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22화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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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가 돌아가자마자 애비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집 안의 모든 불을 꺼버리고 싶은 마

음에 서둘러서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강풍이 건물을 휘감아 돌아 메마른 나뭇가지

에 부딪히며 비명을 질러 댔다. 눈보라는 밤새도록 불어닥칠 것 같았다. 요란한 바람 소리는

그녀의 불안감을 한껏 고조시켰다.

애비는 눈을 꼭 감고 자신의 인생에 데이비드가 가져다 줄 이점들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안

정감, 우정, 존경, 사랑. 그녀는 하나하나 신중하게 따져 보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안정된

미래로 연결되는 탄탄대로를 닦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두 사

람 사이에는 고상한 동지 의식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우정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존경심으

로 말하자면,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데이비드만큼 사려 깊고 신사적인 사람을 보지 못

했다. 그렇다면 사랑은?

꼬리를 물던 그녀의 생각이 뒷문을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중단되었다. 지금까지 그

녀의 집 뒷문을 두들겨 대는 손님은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마룻바닥으로 내려서기도 전에

그녀는 누구란 걸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데이비드에 대한생각을 떠올린 것도 제시 더프레

인의 생각을 밀어내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자각이 다가왔다.

한순간 애비는 그가 문을 두드리다 제풀에 지쳐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하지만 곧이어 목청껏 질러대는 제시의 목소리가 폭풍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녀

는 이웃 사람들이 듣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애비는 재빨리 가운을 찾아 입고 뒷문으로 다가갔다. 거친 마룻바닥에 맨발로 서서 그녀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는 여전히 문을 두드리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등불을 밝히고 최대한 심지를 낮추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창문을 내다보다 불빛에 비친 낯선

사내의 모습을 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애비, 문 열어요!"

그녀는 문을 조금만 열고 문가에 버티고 섰다.

그는 눈보라 속에서 머리카락과 눈썹과 수염에 눈을 하얗게 매단 채 서 있었다. 결의에 찬

검은 눈빛이 그녀를 꿰뚫을 것처럼 쏘아보았다.

"내 앞에서 사라져 달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대체 지금 몇 신 줄이나 아세요?"

"시간 따위 나는 개의치 않소."

"물론 그렇겠죠."

"안으로 들여보내 줄 거요, 말 거요? 아직은 아무도 나를 본 사람이 없지만, 당신이 또다시

내 눈앞에서 문을 닫아 버린다면 온동네가 시끄럽도록 소리를 지를 거요."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와, 그녀가 단단히 여미고 있는 가운의 자락을 들썩였다

. 그녀의 발은 얼어붙을 지경이었고, 얇은 가운 하나로는 전혀 추위를 이겨낼 수 없었으므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

갑자기 제시가 명령조로 말했다.

"나와 함께 얼어 죽지 않으려면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제시는 그녀를 밀치며 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육중한 사내의 몸집이 부엌을 가득 채웠다.

애비는 문을 닫는 그의 얼굴에 등불을 들이댔다.

"감히 이런 무례한 짓을 하다니. 여기가 당신 집인 줄 알아요? 당장 나가요!"

제시는 대꾸 대신 부르르 몸을 떨고는 손바닥을 비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밖은 엄청 춥단 말이오."

그는 애비의 말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양해도 없이 눈에 젖은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서 죽기 전에 불을 좀 피워야겠군."

그는 식탁에서 의자 하나를 빼다가 난로 앞에 세워 두고 등받이에 외투를 걸쳤다. 난로 뚜껑

을 열고 장작통에서 꺼낸 나무를 집어 넣으면서도 그는 줄곧 애비의 존재를 무시했다.

"여긴 내 집이고 당신은 조금도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이에요. 내 장작을 어서 제자리에 두

란 말이에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장작을 난로에 집어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허리를

구부려 머리에 쌓여 있던 눈을 털어 냈다. 곁눈으로 애비의 맨발을 훔쳐본 그는 그녀의 발

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테니 발에 뭐라도 신는 게 좋겠소, 귀여운 아가씨."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요. 빨리 나가라구요! 그리고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요!"

"난 가지 않소."

제시의 어조는 사무적으로 무뚝뚝했다.

그녀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고집쟁이 바보에게 무슨 얘기가 통한

단 말인가? 애비는 화를 참느라 주먹을 움켜 쥐고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의자 하나를 더 가져

다가 난롯가에 나란히 놓고 나서 허리띠에 엄지손가락을 걸쳤다.

"우린 할 얘기가 있소, 애비."

그녀가 항복하고 의자에 앉아 주기를 끈덕지게 기다리고 서있는 그의 수염에서 눈 녹은 물이

똑똑 떨어졌다. 추위에 시달린 그의 코는 아직도 빨갰고, 조금 전 털어 낸 머리는 쭈뼛쭈뼛

일어서 있었다. 투박한 부츠와 진바지, 짙은색 셔츠에 가죽 조끼를 걸친 그의 모습은 영락

없는 떠돌이 총잡이였다. 불어닥치는 눈보라 속을 헤치고 소떼를 몰고 온 소몰이거나 야간

순찰을 다니는 보안관이라고 해도 믿어지는 차림이었다. 옷차림에서부터 혈색 좋은 뺨과 붉

어진 코, 헝클어진 머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외모는 남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

녀의 시선이 그의 허리께로 내려갔다. 다행히 총은 없었다.

"날 두려워하지 말아요, 애비."

그는 애비의 시선을 따라가다 그녀의 생각을 읽어 내고 안심시키듯 말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면서도 그녀의 눈길을 놓지 않았다.

감정은 어쩌면 이렇게도 자신의 이성을 배반하는가, 그가 코를 푸는 모습까지도 매력적이라

고 생각되는 이유가 뭘까.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그의 매력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오, 하느

님, 제시 더프레인이야말로 남자 중의 남자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화가 난 애비는 그에게 화

풀이를 해대기 시작했다.

"왜 다시 온 거죠? 데이비드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몹시 화를 낼 거예요. 물론 당신은 그걸

노리고 온 것이겠지만. 나한텐 할 만큼 하지 않았나요?"

그는 손수건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조용히 말했다.

"애비, 어서 이리 와 앉아요. 밖에서 그가 나가기를 기다리느라 동태가 될 뻔했단 말이오."

그는 의자에 앉아서 두 손을 들고 난로의 불을 쪼였다.

"길거리에 서서 내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그는 난로에 좀더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당신은 잊은 모양이지만, 난 여기에 있고도 남을 충분한 권리가 있소."

"권리라구요!"

성이 난 애비가 그의 등뒤로 다가섰다.

"내 집에 쳐들어와선 내 난로에 장작을 넣고 내 의자에 앉아서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집주인으로서의 내 권리는 어떻게 된 거죠?"

그는 천천히 무릎에 기대고 있던 팔꿈치를 들어 올리며 어깨를 폈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내

쉰 뒤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아주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그녀의 반항을 참아 줄 수 없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애비의

팔을 움켜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의자가 있는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을 만큼 위압적이었다.

"앉아."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앉은 그녀는 의자 끄트머리에 간신히 엉덩이를 걸치고 금새라도 튕겨져

나갈 화살처럼 꼿꼿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야멸차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데이비드가 이 일을 알아내고, 그 때문에 그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난 당신을…… 당신을…

…."

극도로 화가 치밀어올라 그녀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제시는 긴 다리를 쭉 펴고 편하게 기대 앉아 배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그래, 당신은 그자와 행복하단 말이오?"

그녀의 굳은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그게 이곳을 떠나면서 당신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나 보군요!"

"지레짐작하지 말아요, 애비. 내가 여기를 떠날 때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소. 난 원래 그

런 상태로 떠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돌아온 거요. 당신에게서 직접 소식을 듣진

못했지만, 결혼한다는 기사를 읽었지. 그래서 혹시 임신을 한 건 아닌지 확인을 해야 했소.

"아주 대단한 분이군요. 굉장해요! 당신의 뒤늦은 관심에 감격이라도 해야겠네요."

"임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떠나던 날 아침, 당신의 그 차디찬 반응으로 봐서 말이

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지었다. 느닷없이, 제시가 멋지게 양복을 차려 입고 그녀

옆에 무릎꿇고 앉던 아침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건 당신의 자업자득이었어요."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러나 여전히 차갑게 애비가 말했다.

"아, 그랬던 것 같소."

그는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나서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심지를 낮추어 놓은 등잔불이 흔들려 난로 뒷벽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움찔움찔 춤을

추었다. 무쇠 난로의 창으로 일렁이는 불길이 들여다보였다. 날카롭게 불어 대는 바람 소리

를 들으며 두 사람은 저마다 지난날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제시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닌 게 확실하오, 제시?"

"아니라뇨? 뭐가요?"

"임신 말이오."

그를 대할 때면 언제나 마음속에 어지럽게 솟아오르는 상반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녀는

가만히 난롯불만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무례하게 굴다가 조금 부드러워진다 싶

더니 다시 시작이었다. 애비는 의자 위로 발을 들어 올리고 무릎을 안은 팔에 이마를 올려놓

았다.

"제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고개 숙인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아까 거리에서 당신은 터무니없는 얘기로 날 철저히 모욕했어요. 있지도 않은 아이의 아버

지를 만들어 내느라 내가 데이비드와 결혼한다는 식으로 말예요."

"그런 식으로 얘기한 게 아니오."

그는 황급히 애비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팔을 비틀어

피했다.

"나를 건드리지 말아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나무라듯이 읊조렸다.

"다시는 절대로."

"알겠소. 알겠다구."

그는 누가 총을 들이대기라도 한 것처럼 두 손을 들어 올렸다가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고통

스러운 표정을 보고 나서 천천히 팔을 내렸다.

"정말 왜 돌아온 거죠?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것으로는 부족해서 직접 왔나요?"

그들의 시선이 오랫동안 서로에게 고정되었다.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내가 당신을 계속 따라다녔단 말이오, 애비?"

애비가 시선을 돌렸다.

"아뇨, 당신이 생각하는 의미로는 아니에요."

그는 의자 모서리에 올려진 그녀의 맨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기지개를 켜면서

그녀의 의자 등받이에 손목을 걸었다.

"당신이 나를 따라다녔지. 아직도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우리 둘 사이의 오해를 풀기 위해

서 돌아온 거요."

그는 의자에 놓인 손가락으로 그녀의 매끄러운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가벼운 그의 손

길에도 가슴이 떨려 왔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못마땅해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비틀어 그의

손에 잡힌 머리채를 빼냈다.

"마지막 날에 우린 서로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혀 그렇지가 않소."

그날에 대한 기억이 아픔으로 다가왔지만, 난로의 열기로 추위와 함께 녹아 버렸다. 분노마

저 사그라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상처받은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그때 데이비드가 돌아올 거라는 걸 알면서 왜 내게 얘기해주지 않은 거죠?"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위층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왜 말을 듣지 않았소?"

두 사람은 서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다녔다. 애비는 다시 엇갈

린 팔 위에 이마를 대고 아무 말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제시가 의자 앞쪽으로 나앉으며 무릎

에 팔꿈치를 기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주전자 안에 커피가 남아 있소?"

그녀는 일어서서 주전자를 들어 보았다. 묵직하니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주전

자를 감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열이 있나 확인하느라 자신의 이마에 올려놓곤 하던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애비는 어두컴컴한 식기실로 사라졌다.

제시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녀는 복받쳐오는 울음을 진정시키느라 두 손으로 입술을 눌

렀다.

컵을 들고 돌아와 커피를 따르는 그녀를 제시가 눈으로 좇았다. 그는 장화를 벗고 난롯가의

철책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애비는 커피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뚫

어지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를 내려놓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난로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불길에 시선을 둔 채 침묵을 지키며 간간

이 커피를 홀짝였다. 그는 다시 철책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고, 그녀는 오두마니 의자 위에

올라앉았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 앞에 맨발로 나란히 앉아 있으려니 어느새 마음이 차분하

게 가라앉았다. 증오도 사라지고, 그들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

"멜처가 돌아와 정착하려 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요?"

계속해서 앞을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아닌가요?"

애비는 제시의 발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발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렷하게 기억하

고 있었다. 새삼 자신이 맨발이라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오. 나는

그가 다음날에 있을 회합에 참가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정

착할지는 꿈에도 몰랐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콧날

이 정갈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그의 목젖

이 솟아올랐다가 가라앉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가 뭐래도 그는 참으로 잘생긴 사

람이었다.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더 이상 내게 거짓말하지 말아요, 제시. 적어도 거짓말은 말아 줘요."

"난 절대로 당신에게 거짓말한 적이 없소.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단 말이오?"

"말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죠."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가 침묵을 지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녀를 속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멜처가 돌아온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이 철도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자

신을 돌봐 준 대가로 돈을 지불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그는 말하지 않았으므로 속

임수라면 속임수였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두 손으로 컵을 감싸고 조용히 들

여다보았다.

"제시, 당신은 내가 데이비드에게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었어요. 언제나 알고 있

었죠. 그런데 어떻게 그가 돌아온다는 말을 해주지 않을 수가 있었던 거죠?"

그녀는 마음에 상처를 받은 열일곱 살짜리 소녀처럼 보였다. 춤을 추는 불빛에 비친 그녀의

피부는 금빛이었다. 사랑스런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지만, 그는 커피잔을 감쌀 뿐이었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그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면, 그날 밤 나는 당신을 가질 수

가 없었을 거라는 얘기요?"

깜짝 놀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시의 눈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요즘 들어 그녀는 줄곧 그 생각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지만 제시, 그날 밤 당신을 찾아간 사람은 나였어요. 내가 원한 거라구요."

"아니오."

그는 어두운 부엌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그녀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따지자면 그렇지 않소. 난 당신을 무너뜨리려고 무진 애를 썼고, 마침내 성공을

한 거요. 그러니까 당신을 유혹한 사람은 나요."

그는 난롯가에서 다리를 접고 무릎에 팔을 기대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나고 나서 난……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소."

그 순간 식탁에 놓여 있던 등잔불이 흔들리다 꺼져 버렸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애비는 그

의 목덜미와 귀를 덮고 있는 숱많은 곱슬머리를 쳐다보았다.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는 어깨 너머로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난 당신이 행복하기를 원하오. 그게 그렇게도 이해하기 어렵소?"

"난 그냥, 그냥…… 내가 알고 있는 제시라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요."

제시는 한참 동안 그녀를 돌아보다가 다시 난롯불을 응시하며 커피를 마셨다.

"그럼 나한테 어울리는 게 뭐요? 열차 강도의 모습? 당신은 나를 그런 이미지로만 바라보는

게 문제요. 내가 돌아온 여러가지 이유 중엔 당신의 그런 생각을 바꾸고 싶은 마음도 있소.

전에는 어떤 여자와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당신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자꾸 신경이 쓰여요. 당신은 뭔가 달라요. 하긴 우린 시작부터 좀 남달랐지만

말이오. 우리의 시작은 너무……."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한마디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우리의 시작이 어땠는데요?"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그녀가 재촉했다.

"언제나 싸우고 괴롭히고 복수심에 불탔지. 맨처음 이 집에서 눈을 떴을 때 내가 얼마나 화

를 냈는지 당신도 알 거요. 난 당신이 이상하게 편했고, 그래서 당신에게 퍼부어 댔지. 하지

만 우리가 잠자리를 같이하던 그날 밤엔……. 그날 밤에도 내가 복수심에서 그런 행동을 했

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건 원치 않소."

애비는 수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생각은 가끔씩 불현듯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그

는 다시 어깨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제시의 진지한 시선을 마주하기가 두려웠

다.

"그렇게 생각했소, 애비? 한편으로는 멜처에게 돈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럽혀진 신부를

넘겨주고 나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느라 당신과 잠자리를 같이했다고?"

그는 빈 커피잔을 손가락에 걸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랬소?"

조용히 그가 다시 물었다.

애비는 더 이상 그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떨리는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잠긴 목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제시는 뒤로 기대 앉으며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에 올려놓았다.

양말을 신은 그의 발이 애비의 가운을 스쳤다.

"애비, 당신이 믿든 안 믿든 난 진실을 얘기하는 거요. 멜처에게 돈을 준 건 양심에 가책을

받았기 때문이오. 하지만 내가 그를 쏘았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오. 사실 그 돈은 그에게 준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준 거요. 그날 밤 일에 대해서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지. 맹세코 그

생각은 협상을 하던 중간에 문득 떠오른 것이오. 그에게 많은 돈을 준다면, 이곳에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 물론 그에게 약간의 압력을 가한 건 사실이지만. 난 당신이 그와

함께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미고 탄탄한 사업을 시작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렇게 되면 나도 당신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을 테고."

애비는 제시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커피잔으로 무릎을 두드리고 있었다.

"당신 생각대로 된 거네요?"

컵의 움직임이 멎었다. 제시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오."

그녀는 옷에서 실오라기를 주워 냈다.

"당신은 다른 여자들에게도 항상 그렇게 관대한가요?"

그녀는 두 사람을 옥죄어 오는 이상한 열기를 깨뜨리기 위해 차갑게 물었다.

그의 대답은 놀랍게도 간단했다.

"아니오."

애비는 그가 다른 여자들의 존재를 부인해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의 짧은 대답을 듣

고 그녀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잖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당신 방에 찾아갔을 때 거절하는 게 더 쉽지 않았을까요?"

제시는 갑자기 다리를 내리고 일어서서 빈잔에 커피를 채웠다. 그는 그녀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그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서 커피를 마시며 뜸을 들이다가 힘들게 말을 이었다.

"여자에게 내가 거절당해 보긴 당신이 처음이었소."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애비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당신 자신을 나무라지 말아요. 누가 누구의 방으로 먼저 갔든, 당신을 유혹한 건

나요. 당신도 그걸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당신은 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달랐소."

"당신은 모든 여자가 침대에서는 똑같다고 생각했던 모양이군요."

제시는 그녀의 턱을 잡아 거칠게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때릴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런 말이 아니오, 애비!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당신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건 단지 당신이 처녀였다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거요. 우리가 함께 지내는 동안 당신은 달

라졌지. 그리고 또 하나, 당신은 내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오."

그의 강렬한 시선을 받으며 애비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줄곧 그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나를 감쪽같이 속이고 이용한 당신을 내가 얼마나 원망했는지 알아요? 데이비드가 돌아온다

는 사실을 숨기고, 당신이 철도회사의 주인이라는 것도 숨기고, 그리고 무슨, 창녀에게나 던

져주듯 당신이 돈을 주었다는 사실도 숨겼잖아요."

"애비……."

"내 말 끝까지 들어요. 나처럼 하찮은 여자에게는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했나요?"

"그렇게 생각한 적……."

그는 한 손을 애비의 의자등받이에 올려놓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조용히 해요! 당신의 그런 행동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야 해요, 제시 더프레인. 난

내가 데이비드의 사랑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했어요. 그가 청혼을 하

더라도 결혼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죠.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난 당신이 양심의 가책

을 훌훌 털어 버리고 이곳을 떠나게 할 수 없어요. 당신도 나만큼 상처받고 괴로워해야 한다

구요. 당신이 가 버리고 나서도, 난 이 집에만 들어서면 당신과 저지른 내 부도덕한 행동을

떠올려야 했어요. 데이비드의 가게에 들어가면, 당신이 던져 준 돈을 생각해야 했구요. 당신

이 자선을 베풀 듯 던져 준 돈으로 꾸민 그 가게 어딘가에서, 당신이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단 말이에요. 모든 걸 되돌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겠죠. 그러니 난 언제까지나 당

신에게서 자유로워지긴 틀렸다구요."

"자유로워지고 싶소?"

"내가 지금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오?"

제시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네, 그래요. 아마 앞으로도 자유로워지기는 글른 것 같군요. 내가 힘든 만큼 당신에게도 상

처를 주었으면 좋겠어요. 불공평해요, 당신도 나만큼 괴로워해야 한다구요. 당신이 그날 밤

한마디만 해주었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젠 문제의 결혼 첫날밤만 남

았죠."

첫날밤에 대한 얘기를 하며 그녀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런데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덜어 보겠다구요?"

"애비, 말했잖소. 난 정말로 그가 정착할 거라는 걸……."

그러나 그의 간절한 변명을 애비는 매정하게 가로막았다.

"아직도 내가 모든 걸 잃어버릴 위험은 남아 있어요. 당신도그 정도는 알고 있겠죠? 지금 내

앞엔, 내가 언제나 그려 오던 행복한 미래가 현실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어요. 나로 인해

해가 뜨고 진다고 믿는 남편과, 평생 동안 평탄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업이 말이에요.

그녀는 제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와 훨씬 더 가깝게 앞으로 당겨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마을 사람들에게서도 진정한 그들의 일원으로서 환영을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데이비드를 알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했던 일이죠. 그의 아내로서 난 그 사람들 틈으로 스며

들 수 있게 된 거예요. 그 전엔 그저 윗마을에 혼자 사는 고상한 노처녀에 불과했었거든요."

침묵이 흘렀다. 바람 소리와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고개를 숙이고 가만

히 앉아 있는 애비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시는 문득 자신이 그녀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있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비참한 기분으로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주면 좋겠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소?"

그의 손가락이 다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저항을 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미안하오, 애비."

그녀는 눈길을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고, 장난기나 웃음기라고

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신 때문에 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제시. 미안하다는 말로는 충분치 않아요. 데이

비드가 나 때문에 스튜어트 정크션에 정착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요

? 그는 나를 아주 고상한 여자로 생각하고 존경했지만, 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

었어요. 그는 왜 내가 당신과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절대로,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나 자신의 그 가증스러운 속임수로 인해 내 마음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 알

기나 해요?"

제시는 그녀의 고통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표정에 어린 참담한 아픔을 볼 수

있었고, 자신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첫날밤에 그가 의심을 하면 뭐라고 말할 생각이오?"

그녀는 다시 난롯불을 바라보았다.

"리처드가 있잖아요."

"그에게 리처드 얘기를 했단 말이오?"

"당신에게 말한 것처럼 전부는 아니지만, 할 만큼은 했어요."

"당신 말을 믿을까?"

애비는 씁쓸하게 웃음지었다.

"그는 당신 같지 않아요, 제시. 데이비드는 당신처럼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이 여자 저 여자

를 마구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되풀이해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어조로 애비의 귀에 속삭

였다.

"이곳을 떠난 뒤로는 한 번도 다른 여자를 만난 적이 없소."

묘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야무지게 말했

다.

"난 데이비드와 결혼할 거예요. 그는 나와 잘 어울려요."

"한때는 나도 그랬잖소."

"그런 식하고는 달라요."

"물론 사람마다 약간씩은 차이가 있겠지, 하지만 우린 언제나 얘기를 나누고 함께 웃고…….

"싸웠죠."

애비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래, 싸웠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띠며 그가 선선히 인정했다.

"당신이 떠나고 난 후에도 난 계속해서 당신과 싸웠어요. 신문에 난 기사를 통해 모든 사실

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죠."

제시가 싱긋 웃었다.

"당신은 언제나 화를 잘 내는 편이었지."

"내 몸에서 빨리 손을 치워요, 더프레인 씨. 안 그러면 또 다시 화를 낼 거예요."

"내 이름은 제시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팔을 치웠다.

"그걸 어떻게 믿겠어요. 다음 번엔 엉덩이에 총을 맞은 열차강도라고 하겠죠?"

그는 껄껄 웃으며 애비의 뒷목을 지그시 누르고 나서 그녀의 귓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당신이 발끈하는 걸 좀 볼까? 옛날처럼 말이오."

제시는 다시 그녀의 머리채를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당신이 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 주기만 한다면, 난 아무런 문제 없이 데이비드 멜처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거두고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머리를 기댔다.

"내가 가 버리고 나서 당신은 정말로 텅 빈 방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소?"

"그렇게 의기양양해하지 말아요. 그럴 때마다 난 당신을 증오했으니까."

제시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한 번도 나를 미워한 적이 없소."

"있어요."

"지금도 나를 미워하오?"

그녀는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펴서 그가 발을 걸치고 있는 난롯가 철책에 나란히 발을 올려

놓았다.

"지금도 나를 미워하는지 어서 말해 봐요."

그는 애비의 발 위에 자신의 발을 포갰다.

"당신이 그 발을 치우고 곧 여기를 떠나 준다고 약속하면 얘기하겠어요."

그는 아예 자신의 발로 그녀의 발을 감싸고 유혹하듯 문지르기 시작했다.

"어디 쫓아내 봐요."

그의 얼굴엔 예전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되살아나 있었다. 자신의 말을 그가 믿어 준다면,

그녀는 이제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느긋한 자세로 그와

나란히 앉아서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

"당신은 아직도 물리적인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난 힘으로 당신을 가게 만들 수

는 없어요.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오래 전에 했던 얘기를 되풀이할 수는 있

어요. 데이비드 멜처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내면의 강인함을 지닌 남자예요. 난 그런 그를

존경하고, 그래서 그와 결혼하려는 거예요."

제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애비를 쳐다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터

질 듯이 빨라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고수했다.

"당신 말이 진심이라는 거 나도 알고 있소."

"맞아요."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손길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잡힌 손

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는 당신에게 잘해 주겠지?"

갑자기 애비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언제나

제시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댈 때면, 그녀는 유혹을 물리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물론이에요. 무슨 일이건 잘해 주죠."

상처받은 사람의 울부짖음처럼 바람 소리가 처절했다.

"그렇다면 그가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오?"

눈송이가 비밀스럽게 집을 덮고 있었다.

"말해 봐요, 애비."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아니, 전혀 다르오."

"그렇다면, 문제는 내가 그에게 어울리는가, 하는 거네요."

"그건 두말하면 잔소리요."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을 내려다보며 애비가 말했다.

"나한테 친절하게 굴지 말아요. 당신이 친절하게 굴고 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

어요."

그녀의 말이 다정한 분위기를 깨뜨려 버렸고, 그는 가볍게 웃으면서 손을 놓았다.

"당신 계획을 얘기해 봐요. 정말로 듣고 싶소."

결혼을 이틀 앞둔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결혼 계획에 대해서 의논할 친구가 한 명도 없었

다. 제시는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묘하게도 그녀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편안

한 기분을 느꼈다. 어느새 그녀는 제시에게 모든 얘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결혼식 준비와 피

로연에 대한 것들, 그리고 데이비드와 함께 가게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에 관해서

그녀는 빠뜨리지 않고 자세히 설명했다. 신혼 여행으로 콜로라도 온천에 갈 계획이라는 것

도 알려 주었다.

그는 귀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놀렸다.

"물론 신혼 여행 비용도 내가 대는 거겠지?"

그러나 곧 그는 진지한 얼굴로 가게가 정말로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게 곳곳

에 그녀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애비는, 내일 사진 촬영이 있는데 오늘에야 어머니가 쓰셨던 머리 장식이 도착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마음을 졸였다는 것도 얘기했다. 그는 그녀가 고용한 사진사의 이름을 물었다. 그

녀는 데이먼 스미스라는 사진사를 아는지 제시에게 되물었다. 그는 스미스가 뛰어난 솜씨를

가진 사람이라고 얘기해 주었고, 그녀는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애비는 제시에게 정말

로 사진사냐고 되물어 그를 미소짓게 했다.

"당신은 아직도 나를 믿지 않는군."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제시와 애비는 아늑하고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나른함을 느꼈다. 대화는 부드럽게 진행되었

고, 더 이상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제시를 훑어보며 사진사라기보다는 범법자에

가까운 차림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한 자신이 더 보기 좋으냐고 물었

고, 애비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 남루한 옷차림이 그에게는 더 잘 어울렸다. 나란히 앉

아서 난로의 불길을 바라보며, 그는 가끔씩 나른한 미소를 던졌다. 자연스럽고 아늑한 분위

기 속에서 두 사람은 휘몰아치는 폭풍도, 깊어가는 시간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터널을 뚫고 레일을 까는 작업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는 자금만 엄청나게 투

입했을 뿐 수입이 없어서 고전했지만, 언젠가부터 겨우 돈이 벌리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했다

. 그녀가 콜로라도 온천에 가면 많은 철도 회사 사장들이 그곳에 지어 놓은 호화스러운 별장

을 보게 될 거라고도 했다.

"당신의 별장도 있나요?"

"없소."

그는 슬며시 웃었다. 자신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회사도 그리 크지 않다고 말하

면서 더 이상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그는 다시 생기가 돌았고,

회사에 대해 얘기할 때보다 더 길게 많은 얘기를 늘어놓았다.

긴 대화를 마친 그는 이제 거의 졸음에 취해 있었다.

"이제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소?"

"그런 것 같아요."

바깥에서 들려오는 폭풍의 아우성이 고요한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이윽고 애비가 입을 열었다.

"많이 늦었어요. 당신이 지금 가 주지 않으면 내일 신부 사진에서 난 아주 엉망으로 나올 거

예요."

그는 기지개를 켜며 킬킬거렸다.

"내가 당신을 처음 보던 날처럼 말이오? 당신은 정말로 엉망이었소, 애비."

"말조심하세요."

그러나 이미 나른해진 두 사람에겐 더 이상 말다툼을 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둘은 서

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렇지만 그런 당신이 난 좋았소."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항상 기지가 넘치고 쾌활한 제시로 살아갈 것이다. 하

지만 그는 그녀를 위한 사람이 아니었다.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소."

그는 온몸을 비틀면서 하품을 했다.

그녀도 피곤하고 몸이 뻐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래요. 그런데, 제시?"

"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겠어요? 아니면, 데이비드에게 뭔가 변명거리를 만

들어야 할까요?"

"이 시간에 깨어 있을 멍청이는 없소.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갈 테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 줄 거죠?"

"알겠소, 애비."

그는 또다시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익숙한 몸짓으로 온몸의 근육을 하나하나 풀었다. 수백 번도 더 보아 온 낯익은 모습이

었다.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는 상체를 구부리고 부츠를 신기 시작했다. 그를 도와 부츠를 신기던 때가 떠올랐다. 그는

셔츠 자락을 바지 속으로 밀어넣으며 일어섰고, 그녀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그는 허리띠에 엄지손가락을 걸치고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결혼식엔 초대해 주지 않겠지?"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정말 구제 불능이에요, 더프레인 씨."

제시는 계속해서 그녀를 쳐다보며 외투를 걸쳤다. 애비는 팔짱을 끼고 서서 그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외투의 단추를 채울 생각도, 문 쪽으로 걸어갈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럼."

그가 뜻도 없는 인사말을 건네자, 애비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나서 바보처럼 그

의 말을 따라했다.

"그럼."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다. 둘 다 웃고 있지 않았다.

"신부에게 작별 키스를 해도 되겠소?"

쉰 듯한 그의 목소리에선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안 돼요!"

그녀는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다가 뒤쪽에 놓인 의자에 부딪히고 말았다. 제시는 의자 위로

쓰러지려는 애비를 잡아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열려진 외투 사이로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

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안았다.

'애비, 내 귀여운 벌새.'

벌새의 가냘픈 심장처럼 빠르게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그녀에겐 멀게만 느껴졌다.

제시의 몸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은 데이비드에게 안겼을 때와 느낌이 너무도 달랐다. 제시의

외투가 데이비드의 것보다 더 두툼했는데도, 그녀는 힘차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을 느낄 수

가 있었다.

"행복해야 해요, 애비."

그는 애비의 머리 위에서 속삭이고 나서 매끄러운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애비는 그의 외투에 뺨을 대고 눈을 꼭 감았다.

"그럴게요."

그녀는 거친 가죽 외투를 통해 그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내려와 목덜미에서 멎었다. 순간, 제시는 으스러지도록 세게 그녀를 껴안

았다.

그리고 나서 뒤로 물러선 그는 애비의 양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댔다. 그녀의 엄지손

가락이 그의 검은 수염에 닿았다. 그의 눈이 감겨지더니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눈

을 뜬 그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녕, 애비."

애비는 그의 거무스레하고 따뜻한 얼굴을 좀더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다시

한 번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손을 아플 정도로 세게 잡고 있을 뿐이었다. 목구

멍으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것을 삼키며 그녀가 간신히 말했다.

"안녕, 제시."

그는 뒤로 한 발자욱 물러나 천천히 단추를 채우고 외투깃을 귀까지 올렸다. 그러면서도 그

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돌아섰다. 문이 열리고 눈보라가 그녀의 발에까지 휘몰아쳤다.

문이 닫히고 난 뒤, 적막 속에서 그녀는 허공을 향해 다시 한번 속삭였다.

"안녕,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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