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87화 (87/138)

86회

chapter3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12시였다. 호박마차를 타고 온 것도 아니건만 자정이 지나니 마법이 풀렸다. 둥둥 떠다니던 감정을 추스르고, 내 상태를 관조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었다. 이미 옛 저녁에 식었어야 할 뺨에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일종의 주박이었다. 내 생각을 방해하고, 내 이성을 흩어 놓는 저주였다.

이름 짓기라는 말이 가진 힘은 무섭다. 아무 것도 아닌 것도, 모호한 것도, 이름을 지어 버리는 순간 그 의미 안에 가두어버린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게 보면 데이트라는 이름에, 시야를 조금 더 넓힌다면 연인이라는 의미에 갇혀 있었다.

데이트라는 것은 참 좋은 핑계거리였다. 가까운 것은 오직 심리적 거리뿐이었을 텐데, 데이트라는 이름 아래에서 신체적 거리 역시 가까워졌다. 아니, 가깝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데이트라는 핑계를 대면 은밀하게 품고 있었던 욕망을 정당하게 표출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원이를 못내 껴안은 것도, 정원이에게 짙은 애정을 표출한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 고삐가 풀린 것이었다. 심리적 거리도 그에 맞춰 변질되고 있었다.

연인이라는 이름은 더 했다. ‘행세’라는 변명을 달아놓은 연인이라는 이름아래에서 내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연인으로 바라본다. 정원이가 내게 먼저 다가온다. 나 역시 연인들의 관계에 익숙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판단 근거를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정원이의 향기, 마주잡은 손의 따뜻함, 주위에서 떠미는 등, 그것 때문에 나 역시 못 이긴 척 정원이를 연인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이상한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원이가 내게 자신을 좋아하지 말아달라고 한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원이는 마치 자신의 말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내게 은근한 어필을 하고 있었다. 아니, 대놓고 유혹을 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자신이 의도하였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원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미치겠는 건 이것을 정원이에게 물어봐야하는지 조차 확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원이가 내게 자신을 좋아하지 말라고 한 것을 시험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정원이가 남자의 삶을 잊고 여성으로써 살 준비를 하는 것인지, 더 나아가 혹시라도 나를 좋아하는 것인지, 그 모든 스탠스에 따라 내가 물어봐야 할지 물어보면 안 될지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았다.

밤이 너무 길었다. 내일 운전을 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지금쯤 슬슬 잠을 자둬야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너무 많은 생각이 요동치고 있었다. 지금 정리해두라며 지금 정리해두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리라며 확신에 가까운 예측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어려운 문제였다. 정답의 유무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짧았던 3주간의 일을 되돌아본다. 정원이는 자신을 좋아하지 말아달라고 했고, 연인 행세를 해달라고 했으며, 술을 쳐 마시다 나와 함께 잤고, 데이트를 하며 내 볼에 키스를 했다. 무엇 하나 내가 먼저 부탁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어려웠다. 차라리 내가 부탁했으면 그것에 맞춰줬다고 라도 생각했을 테니까. 그곳에 정원이는 없었다. 이미 여자애가 된 정원이가 있을 뿐이었다. 눈짓도, 몸짓도, 차려입은 옷도, 그 모든 것이 여성이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이론을 시작할 가설을 세울 수 없었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단지 오늘 너와 닿았던 몸이 그리고 너에게 키스를 받은 오른뺨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그 열기가 계속 내 생각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고 할 때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정원이의 입술이 생각났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입을 맞추었을까. 그냥 정하에게 혼나기가 싫어서? 그런 단순한 이유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애매한 그대로였다. 정원이는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한 발자국씩 걸어오고 있었고 나는 정원이에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태양이 떠오른다. 햇빛이 눈을 찔렀지만 그저 멍하게 바라본다. 눈이 부셨다. 결국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당면한 문제도 이렇게 고개를 돌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로 샤워를 했다. 그동안 정원이를 무슨 얼굴로 봐야할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 정할 수 없었다. 경계를 다시 그을까? 뭐라고 운을 띄워야 하나. ‘너 나 좋아하냐?’ 이미 했던 말이었고 정원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나 너 때문에 힘들다. 그만 앵겨 붙어라.’ 그 말을 했다가 정원이가 상처라도 받는다면? 오해를 하기 너무 쉬운 말이 아닌가. 누군가를 칼로 베듯이 쳐내는 것 같은 그런 말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어제 입었던 옷 말고는 입고 나갈만한 옷이 딱히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저번에 정원이와 입었던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었다. 체면치레치고는 썩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옷이었다.

내가 이렇게 고민을 한다고 해서 정원이도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원이는 어제의 나처럼 지금의 상황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다. 내가 태도를 확실히 하지 않을 것이라면 적어도 그 흐름엔 맞춰줘야 했다. 정원이는 이미 충분히 나를 배려해줬으니까.

눈두덩이를 비비고 고개를 흔들다가 차에 앉았다. 피곤함과 잡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과연 오늘 사고를 내지 않을까 염려가 됐다. 그래도 어제의 약속을 떠올리며 정원이네 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원이네 집에 도착하고 벨을 눌렀다. 다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약속한 시간이기도 했다. 정원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은 다소 편한 복장이었다. 저번에 우리가 입었던 핑크색 후드 티에 청바지. 의도하진 않았지만 나와 같은 복장이었다. 정원이는 웃는 얼굴로 나왔다가 내 얼굴을 보곤 표정이 굳었다.

“너.”

정원이는 말을 꺼내려다가 그냥 한숨을 내쉬고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별로 센 힘도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정원이가 잘 정리된 자신의 침대에 나를 밀었다. 미묘한 자세로 침대에 앉아있었더니 내 이마를 꾹 누른다.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눈에 핏발을 세우고 그렇게 썩은 표정을 짓고 있냐?”

“아니, 별 일 없었는데.”

“별 일도 없었는데 왜 몰골이 그래? 됐다. 그냥 한 숨 자라, 한 숨 자.”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정원이가 엄한 목소리로 어린아이를 혼내듯이 꾸짖었다. 내가 대꾸하려고 하자 정원이가 한 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로 가다간 졸음운전으로 사고라도 내겠다. 왜. 바다 한 번 보러 가다가 같이 죽자고?”

할 말이 없어 입만 달싹거리다가 그냥 침대에 누웠다. 그 와중에 정하의 표정이 매서워서 그 눈빛을 피하듯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정원이가 내 눈두덩이 위에 손을 댔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따뜻한 손이었다. 정원이가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다는 나중에 가도 되니까, 일단 자. 나 별로 신경 안 쓰니까.”

“……그래, 미안하다.”

말하면서도 나는 내 자신을 비웃었다. 별로 미안한 마음도 없이 나는 습관처럼 사과하고 있었다. 신기한 건 지금까지 날 괴롭히던 잡생각이 네가 손을 올린 그 순간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빈자리에 남아있던 피로가 덮쳐들었다. 나는 항상 힘들 때마다 네 온기에 기대는구나. 새삼스레 든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정신이 조금씩 들었다. 완벽하게 잠을 깬 것은 아니었고, 의식이 무의식의 표면으로 떠있는 느낌이었다. 수면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이마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귓가에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리기 시작했다.

“언……빠랑 ……야?”

“글……모르…….”

“……표정이 심…….”

“……역시 민……?”

“……아니……어제……좋아……있었…….”

“……나……시험……었고.”

“……다니?”

“……여자……예전……시험…….”

“……유……교……나……않을…….”

“……상태……알 수 있……혼자……고민……음.”

마침내 의식이 깬다. 고민을 조금 했다.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일어난 체를 해야 할지 아니면 말이 끝날 때까지 자고 있는 척을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이마를 살살 기분 좋게 쓸어내리는 게 손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무게 추는 자고 있는 척을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다행히 이야기는 마무리하는 것 같았다.

“뭐,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래. 납득 안 되는 부분은 있지만.”

정원이와 정하가 떠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정원이가 전화를 받았다. 이마에서 느껴지던 부드러운 손길이 멀어졌다. 내가 자고 있기 때문에 정원이가 자리를 피해서 전화를 받으려는 것 같았다. 기상하기에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자연스럽게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허리를 천천히 들어서 침대에 앉았다. 고개를 조금 젓다가 정하를 바라보고 한 손을 들어 천천히 흔들었다.

“좋은 아침.”

“아침 아니거든.”

“그러냐?”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찾으려는데 핸드폰이 없었다. 자다가 던져놓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에 침대를 뒤적거렸지만 핸드폰이 통 보이질 않았다.

“아니! 맞다구요!”

“쟤 뭐하냐?”

“몰라?”

정원이가 씩씩대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의 모양이 익숙했다. 어,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 핸드폰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서 뭐라고 떠들고 있는 정원이의 핸드폰을 바라봤다. 역시나 내 폰이었다. 슥 뺏어가서 전화기를 바라보는데 전화가 마침 끊겨있었다.

이서진. 고등학교 때 친구의 이름이었다. 왜 얘가 지도 모르는 내 친구랑 통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정원이 역시 굳어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3시 26분.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다. 나는 하품을 하고 나서 전화기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긴장하며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정원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자.”

“어, 어디로?”

그제야 정원이가 엉거주춤하게 움직이며 물었다. 나는 다시 하품을 크게 하며 말했다.

“흐아암, 어디긴 어디야. 바다지.”

“어? 이제 와서?”

“이제 와서는 뭐 이제 와서냐. 바다 한 번 보고 오는데, 지금부터 출발하면 속초까지 대충 세, 네 시간 걸리나? 바다나 한번 보고 오자.”

“아니, 정말 바다만 딱 보고 오게?”

“그럼. 약속한건 지켜야지. 그치, 정하야?”

“뭐, 그렇긴 한데.”

정하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어설프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내 의도래 봐야 별 건 없었다. 그냥 바다를 보고 싶었다. 바다를 보면 왠지 마음속에 있는 이 답답한 감정과 생각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장애물 하나 없이 드넓은 동해를 보고 싶었다. 거리만 생각한다면 인천을 가도 될 일이었지만. 내가 신발을 신으려하자 정원이가 다급하게 내 손을 붙잡고 물었다.

“아니, 씻지도 않고 가게?”

“어, 그럼 얼굴만 좀 씻을까.”

“나 준비도 해야 되는데?”

“대충해. 너 그대로 가도 돼.”

“내가 안 돼!”

“언제부터 그렇게 꾸미고 다녔다고 그래? 그리고 너 지금도 충분히 예뻐.”

“무, 뭐!”

정원이가 얼굴을 붉히고 나를 바라봤다. 당황한 기색이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생각이 필터링을 걸치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나 역시 실수를 인정했으나 사과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 정원이를 내버려두고 화장실로 들어와 얼굴을 찬물로 씻었다. 정신이 이제야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밤을 새는 것이 힘들다. 요즘은 운동을 하면서 살도 많이 빠지고 체력도 괜찮아 진 줄 알았는데, 하긴 계속 머리를 굴리는 것도 중노동이었다. 놀면서 밤을 샜으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겠지. 그래도 이상할 정도로 피곤하진 않았다. 정원이 덕분일까. 머리를 쓰다듬던 감촉이 아직 조금 남아있었다.

화장실을 나오자 정원이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가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아니 왜 이리 서두르고 그래, 정말!”

“야, 지금 출발해도 돌아올 생각하면 벌써부터 힘들다.”

“그럼 담 주에라도 가면 되지! 오늘만 날이냐? 어? 오늘만 날이야?”

“어. 오늘만 날이야.”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정원이도 후다닥 챙겨오더니 쫓아 나왔다. 차에 타자 정원이가 대체 무슨 심경이냐느니, 왜 하필 인천도 아니고 속초냐느니, 그런 소릴 했다. 나는 그냥 털털하게 웃으며 질문을 자연스럽게 넘겼다. 정원이는 그러고 나서도 조금 툴툴거렸지만 곧 조용해졌다. 내가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서울을 빠져나갈 때쯤 되자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말 안 걸어도 돼?”

“왜?”

“너 방금까지도 잤잖아. 안 졸려? 옆에서 좀 말 걸어줘야 되는 거 아니야?”

“아. 괜찮아. 푹 잤거든.”

“그, 혹시.”

“왜?”

정원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뭔가를 두려워하는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혹시 내 말 들었어?”

“뭔 말?”

“어, 아니야. 못 들었음 됐구! 아하하.”

정원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 역시 지금 정원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애매해서 같이 웃어넘겼다. 정원이는 곧 우물쭈물하며 손가락을 배배 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백미러로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야, 그냥 자. 나도 이번에 서울 밖으로 처음 나가보는 거라 운전에 집중해야 돼.”

“그, 그래?”

“어. 그니까 이번엔 니가 한숨 푹 자.”

“응.”

그리고 정원이는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하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정원이가 주말에 일어나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오늘은 정말로 일찍 일어난 것이었다. 내가 자는 동안 잔 것 같지도 않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차를 운전하면서 오히려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유가 있다면 잡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나 역시 서울을 나와서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적절하게 긴장이 들어 오히려 좋았다. 경치가 빠르게 지나간다. 내 생각도 그대로 흘러간다. 그렇게 나 혼자만의 시간동안 나는 감정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작품후기]2일차 데이트 1편. 아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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