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넌 나 못 떠나.
다음 날 아침, 밤새 놓아주지 않던 그에게서 여러 번의 절정을 맞이한 서현은 욱신거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리고 대충 이불로 알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찾았다.
그때, 문을 열고 태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이미 출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아직 출근 안 했어요?”
“당신 깨어나는 거 보고 출근하려고.”
태성은 성큼성큼 다가와 서현을 꼭 끌어안았다.
익숙한 그의 향기가 느껴졌다.
서현이 품에 파고들며 향기를 맡자, 태성은 두 팔에 더 힘을 줘 그녀를 세게 껴안았다.
잠시 서로 껴안고만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태성이었다.
“서현아.”
“네.”
태성은 서현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서현은 그를 살짝 밀어냈다.
“얼른 출근해요, 늦겠다.”
“그래, 다녀올게. 이따 저녁에 봐.”
씁쓸한 미소를 짓는 태성을 보며 서현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오세요.”
태성이 출근을 하고, 이윽고 서현도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준비를 끝낸 서현은 오피스텔을 나가기 전, 쪽지를 한 장 남겼다.
태성 씨…
이젠 당신이 필요 없어졌어요.
잘 지내요.
* * *
6개월 전, HM그랜드호텔 라운지.
어둠이 짙게 내린 밤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조명이 루프탑 라운지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쿵쿵쿵-
심장을 울리는 클럽 음악이 흥을 돋우는 풀파티가 한창이었다.
수영복을 입은 남녀들이 뒤엉킨… 그야말로 광란의 밤.
모두가 신난 이 와중에 이질적으로 섞이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던 서현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서현의 돌발 행동에 뒤에 서 있던 김 실장이 흠칫했다.
검정 바지 정장에, 하나로 질끈 묶은 긴 생머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을 한 김 실장은 저승사자처럼 서현을 막아섰다.
“도망칠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안 도망치니까 좀 비켜줘요.”
“……?”
“화장실요, 화장실.”
그제야 김 실장이 한쪽으로 비켜서자, 서현은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인 김 실장이 화장실로 따라 들어오려 하자 서현이 그녀를 막았다.
“화장실은 좀 편하게 갈게요.”
김 실장은 서현을 한 번 바라보고는 돌아서서 화장실 문 앞에 섰다.
혼자서 화장실로 들어간 서현은 화장실 파우더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여러 번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 이게 뭐야….”
자신의 모습을 위, 아래로 훑어보고 있자니 가슴이 너무 갑갑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하긴 지금 입고 있는 옷 자체가 숨을 편히 쉴 수 있는 옷이 전혀 아니었다.
가슴이 훅 파인 블랙드레스는 몸매를 적나라하고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 여기 온 목적에 걸맞은 아주 적절한 차림새였다.
아버지인 장 회장 말대로 이태성의 눈에 들기 딱 좋은… 아니, 이태성의 눈에 들기 위해 안달 난 차림새….
서현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결국 장 회장의 뜻대로 여기 서 있는 꼴이라니… 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건 제 탓이었다.
“아빠,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요. 안 갈래요.”
“왜 안 가? 말 들어. 너 이태성이랑 결혼 안 할 거야? 이게 다 널 위한 거니까 시키는 대로 해.”
HM 그랜드호텔 주차장에 멈춰 선 최고급 세단 안에서 장 회장과 서현은 한참 동안 입씨름을 했다.
HM 그랜드호텔, 대한민국 최고 기업인 화명그룹의 호텔.
공식적으로는 오늘 국내 30대 기업 경영후계자 모임이 열리는 곳, 비공식적으로는 태성의 귀국 환영회가 있는 곳이었다.
서현은 오늘 이 모임 참석을 끝까지 거부했지만, 아버지인 장 회장의 손에 이끌려 결국 억지로 이곳까지 오고 말았다.
입고 있는 노출 심한 드레스가 부담스러웠던 서현은 재킷을 걸치며 장 회장을 째려봤다.
“이게 절 위한 거라고요? 하… 아빠를 위한 거겠죠. 아니, 그 여자를 위한 건가?”
서현의 입에서 그 여자라는 말이 나오자, 장 회장의 인상이 구겨졌다.
“장서현, 말조심해! 새엄마한테 그 여자라니?”
“됐어요. 저 그냥 안 갈래요.”
그 말에 장 회장이 서현의 백을 빼앗았다.
“이리 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건 압수다. 오늘 이 모임에 가서 무조건 이태성한테 결혼 확답 받아 와. 그러기 전엔 호텔이든 어디든 튈 생각 말고.”
“아빠!”
노려보는 서현의 눈을 애써 외면한 장 회장의 표정은 단호했다.
“네가 태성이랑 약혼한 지도 벌써 5년째다. 5년 동안 손 놓고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외국에 가서 연락 한 번 없는 사람을 저보고 어쩌라고요?”
“그럼 태성이 귀국 날 공항에라도 나가봤어야지. 잔말 말고 얼른 가! 약혼녀가 약혼자 귀국 환영회에는 당연히 참석을 해야지. 태성이한테는 너 간다고 말해놨다.”
“아빠! 진짜….”
서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싫다면요?”
“……?”
“이태성이 저 싫다면요? 그땐 깨끗하게 포기하시는 거죠?”
“싫다면… 그땐 영지그룹의 정민혁이….”
장 회장의 말에 서현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민혁 오빠 얘기가 왜 나와요?”
“이태성이 안 되면 그놈이라도 붙잡는 수밖에. 차남이라 마음에는 안 들지만 영지그룹이라면 뭐….”
“아빠!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런 게 아닌데 이상한 소문이 돌아?”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에요. 내가 민혁 오빠 재단 소속이니까 자주 만나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이태성이 오랫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않아 파혼설은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여기에 서현이 다른 재벌 자제인 민혁과 가깝게 지내니 소문이 난 거였다.
서현이 이태성과 파혼을 하고, 정민혁이라는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장 회장 입장에서는 손해 볼 거 없는 소문이었다.
5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이태성만 믿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누가 지어낸 얘기든 아니든 상관없다. 이태성이 못 잡으면 정민혁이라는 거 알아두고 오늘 잘해. 알겠어?”
장 회장이 눈짓하자, 차에서 내린 김 실장이 서현 쪽의 차 문을 열었다.
“아가씨, 내리시죠.”
장 회장을 쏘아보던 서현이 이를 악물고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장 회장이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재킷마저 잡아채듯이 벗겨버렸다.
“이건 벗고 가.”
“아빠!”
“똑바로 해. 오늘이 마지막 기회니까! 여자 행복 별거냐. 남편 사랑받고 사는 게 최고지.”
“아, 그래요? 마치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 안면몰수하는 남편 사랑… 그거 받아서 뭐 하게요? 그거 믿을 수나 있는 거예요? 죽으라고 제사나 안 지내면 다행이겠네요.”
비꼬며 말하는 서현의 눈을 외면한 채 장 회장은 숨을 삼켰다.
“…다 널 위해서였다.”
“하… 눈물겹네요.”
차 밖으로 발을 내려놓은 서현이 고개를 숙인 채 읊조리고는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탁-
차 문이 닫히고, 서현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등 뒤로 장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실장, 따라가서 서현이 들어가는 거 확인해. 그리고 저 녀석 도망칠지 모르니까 카드며 현금, 한 푼도 주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째려보는 서현을 외면하며, 장 회장은 눈짓으로 김 실장을 재촉했다.
“아가씨, 가시죠.”
김 실장이 장 회장을 가리고 서자, 서현은 억지로 발걸음을 뗐다.
5년 만에 나타난 약혼자, 이태성이 있는 곳으로.
“하… 나 진짜 어떡해….”
막상 태성을 만나려고 하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 서현은 자꾸만 시간을 끌었다.
오늘따라 얼굴도 이상한 것 같고, 옷도 마음에 안 들고. 어쩐지 평소보다 몸도 부어 보였다.
서현은 화장실 파우더룸 거울을 보며, 가슴 부분이 훅 파인 블랙드레스를 끌어 올렸다.
노출이 신경 쓰여 끌어 올려봤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처음부터 천이 많이 부족한 옷이었으니까.
“후….”
서현은 그냥 손을 놓아버렸다.
그때였다.
밖에서 기다리던 김 실장이 화장실로 들어왔다.
“볼일 다 보셨습니까?”
“음….”
또 볼 일이 뭐가 있을까 두리번거리는 서현을 향해 김 실장이 피식 웃었다.
“예쁘니까 가시죠? 이러다 이태성 부회장님 집에 가시겠습니다.”
“언니!”
“김 실장입니다.”
알고 지낸 지가 꽤 오래돼 서현이 김 실장에게 언니라고 부를 때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석에서였다.
김 실장은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겠다는 듯 호칭을 바로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김 실장이 뼛속까지 장 회장의 편이라는 걸 잠시 잊은 서현이었다.
서현이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화장실을 나가자, 김 실장이 그 뒤를 졸졸 따라붙었다.
“김 실장님… 이제부터 저 혼자 갈게요.”
“들어가시는 것만 보고 가겠습니다.”
역시 통하지 않는 잔꾀였다.
결국 고집스럽게 입구까지 따라온 김 실장은 문을 열고 서서 서현에게 눈짓했다.
“들어가시죠. 이태성 부회장님은 2층에 계실 겁니다.”
졌다. 도망은 실패였다.
서현은 김 실장에게 짧게 눈을 흘기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