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16화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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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애비는 자신이 너무 무리를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33년간이나

쓰지 않은 근육들이 어젯밤 동안에 있었던 일로 기지개를 켠 상태처럼 늘어난 것 같았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참아 내며 침대가로 몸을 굴렸다.

"좋은 아침이오, 애비게일 양."

뒤에서 즐거운 듯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몇 시

간만 지나면 이 마을에서, 그녀의 인생에서 영원히 떠나갈 사람이었다. 그가 그녀를 끌어 안

으며 고개를 숙여 얼굴에 키스했다. 그는 그녀의 옆에 거의 누울 듯이 앉아 두 손으로 그녀

의 하얀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몸무게로 침대가 출렁거렸다.

"어디 가려는 거요?"

그가 나른한 음성으로 물으며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 쥐었다.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꼿꼿이 등을 굳혔다.

"그러지 말아요. 아프잖아요!"

엉덩이에서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그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그녀의 등 위

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그녀는 일어서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운을 주웠다. 몸 여기저기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런 그녀를 재미있다는 듯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바로 세웠다. 재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갓 피어난 5월의 장미처럼 그는 아무

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발을 질질 끌며 방에서 걸어 나갔다. 그는 가슴을 활짝 펴고 기

분좋게 기지개를 켰다.

애비는 기름기가 가득한 접시에 고기 조각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커피잔

에는 갈색 띠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샴페인이 약간 남아 있는 와인잔이 덩그렇게 그녀를 바

라보고 있었다. 식탁보에는 웃느라고 음식물이 튄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식탁보를 펼

쳐 대며 웃음을 터뜨리던 기억이 비참하게 떠올랐다. 식당 가운데 서서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식당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이 밀려왔다. 그녀는 가운 끈을

힘껏 여몄다. 좀더 세게, 세게. 너무 조여서 그녀가 반으로 나뉘어질 것 같았다.

애비, 그런 탐욕스런 밤은 생각하지도 마!

그러나 눈만 들면, 어젯밤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슴이 아파 왔다. 그를 보내야

했다. 어젯밤의 기억도. 우선 그녀는 깨끗이 청소를 하기로 했다. 지저분한 접시든 그녀 자

신이든.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대 선 제시는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는 애비를 보고 있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그녀의 심정은 이해가 갔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머뭇

거려졌다. 농담을 해도 도리어 분위기만 가라앉게 될 것이다. 그가 다가가 포옹을 하려 해도

그녀는 밀쳐 낼 것이다. 그렇다고 한없이 방관자처럼 여기에 서서 그녀를 바라볼 수만은 없

었다.

그는 그녀의 등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때때로 사람들은 아침이 되면 다시 확인을 하고 싶어하지."

그녀의 목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목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도 점점 부드러워졌다.

"항상 아침이 되면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오. 그럴 땐 오후까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무엇이

었는지 생각을 보류하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이오. 적어도 점심 때까지는 파트너를 인정하는

게 관례지. 깔끔하고 예의 바른 방법이오. 특히 지금 같은 때엔."

애비의 몸이 돌려 세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몰골이 섬뜩할 정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며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그녀도 반응을 보이며 키

스를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두려움과 함께 죄책감이 일었다. 어쨌든 그는 확인을 받고 싶

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부드러운 키스는 그녀에게 색다른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연인

에게 받는 최초의 아침 키스였다. 그가 떠난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에게 안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렀다. 그녀는 입술을 아프게 물고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를 감싸 안

으며 그녀의 머리 위에 살며시 뺨을 댔다.

"슬픔이나 아픔은 곧 사라질 거요."

그녀는 외치고 싶었다.

오, 당신은요? 제시, 당신도 잊어버리나요?

그에 대한 생각이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도, 오늘 아침에도 자상하게 그녀를 대

했다. 그녀는 예상치 못했던 그의 부드러운 행동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것이 그의 본모

습이 아니기를 바랐다. 예전의 기억대로 그가 무뢰한에 야만인, 식탐이나 하는 돼지였으면

떠나 보내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머무르게 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그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침 식사는 걱정 말고, 우선 뜨거운 물로 목욕이나 해요. 어제 저녁을 늦게 먹었잖소."

그의 사려 깊은 말이 날카롭게 그녀의 가슴을 찔러 왔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연료로

쓸 나무를 챙기는데, 그가 다가왔다.

"이리 줘요, 내가 물을 데우겠소. 당신은 여기나 치우고 있어요."

그녀는 그의 부드러움에 데기라도 할 것처럼 급히 물러섰다. 그가 그런 그녀를 막아서며 조

용히 불렀다.

"애비?"

그녀는 돌아서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침에 부엌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대하는 그의 눈이

었다. 그는 바지 외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무를 들고 있는 긴 갈색 손, 헝

클어진 머리칼, 콧수염, 따스한 눈빛, 전보다 훨씬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네?"

"오늘 당신은 '그러지 말아요, 아프잖아요'라는 말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세상에, 제시, 이러지 말아요! 당신의 그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어요! 왜 이렇게 핸섬하고

사려 깊고 따스한 모습으로 거기서 있는 건가요? 이제 곧 떠날 거면서!

"전 괜찮아요."

그녀는 마음속의 불안을 숨기며 평범하게 대답했다.

"어젯밤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아요.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좋소. 애비, 한 가지 부탁을 해도 괜찮겠소?"

그가 장작들을 내려놓고 손을 비비며 물었다.

"네?"

"아직 마을에 있는 가게들이 문을 열지 않았겠지?"

"네."

"열차에 놓고 내린 내 사진 장비들 속에 내 짐도 함께 들어있소. 옷을 몇 가지 사고 싶은데

돈이 하나도 없소. 짐한테 미처 부탁하지 못했거든. 돈을 좀 빌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다음

에 갚겠소."

"바보 같은 부탁이군요. 갚을 필요 없어요. 필요한 만큼 쓰세요."

"세수를 하고 옷을 사러 갈 생각이오. 물건을 사 온 후에 여기를 치우고 옷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괜찮겠소?"

"그럼, 아침 기차를 탈 건가요?"

"아니오. 정오에 사람을 만나기로 했소. 사업상 일이오. 그리고 나서 3시 반 기차를 탈 거요

."

"사람들을 만난다고요?"

궁금한 듯 그녀가 물었으나 그는 시선을 피하며 바삐 장작을 들어 올렸다.

"그렇소. 짐이 어제 약속을 잡아놓았다고 하더군.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나도 관

련되어 있는 일이라서."

이처럼 작고 외진 마을에서 철도 회사 사진사까지 참석해야 할 사업상의 만남이 무엇일까,

의아했다. 그러나 그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겠지요."

그가 불 속으로 장작을 집어 넣었다. 셔츠도 입지 않은 맨발의 그가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다

. 옷을 다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몇 분 후 그녀가 거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가 셔츠 단추를 다 채우고 머리를 단정히 빗은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애비, 빗이 없어서 당신 빗을 사용했는데 괜찮소?"

애비게일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밤 함께 사랑을 불태웠

던 남자가 빗을 빌려 썼다고 보고를 하다니.

"물론 괜찮아요. 그리고 여기 있어요. 넉넉할지 모르겠군요. 집에 현금을 많이 두지 않는 편

이라서요."

그는 천천히 다가와 긴 손가락으로 돈을 받았다.

"곧 갚겠소."

그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을 외

면하고 있었다.

그녀가 절룩거리며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다 대고 말했다.

"홈즈 상점으로 가세요. 반 블럭 아래 왼편에 있어요."

"갔다 오겠소."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힘겹게 몸을 일으켜 목욕을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검은 치마에다 블라우스를 입었다. 소매에 단추가 많이 달려 있고, 칼라

도 거의 귀 아래까지 올라오는 정숙한 옷이었다. 거울에 모습을 비춰 보았다. 어제 아침보다

10년은 더 나이들어 보였다. 거울 너머로 빨간 구두가 비쳤다. 구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는 결국 그것을 신기로 마음먹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제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비, 돌아왔소. 애비, 어디 있는 거요?"

"2층에 있어요."

그녀는 대답을 하며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목욕을 해도 괜찮겠소?"

"네, 저장통에 뜨거운 물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식품 저장실옆의 장롱 서랍에 깨끗한 수건

이 있구요."

"알고 있소."

그의 발소리가 다시 멀어졌다.

오, 하느님! 그녀는 그가 떠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빨간 구두가 그녀의 발에 걸쳐져 있었다. 그녀는 몸을 숙여 레이스끈을 묶었다. 그녀의 발에

꼭 맞았다. 데이비드 멜처의 안목은 정말이지 높이 살 만했다.

일어서 보았다. 안정감 있게 균형이 잡혀졌다. 그 구두를 신고 있으니 그녀는 마치 자신이

작고 여성스러워진 느낌이었다. 몇 걸음 걸어 보았다. 또각또각 경쾌한 소리가 났다. 이 빨

간 구두를 신은 진짜 이유는, 그녀의 인생에서 영원히 떠나려는 제시 더프레인에게 의식적으

로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만이 바다에 있는 물고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면도기는 어디에 두었소?"

제시의 외침이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애비, 서둘러야 하오."

"잠깐만요, 곧 갈게요."

그녀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엌 선반에서 면도기를 찾아 들고 뒤돌아 섰다

. 언제 다가왔는지 모르게 그는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이 그의 허리에서 발가락까

지 내려갔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올라갔다.

"숯돌도 좀 가져다 주겠소?"

그가 물었다. 그녀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선 확실히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씁쓸하면서 달콤하고, 또 격심한

고통이 그것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온통 그의 체취로 가득 차 있었다. 바지 아래 드러난 그

의 다리 근육과 면도기, 빗 등이 너무나 친숙하게 그녀에게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

금 면도를 하고 옷을 입으며, 그녀를 버리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름다운

몸에 다른 여자가 접근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고급스런 새 바지에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잔돈은 거실 서랍에 갖다 놓았소."

그가 수염을 빗으며 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면도를 마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가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빳빳한 흰색 칼라에 줄무늬 실크 넥타이를 꼼꼼하게 매고, 말끔한

짧은 모닝 재킷 아래 더블단추가 달려 있는 조끼를 받쳐 입고 있었다. 숨을 멈추게 할 정도

로 멋진 모습이었다. 특히 회색 양복에 바지 멜빵을 하는 광부들이 사는 이곳에선. 그의 양

복 색깔이 물오리를 연상시켰다.

갑자기 질투심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봐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셔츠도 입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 그녀를 떠나자마자 공작처럼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그녀는 식탁 위로 시선을 내리깐 채 말했다.

"그 옷을 전부 마을에서 산 거예요?"

그는 말끔하게 정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녀는 도리어 초조한 모습으로 흠집이나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놀랄 필요 없소. 며칠 동안 동부에서 철도로 달려온 거요. 더 이상은 양키들도 기성복을 독

점하지 못하니까."

"흥, 너무 눈에 거슬리는 색깔을 골랐군요."

"이 색깔이 어때서? 청동색이잖소. 동부와 유럽에서 유행하는 색깔이오."

"청동색이라고요?"

그녀는 여전히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공작새가 차라리 낫겠군요."

"공작새?"

그가 접은 옷깃을 펴며 대꾸했다.

"오, 멜처가 보낸 신발도 공작새보다 나을 건 없군."

그녀는 반사적으로 의자 다리 뒤로 구두를 숨겼다. 그러나 청동색 양복이 눈에 거슬리지 않

는다는 것을 조용히 인정해야 했다.

"그 양복이 정말로 당신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계속 그를 자극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화가 난 음성이었다.

"당신은 사랑이나 돈을 받으면 화려하게 변신하는 속성이 있나 보군요!"

"사랑이나 돈이라고?"

그는 또박또박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이봐요, 그런 쓸데없는 말은 이제 집어치우고 당장 나가요! 그 잘난 몸과 청동색 양복 모두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요. 그 딱 달라붙는 파자마도 잊지 말구요. 그것들을 나한테서 얻었

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구요!"

서로를 노려보는 동안, 제시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지닌 채 헤어지고 싶었다. 그는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애비, 제발 부탁이오. 최소한 작별 인사는 해야 하잖소?"

"왜요? 화를 내며 떠나는 데는 익숙치 않은가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로 온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그는 애비가 앉아 있는 의자 옆에 어색하게 쭈그려 앉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체

나 마네킹인 양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애비."

그가 애비의 작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떠날 수는 없소. 서로 미소를 지으며 헤어질 수 있길 바랐소."

젠장! 젠장! 그녀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거지? 왜 이

렇게 멋지게 보이는 거야? 왜 지금에야…….

"오늘 당신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소. 애비, 당신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기도 이젠

피곤하오. 시간도 별로 없소. 당신 스스로 깨달아야 해요. 날 믿어요. 당신의 행동을 수치스

럽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젠 죄지은 듯한 기분이 사라졌다고 말해봐요."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꼭 쥔 주먹을 풀지도,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없었다.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애비, 한 가지만 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러니까 임신

이라도 하게 되면 꼭 나에게 연락을 해줘요. 알았소?"

절대로, 절대로 하지 않겠어요!

연락을 한다 해도 그는 돌아와서 그녀와 결혼 같은 것을 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가 계속 말했다.

"덴버에 있는 RMR 중앙 사무소로 연락을 하면 언제라도 나와 닿을 수 있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빨간 구두가 치마 속에서 미끄러져 나

와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던 그의 청록색 바지 위를 헛디뎠다. 바지 위에 자국을 낸 그 빨간

구두가 그의 심기를 자극했다.

"젠장, 애비, 나한테 뭘 기대한 거요! 떠날 거라고 어젯밤에 이미 말했잖소! 그리고 왜 그런

, 매춘부들이나 신을 것 같은 신발을 신고 있는 거요! 내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시위

라도 하는 거요? 당신은 당신이 갖고 싶어했던 것을 얻었고, 나도 그렇소. 더 이상 날 이상

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요! 애비, 좀 더 성숙해져요. 물론 우리 둘 다 잘못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소. 우리 서로 죄책감 같은 건 갖지 말기로 합시다."

그녀는 그의 무릎 위에 생긴 주름을 보며 순진한 척 말했다.

"오, 이런, 어쩌면 좋아. 더프레인 씨, 말끔한 공작새 바지에 주름이 생겼네요."

"좋소, 애비,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그 신발을 신고 거리로 나간다면, 그건 당신 스스로 바

보짓을 자초하는 거요!"

그때 성마른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애비, 애비게일 양, 괜찮으신가요?"

데이비드 멜처의 얼굴이 현관께에 불쑥 나타났다. 그가 이 집에 있었을 때도 이런 장면이 연

출된 적이 있었다.

얼른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던 애비게일은 자신이 빨간 구두를 신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주춤

거렸다.

"멜, 멜처 씨, 어떻게, 어떻게 여기를 오셨나요?"

제시가 내뱉은 임신이니 매춘부니 하는 말들이 그녀의 귓가에서 어지럽게 떠돌고 있었다.

"잠깐 들른 겁니다. 그런데 저분은 오신 지 얼마나 되었나요?"

그러나 애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시가 데이비드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그의 어조는

차갑고 도전적이었다.

"당신이 떠나기 전부터 쪽 여기에 있었소, 멜처. 그래서 유감이오?"

그를 응시하는 데이비드의 표정엔 싫은 내색이 역력했다.

"정오에 협상 테이블에서 얘기합시다. 몇 분 남지 않았군. 난 애비게일 양을 보러 온 거요.

오늘 협상에 당신이 참석한다고 해서 몸이 다 나아 이곳을 떠났는 줄 알았소."

더프레인은 거칠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그럼 정오에 봅시다."

그는 충격을 받아 멍하니 서 있는 애비게일을 남겨 둔 채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알고 있었어! 제시는 알고 있었어! 시간까지 알고 있었다구!

그는 제임스 허드슨에게서 데이비드가 이 마을로 돌아온다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가 내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녀의 처녀성을 빼

앗았다. 멜처가 돌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나 그는 이미 더럽혀진 여자를 신부로 맞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제시가 사실대로 얘기했었더라면, 데이비

드는 그녀의 남편이 되었을 것이다!

분노로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멜처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히며

부드럽게 그를 맞이했다.

"들어오세요, 멜처 씨."

"고맙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지팡이를 들고 들어왔다. 제시도 방문에 어깨를 기대고 바지에 손가락을 찔러

넣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쪽 사람은 마을에 왔소?"

멜처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어제 왔소."

분노로 입가를 부르르 떨며 제시가 대답했다.

"당신 쪽은?"

"역에서 기다리고 있소."

더프레인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애비게일은 데이비드의 뒤에서 이를 갈며 차갑게 제시를 쏘

아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몸을 돌리며 무뚝뚝하게 인사를 했다.

"잘 있어요, 애비게일 양."

데이비드가 떠났던 그날의 기억과 함께 제시 더프레인에 대한 증오심이 활활 타올랐다.

더프레인 같은 사람이 일찍 가고, 멜처처럼 친절한 매너를 가진 사람이 오랫동안 머물렀었더

라면…….

제시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죄책감이 일었다.

"안녕히 가세요, 더프레인 씨!"

그는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데이비드를 지나치고 열려 있는 현

관문을 걸어 나갔다. 방금 면도를 한 그에게서 나는 청결한 비누향이 그녀를 괴롭혔다.

"최소한 당신한테 예의를 차리는 법은 배운 것 같군요."

데이비드가 딱딱하게 지적했다.

절룩거리며 거리를 내려가고 있는 제시의 뒷모습을 보며 애비게일이 중얼거렸다.

"네, 네, 그래요."

데이비드가 목을 가다듬었다.

"저, 당신 아, 아버님의 지팡이를 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애비게일 양."

대답이 없었다.

"애비게일 양?"

그녀는 마음을 수습하고 머릿속에서 제시 더프레인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멜처 씨, 정말 반가워요. 다시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당신을 보니 기쁘군요."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그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서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냉기가 스며나왔다.

"네, 스튜어트역에서, 에헴, 회합이 있어서요. 그날 기차, 에헴, 안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누

구의, 에헴, 잘못으로 생겼는지 확인받기 위해 왔어요."

"네, 오늘 만나신다면서요. 발은 어떠세요?"

그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네, 불편한 건 사라졌지만, 에헴, 아직도 약간 절룩거리고 있어요."

엷었지만, 그녀의 대답에 걱정이 배어 나왔다.

"이런, 유감이군요. 하지만 점점 나아질 거예요."

순간 그녀는 어쩌면 평생 절룩일지도 모르겠다던 도허티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제, 제 선물을, 에헴, 받으셨군요."

그녀는 자신이 신고 있는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신으니 더 사랑스러 보이는군요."

그는 그녀의 차림이 구두와 완전히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그의 자존심을 깨뜨리지 않기로 했다.

"발에 꼭 맞아요."

그녀는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그에게 신발을 보여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주소를 몰라서 못했어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는 드러난 그녀의 발목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치마를 내렸다. 그는 제시와 달리 진짜 신사였다. 이런 무례한 행동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

이었다.

"멜처 씨, 제 무례를 용서하세요. 자, 여기 앉으세요."

그녀가 의자를 권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원래 일자리로 복귀하셨나요? 오늘 회합이 끝나자마자 곧장 돌아가셔야

겠네요?"

"이틀 동안 스튜어트에서 묵을 겁니다. 마을에, 에헴, 호텔을 잡았습니다. 덴버로 돌아가니,

에헴, 선적된 구두가 절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래서 구두샵을 낼 적당한 가게를, 에헴, 물

색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이 어떨까 하고, 에헴, 둘러보고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네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면 좀 만나 주셨으면 좋겠군요. 오늘 있을 회합의 결

과도 좀 전해 주시구요. 당신과 더프레인 씨, 모두 제가 간호한 사람들이니까요."

"네, 물론이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소문에 무척 민감하답니다. 특히 오늘처럼 특이한 일이라도 있는 날이면

온 마을이 끓는 가마솥처럼 들끓지요."

그는 신경질적으로 조끼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애비, 애비게일 양, 저희가 만약 당신의 명예에 해를 끼쳤다면……."

그녀는 연약할 정도로 예민한 그의 감성이 측은했다.

"아니에요, 멜처 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도리어 그 일 때문에 더 좋아졌는걸요."

"아, 네, 저는, 그런 줄도……."

"제발."

그녀가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우스꽝스런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요. 전부 오해였어요. 다 잊어버리고 좋은 친구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때요?"

또다시 그녀의 직설적인 말에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늘 저녁 때까지요."

"네, 에헴, 저녁 때까지."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가 이 집에 들어와서 기침을 한 시간만 따져도 15분은 될 것 같았다.

애비게일은 갑자기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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