온통 그 따가운 시선에 곤두서 있었다.

미소 짓고 있는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러다 설마 하는 마음에 대화하는 척 자연스럽게 시선을 주는 쪽으로 힐끔 눈빛을 흘렸는데….

그였다.

몰래 훔쳐보는 서현과 달리 너무나도 당당히 쳐다보는 태성이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날 알아본 건가? 왜? 오라는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뜻에 응할 생각은 전혀 없는 서현이었다. 

서현은 아예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없도록 그를 등진 채로 돌아섰다.

그런데 잠시 후, 어쩐지 공기의 흐름이 좀 달라지고 있음을 서현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함께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어디론가 향하자, 그들의 시선을 따라 서현도 조심스럽게 몸을 틀어 고개를 돌렸다.

2층에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태성이 보였다.

설마… 설마….

태성의 시선은 한 곳만 집요하게 향해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 그 끝에 서현이 있었다.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녀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했다.

서현은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아무나 붙잡고 눈을 마주치려 애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어느새 눈앞까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서현은 작게 숨을 삼켰다.

순간, 우디 향이 코끝에 스쳤다. 오랜만에 맡지만 분명하게 기억하는 그의 향기였다.

향기를 삼킨 심장이 요동치듯 뛰고, 서현은 저도 모르게 태성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웃어? 

그의 얼굴에서 조소가 느껴졌다.

자칫 무표정으로 보이지만, 그는 분명 살짝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옷깃만 살짝 스치고는 그냥 지나치는 그였다.

뭐야? 지금 이거?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태성이 파티장을 나가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인 약혼녀를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먹이를, 서현에게는 굴욕을 안긴 태성이었다.

순간 민망해진 서현은 태성을 티 안 나게 째려본 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는 듯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러니까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는 듯이.

‘진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또 당했다는 생각에 서현은 속이 부글거렸다.

먼저 아는 척을 안 한 것에 대한 복수인 건가?

왜?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혼자 남겨진 서현만 이 따가운 시선과 수군대는 뒷말을 감당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민망한 곳을 나가고 싶었지만, 바로 파티장을 나갔다가 그를 마주치는 것보다는 이 무언의 굴욕이 더 낫겠다 싶었다. 

잠시 후, 이쯤이면 태성이 파티장을 떠나지 않았을까 싶어 서현은 파티장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피로가 확 밀려온 서현은 높은 하이힐로 피로해진 다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마사지했다.

“아, 아파… 괜히 안 어울리는 건 입고 와서….”

신경질적으로 드레스를 털고 하이힐 신은 발을 구르자, 그 순간,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서현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태성이었다.

5년 만에 만난 약혼자.

좀 전에 제게 물 먹인 남자.

“왜? 잘 어울리는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의 시선이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었다.

당황한 서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그, 그러게요. 살아계셨네요?”

한 발자국 물러난 서현은 저도 모르게 비꼬는 말투로 그에게 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태성은 피식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갔다.

“보시다시피.”

“멀쩡하시네요?”

“불만인가?”

서현은 한 발자국 뒤로,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이어진 태성의 노골적인 시선에 서현은 괜스레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성이 계속해서 빤히 바라보자, 서현은 인상을 구겼다.

“왜 그렇게 봐요?”

“예뻐서.”

순간 서현의 눈이 커지자, 태성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왜 이렇게 놀라지?”

그의 우디 향이 훅 끼쳤다.

서현은 저도 모르게 작게 숨을 들이마셨는데, 순간적으로 호흡이 불편해졌다.

“누가 놀랐다고… 그럼 전 이만.”

분하게도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 그였다.

허둥대는 건 여전히 자신이었고.

5년 전과 다름없이.

서현은 놀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얼른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서현의 구두 소리 뒤로 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가는 건가?”

“……?”

서현은 걸음을 멈췄다.

구두 소리가 끊기고, 그의 말이 울려 퍼졌다.

“기대했는데, 시시한걸?”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아 서현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오늘 서현이 모임에 나온 이유에 대해 모르는 척할 생각,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서현은 꽉 쥔 주먹에 더 힘을 주며 참으려 했지만, 자꾸만 자극하는 그였다.

“오늘 당신이 과연 나한테 어떻게, 어떤 식으로 잘 보일지 궁금했었는데….”

“하!”

서현이 크게 헛웃음을 치자, 태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결혼, 해야 되는 거 아니었나?”

서현은 주먹을 바르르 떨며 천천히 돌아섰다. 

5년 동안 연락 한 번 없었으면서…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아닌가? 그런데 뭐? 

서현은 당당히 앞으로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나랑 결혼할 거예요?”

노려보는 서현의 눈빛은 떨렸지만, 태성의 눈빛은 그에 비해 안정적이었다.

아니 짙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 눈빛이 서현의 눈빛을 옭아맸다.

“어떻게 할까?”

서현이 살짝 미간을 구기자, 태성은 그녀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려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쳤다.

“왜? 잘 보여 봐. 그러려고 왔잖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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