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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한 저녁 식사 생각에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싸늘한 날씨의 초저녁이었다
.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음산한 구름이 바람을 따라 산등성이 위에서 흩어졌다 모
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자연의 웅장한 변화 앞에서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이 참으
로 하찮게 느껴졌다.
종과 진주 화관이 덴버에서 도착했다. 본스 빈레이는 마지막 기차가 내려놓고 간 꾸러미를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기쁜 마음에 애비게일은 새로 장만한 초록색 코트를 입고, 머리에
스카프를 둘렀다. 하얀 모피 머프를 낀 그녀는 황동으로 만든 작은 종을 손에 들고 미소를
지으며 집을 나섰다.
눈발이 그녀의 이마에 부딪히고, 세찬바람이 스카프 자락을 휘날렸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데이비드는 벌써 등불을 밝혀두었을 것이다. 그녀는, 따뜻한 가게 안에서 데이비드가 커피잔
을 손에 들고 난로 철책에 한 발을 올려놓은 채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가게 문에 매
달 종을 선물하면 그는 몹시 기뻐할 것이다. 그녀는 조급한 마음에 걸음을 서둘렀다.
살롱이 있는 길 모퉁이를 돌아 보도 위에 올라서자, 눈보라가 날카롭게 그녀의 얼굴로 날아
들었다. 그녀는 가게의 케이프 코드식 진열창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주황색 불빛을 바라보
았다. 무거운 양가죽 외투를 입은 건장한 사내 하나가 깃을 올리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자도 쓰지 않은 그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사내는 자신의 장화를 물끄러미 내려
다보다가 잠시 후 옆에 있는 마차 보관소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키가 무척이나 컸고, 몸집도
좋았다. 그 남자의 뒷모습은 제시를 떠올리게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리를 절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빨리 했다. 머리 위에서 새로 매단 간판이 바람에 마구 흔
들렸다.
간판에는 큰 글씨로 '멜처 구두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조금 작은 글씨로 '
데이비드와 애비게일 멜처'라고 씌어 있었다.
가게 안은 알맞게 따뜻했다. 평상시처럼 난롯가에는 남자들이 둘러 서 있었고, 데이비드는
그들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애비를 보자마자 그는 사람들 틈에서 걸어나왔다.
"안녕, 애비게일. 집에 있을 걸 그랬소. 날씨가 고약해지는 걸."
그녀는 난롯가로 다가가 코트와 스카프와 머프를 벗어서 차례로 의자에 올려놓았다.
"당신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주려고 온 거예요. 드디어 머리장식이 덴버에서 도착했어요."
"잘 됐군!"
데이비드는 난로 주변에 서 있는 사내들에게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젠 사진 촬영에 맞춰서 못 올까봐 안달해 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겠군."
남자들이 껄껄거리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리고 또 뭐가 왔는지 보세요."
그녀는 청동 종을 꺼내서 가볍게 흔들었다.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도록 가게 문에 매달 거예요. 새 가게에는 첫 손님을 맞이하는
종을 달아야 하거든요."
데이비드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랑스럽
다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았다.
"좋은 생각이오. 고맙소, 애비게일."
그의 미소 띤 얼굴이 그녀의 마음을 더할나위없이 흡족하게 했다.
"자, 이리 줘요. 내가 달지."
"오, 안 돼요."
애비는 종을 뒤로 감췄다.
"내가 드리는 선물인 걸요. 꼭 내가 달아야 한다구요."
데이비드는 웃으며 남자들에게 돌아섰다.
"이렇게 자기 주장이 세고 골치 아픈 여성은 보다보다 처음이라니까."
"저런, 데이비드,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엉덩이라도 한 방 차주라구."
남자들이 스스럼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그런 식으로 애비게일을 놀려대는 것도 가능
했다. 데이비드 멜처가 온 이후로 그녀는 너무나 많이 변한 것이다.
애비는 뒷방에서 망치와 못을 찾아 가지고 나와 문 앞에 놓인 의자에 올라갔다. 문이 너무
높아서 의자를 놓고서도 그녀의 손이 닿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높은 나무 기둥을 밟고
올라섰다.
제시 더프레인이 애비게일의 모습을 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마차 보관소에서 나
와 데이비드와 애비게일 멜처라고 씌어 있는 간판을 올려다보며 가게 앞에 섰다.
그녀는 못 두 개를 입술에 물고 종과 망치를 들어 올리다가 쇼윈도 밖에 서 있는 사내의 다
리를 보았다.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채 넓게 벌리고 선 다리, 그리고 낡은 양가죽 외투의 아
랫부분이 보였다. 알 수 없는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여 팔 아래로
건장한 사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입에 물고 있던 못 하나가 떨어졌다. 고통스럽고 끔찍한 공포감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
갔다.
제시! 하느님 맙소사, 안 돼.
두툼한 외투깃을 올려 턱까지 감싼 제시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에 숱 많은 머리
칼이 흩날렸다. 쇼윈도에서 비치는 불빛에 무표정하고 눈빛만 형형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이마와 뺨과 턱이 등뒤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대조적으로 불빛을 받아 따뜻하게 빛
났다. 손에 망치를 든 것도 잊고 망연자실 서 있는 애비를 바라보며, 그는 새카만 콧수염을
약간 움직여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한 손을 빼내 소리
없는 인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듯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못 박힌 듯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뒤쪽에서 누군가 뭐라고 말을 거는 바람에 그녀는 정신이 들어 난롯가 쪽을 돌아보았다. 그
리고 다시 밖을 내다보았을 때, 제시는 어느새 그림자 속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렇지만 애비
는 여전히 그의 장화를 볼 수 있었고, 그가 칠흑 같은 검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못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하나뿐인 못을 박으
면서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 신경이 쓰였다. 팔을 들어 올리느라 웃옷
이 꽉 조여져 유난히 가슴이 두드러졌고, 망치질을 할 때마다 흔들거렸다.
잃어버린 못 하나가 진열대 안쪽에서 반짝였다. 바닥으로 내려서서 못을 주우면서도 그녀는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날려 버릴 듯이 불어
대는 눈보라 속에 서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애비게일은 붉은 커튼 뒤로 잠시 몸을 숨겼다.
제시, 어서 가요.
그녀는 속으로 애원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흡인력이 두려워 그를 마주 대할 자신이
없었다.
조금 뒤 기력을 되찾은 애비는 난간에 다시 올라가 두 번째 못을 박았다. 망치 소리에 맞추
어 그녀의 심장이 큰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솜씨를 칭찬하며 데이비드가 다가왔다.
"함께 종을 다는 게 어떻겠소?"
"네, 그렇게 해요. 그러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행운이 올 거예요."
갑자기 목이 메어 왔다. 그녀는 데이비드가 자신의 목소리에서 수상한 떨림을 알아채지 못하
기를 바랐다. 제시의 다리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데이비드도 그를 본 것은 아닐까.
종을 매다는 작업이 끝나자 데이비드는 애비의 코트를 가져와 입혀 주었다.
"날씨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당신은 돌아가는 게 좋겠소."
"저녁 드시러 올 거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자제하며 그녀가 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는 그녀의 목에 스카프를 단단히 둘러 주고 나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문 쪽으로 돌려세웠
다. 그리고 문을 열어 주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종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그녀는 밖으로 한 걸음 나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일찍 오세요, 데이비드."
"그러리다."
애비는 고개를 숙이고 스카프를 좀더 조였다. 하지만 사나운 바람에 휘날린 스카프 자락이
얼굴에 부딪혔다. 그녀는 어두운 거리를 주욱 훑어보았다.
그는 가고 없었다.
가늘어진 눈발이 얼어붙은 거리를 더욱더 미끄럽게 만들었다. 마차 바퀴 자국도 모두 눈에
뒤덮여 그녀는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바람은 그녀의 등뒤에서 불어와 보
도 위에서 소용돌이쳤다. 치맛자락이 팽팽하게 부푼 돛처럼 바람을 잔뜩 머금었다. 그녀는
불이 켜진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매번 안을 기웃거렸지만, 제시는 아무데도 없었다. 살롱이
있는 모퉁이를 돌자 소용돌이 바람이 그녀의 치마를 휘감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스카프
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외투 깃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안녕, 애비."
그녀는 발밑에 숨겨져 있던 함정의 문이 덜컥 열리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별생각없이 모퉁이를 돌다가 어둠 속에 서 있던 그
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미칠 듯이 불어 대는 소용돌이 바람이 그의 하얀 입김을 멀리 날려 보냈다.
"제시, 당신인 줄 알았어요."
그녀는 앞을 가로막고 선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랬군."
그의 등뒤에서 불어온 눈보라가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새삼 그의 큰 키가 낯설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려니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냉랭하게 묻는 그녀의 치아가 추위로 딱딱 부딪쳤다.
"마을에 곧 결혼식이 있을 거라더군."
그는 꽃이 만발한 여름 정원에라도 서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갑자기 그는 주머니에
서 손을 빼고 애비의 팔을 잡더니 그녀가 바람을 등지고 서도록 방향을 바꾸었다. 눈보라는
이제 그의 얼굴을 향해 맹렬하게 달겨들었다. 그는 건물 벽 쪽으로 그녀를 잡아당기고 나서
더 가까이 다가섰다.
"내가 결혼하는 걸 어떻게 알았죠?"
"이곳을 떠나기 전에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소. 그래서 줄곧 신문을 유심히 보았었지."
"그런데 우리가 평화롭게 살게 내버려 둘 일이지 여기엔 왜 나타난 거예요?"
제시의 심각한 얼굴이 초저녁에 떠다니던 먹구름처럼 불길하게 보였다. 짙은 눈썹을 찡그리
며 그는 애비의 질문을 무시하고 되물었다.
"당신 임신했소?"
투박한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발로 얻어맞은 것보다 더 큰 충격이 그녀를 비틀거리게 했다.
"이 파렴치한……."
강풍에 날린 스카프 자락이 그녀의 입술에 부딪히는 바람에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임신했냐니까!"
제시는 거대한 장벽처럼 앞에 버티고 서서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기가 막힌 애비는 그를 피
해 지나가려고 발을 떼었다. 그러나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그는 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이제 살롱의 벽과 그의 거대한 몸집 사이에 갇히다시피 서 있었다.
"지나가게 해줘요."
애비는 그를 올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 대답을 듣고 나면 물론 비켜 줄 거야! 난 당신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다구."
"당신에겐 어떤 자격도 없어요. 절대로!"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제기랄, 애비, 난 당신 두 사람이 평생 동안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돈을 댄 사람
이라구. 그 대신에 원하는 거라곤, 그 아기가 내 자식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뿐이란 말야
."
분노가 끓어올랐다. 남몰래 마을에 숨어든 이유가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확인하려는 것이
었다니. 제시는 지금 그녀가 자신과 저지른 실수를 무마하느라 데이비드와 관계를 가졌을 거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제시가 너무도 증오스러웠다. 머프를 끼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녀는 손을 휘둘러 댔다. 그러나 흰토끼 털로 만든 머프는 그에게 조금도
충격을 주지 못하고 단지 그의 옆얼굴을 스쳤을 뿐이었다. 분노에 찬 그녀의 몸짓이 오히려
안쓰럽게 느껴졌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 있었으므로 그는 아무런 방어동작도 할 수가 없었다. 뺨을 스
치는 머프를 흘긋 바라보며 어깨를 움찔 했을 따름이었다. 머프는 그를 지나 얼어붙은 거리
로 굴러 떨어졌다.
"내 말 들어요! 난 진실을 알기 위해 돌아왔소. 만일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면, 그 아인
내가 데려가겠소!"
애비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다 머프를 집으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제시는 그녀를 벽에 밀치며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릎을 구부려 머프를 집어 들었
다. 그가 머프를 건네자 애비는 받을 생각도 않고 울분을 터뜨렸다.
"이 야비한 짐승!"
눈물 줄기가 얼어붙은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눈보라 속에 세워 놓고, 또다시 나를 모욕하려는 생각이라면 큰 오산이에요!"
"당신은 예, 아니오,라고만 대담하면 돼. 아이를 가졌느냐말이야, 젠장!"
그는 그녀의 팔을 움켜 쥐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단단한 손아귀는 그녀의 코트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런가?"
제시는 그녀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애비는 그의 얼굴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에게서 달아나려고 발걸음을 옮겼지만,
미끄러운 얼음을 디디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그의 몸에 부딪히며 넘어지고 말았다. 반사적
으로 제시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의 다른 한 손에는 여전히 하얀색 머프가 들려 있었다.
"애비, 미안하오."
그러나 그녀는 제시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분노의 눈물을 삼켰다.
"제기랄, 여기선 계속 얘기를 나눌 수가 없겠군."
교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밀쳐 냈다.
"어디서건 우린 서로 나눌 얘기 같은 거 없어요!"
아직도 바닥에 넘어진 채로 애비는 그를 쏘아보며 화를 폭발시켰다.
"우린 절대로 대화라곤 하지 못했죠! 언제나 싸움뿐이었어요. 또다시 싸움을 걸기 위해서 이
렇게 돌아왔군요. 웬일이신가요, 더프레인 씨? 강제로 가지고 싶은 또 다른 여자를 아직 찾
지 못했나 보죠?"
그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그녀의 곁에 앉아서 성난 애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목소리
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다른 여자를 찾은 적 없소."
오, 하느님, 저를 좀 도와 주세요.
애비는 일어서려고 애를 쓰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 줄 유일한
무기라도 되는 듯 분노의 감정을 추스렸다. 제시는 그녀의 팔을 잡아 일어서는 것을 도와 주
고나서 머프를 내밀었다. 그녀는 빼앗다시피 그의 손에서 머프를 낚아챘다. 매몰차게 돌아서
서 걸어가는 그녀의 마음이 갈갈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제시는 단호하게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소리를 질렀다.
"애비, 행복한 거요?"
제발, 제발 묻지 말아요! 애비는 그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람을 가
르며 뒤돌아서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날 내버려 둬요. 석달 동안이나 빈집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는데,
드디어 당신에게 직접 얘기할 수 있게 되었네요.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져 줘요, 제시 더프
레인!"
그리고 나서 그녀는 집을 향해 미끄러운 거리를 힘껏 달려갔다.
의사의 집을 돌아 애비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제시는 텅 빈 거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는
발에 붙은 눈을 탁탁 털고 나서 모퉁이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 한잔을 주문한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는 마음을 정했다.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꼭 대답을 듣고 말리라!
하얀 담장을 따라 피어 있던 장미는 간곳이 없었고, 덜렁 남아 있는 나무 울타리가 겨울바람
속에서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진입로를 걸어들어가며 그는 현관을 살폈다. 등가구는 어디
론가 치워지고 보이지 않았다. 외롭게 매달려 있는 그네는 유령이 앉았다 일어난 것처럼 바
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현관문의 길다란 원형 창으로 허리를 구부린 애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 스토브에 장작을 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코트 깃을 세우며 문을 두드리고 나서, 그는 길다란 복도를 달려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자 그는 그림자 속으로 물러섰다.
"저녁 식사 준비가 아직 덜 되었는데 어쩌죠, 데이비드?"
그러나 불빛 속으로 한 걸음 내디딘 제시의 모습을 보자 문을 열면서부터 재잘대던 그녀의
말이 끊겼다. 그녀는 문을 세차게 닫았지만, 어느새 제시의 손과 발이 문틈에 끼워져 있었다
"애비, 잠깐이면 되니까 얘기를 좀 할 수 있겠소?"
"내 집에서 쌕 꺼져요! 내 말을 듣고 있나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예요."
그녀는 그의 뒤편을 살폈지만 앞마당과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정말 잠깐이면 되오. 옛친구에게 신부의 행복을 빌 수 있는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소?"
"데이비드가 오기 전에 어서 가세요. 저녁을 먹으러 곧 올 거예요."
"그럼 신랑에게도 축하 인사를 하면 되겠군."
"데이비드와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딱 한 가지, 우리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 주는 것뿐
이에요."
차가운 바람이 집 안으로 휘몰아쳐 들어와 등잔불이 깜박거렸다. 제시는 문을 잡고 있는 손
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좋소. 지금은 물러가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요, 애비게일 양. 난 아직 당신에게 빚진 게
있소. 사진 한 장과 빌린 돈 23달러 말이오."
그녀가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 했지만, 제시는 그전에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갔다.
이제 그는 조금도 다리를 절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도착했을 때 애비게일은 여느 때보다 훨씬 다정하게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오, 데이비드, 당신과 함께 있으니 너무 좋아요."
"결혼식이 3일밖에 남지 않은 예비 신랑이 달리 갈곳이 어디 있겠소?"
애비는 그의 팔을 한 번 더 세게 잡았다. 놓았다. 그리고 그가 코트 벗는 것을 거들어 주었
다.
"데이비드, 당신은 내게 과분해요."
데이비드의 코트를 팔에 걸치고 서서 그녀는 자신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아니, 애비게일, 무슨 일이지?"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발견한 그는 애비를 감싸 안았다.
"아, 모르겠어요. 계획대로 모든 게 다 준비되고 나니까 마음이 놓이나봐요. 사진 촬영에 맞
춰서 머리 장식이 도착하지 못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눈보라가 몰아치
고 있으니 사진사가 덴버에서 출발하지 못했으면 어쩌죠?"
그녀는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내고 그에게서 몸을 빼내며 마룻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대부분의 신부들이 한 번쯤 겪게 되는 일일 거예요. 마지막순간에 찾아드는 불안감 같은 거
겠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럴 거요. 가게 개점이며, 피로연, 당신 웨딩드레스, 신혼 여행까지 일
일이 신경을 써야 했으니 말이오. 하지만 다 필요한 일이었고, 당신은 아주 훌륭하게 해냈소
."
"알아요. 하지만 평생에 단 한 번 있는 결혼식이잖아요. 여자들은 모든 게 빈틈없이 완벽하
기를 바라죠."
그녀는 주절주절 애처로운 변명을 늘어놓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부엌으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어머니나 언니, 하다못해 친척아주머니라도 있어서 짐을 덜어
주잖소.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일을 혼자서 해냈소. 너무 과로하지 말아요, 애비게일. 난
토요일 우리 결혼식 날 당신이 아주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이길 바라요."
그의 따스한 염려는 어느 정도 그녀의 참담한 기분을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근처 어디에선가
제시 더프레인이 밤을 보내고 있고, 토요일이 오기 전에 언제고 데이비드와 마주치게 될 거
라는 사실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예전과 같은 적대감으로 두 사람이 부딪친다면 무슨 일
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결과는 아무래도 유쾌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최악
의 경우에는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제시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저녁 내내 애비는 한 가지 의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과 있었던 일을 데이비드에게
얘기할 정도로 제시가 비겁한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만일의 사태를 위해 데이비드에게 리처드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데이
비드는 기분좋게 소파에 기대앉아서 다리를 쭉 뻗어 발을 포개고 있었다.
"데이비드."
"음, 애비게일?"
그는 절대로 제시처럼 그녀의 이름을 줄여서 애칭으로 부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사실이 언제나 그녀를 실망시켰다.
"전에 약혼한 적이 있었다는 얘기를 제가 했던가요?"
그 얘기는 절대로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애비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관심을 나타냈다.
"아주 오래 전 얘기예요. 제가 스무 살 때였죠."
그녀는 그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수백 가지도 넘는 질문을 담
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계속 얘기할 수 있도록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사람 이름은 리처드였어요. 이 마을에서 함께 자랐죠. 우린,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뛰
어놀았어요. 이곳 사람들은 추억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편인데, 당신에게 아무도 그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았다는 게 놀랍군요."
"아무도 그런 얘길 해주지 않았소."
그의 목 언저리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당신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데이비드. 우린 서로의 과거에 대
해서는 거의 얘기를 나눈 적이 없잖아요. 우리의 미래나 가게에 대한 계획 같은 것들에 공통
된 부분이 너무 많아서 다른 얘기는 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럴 거요. 당신 말이 옳소. 하지만 리처드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얘기하
지 않아도 괜찮아요. 난 상관없어요, 애비게일."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뇨, 난 말하고 싶어요. 그러면 당신도 내가 왜 이렇게 예민해져 있는지 좀더 이해해 줄
수 있을 거구요."
애비게일은 다시 무릎으로 시선을 떨구고 얘기를 계속했다.
"주변에 리처드 말고는 아무도 없었고, 자라면서 언젠가는 둘이 결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요. 열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리처드와 나
는 약혼을 했어요. 그때 난 무척 어렸고, 순진해서 모든 것들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죠."
그녀는 말을 멈추고, 그 이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생각을 했다. 한숨을 쉬고 나서 그녀
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리처드는 저와 생각이 달랐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도 되지 않아 아
버지마저 병져 누우시게 되니까, 리처드는 제가 결혼 상대자로서 탐탁지 않게 된 거죠. 그
사람은 병든 제 아버지를 무척이나 짐스럽게 생각한 것 같아요. 하여간 제 약혼자는 결혼식
을 1주일 앞두고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그의 가족들도 곧 뒤따라서 이사를 갔구요. 그
뒤로는 그 사람도, 그의 가족들도 본 적이 없어요."
데이비드의 얼굴엔 안쓰러워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손을 뻗어서 애비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그런 일을 겪다니 유감이오, 애비게일. 진심이오."
그녀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 그의 부드러운 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애비게일은 그
가 참으로 순수하고 마음이 선한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로서는, 이렇게 늦게나마 그
처럼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
데이비드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젠 당신의 그 불안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하지만 난 절대로 그 사람처럼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당신도 그걸 잘 알 거요."
"네, 알아요."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은연중에 암시한, 리처드와의 불미스러운 일의 가능성에 대해서 조금
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의 착한 심성에 또다시 죄책감을 느꼈다.
"데이비드, 난 우리가 함께 시작하는 인생이 완벽하기를 원해요. 그래서 이 얘기를 한 거구
요."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우리의 인생은 완벽할 거요."
그는 다정하게 그녀의 말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다정함은 손을 맞잡는 정도에 지나
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얘기를 나눌 때 서로를 포근하게 안아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당신이 내게 모든 걸 얘기해 주어서 정말 기뻐요, 애비게일. 오늘 밤 당신은 왠지 화가 난
것 같아서 걱정했었소. 이제 그 얘기는 그만 잊어버려요."
그제서야 데이비드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애비게일은 전혀 그녀답지 않게 열정적인 몸짓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입술을 떼며 말했다.
"이제 가 보는 게 좋겠소, 애비게일 "
그러나 그녀는 데이비드가 좀더 머물러 주기를 바라면서 더욱더 그에게 매달렸다. 제시 더프
레인 때문에 느끼는 위협을 잊기 위해 그가 필요했다.
"이렇게 빨리 가야 하나요?"
그는 애비를 떼어놓았다.
"그래야 당신이 푹 잘 수 있잖소. 약속대로 내일 저녁에 봅시다."
그는 집을 나서기 전에 현관에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가 코트를
챙겨 입은 뒤였기 때문에 포옹의 따스한 감촉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