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회
chapter3합의점에 도달했다. 정원이는 나에게 오늘의 기억을 잊고, 사진을 쳐 지우라며 협박했다. 나는 오늘의 기억은 평생 묻고 놀릴 것이며, 사진 역시 누나에게 간 것을 어쩌겠냐고 하였다. 우리는 한 발자국씩 양보를 하기로 했다. 나는 오늘 일은 언급하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정원이는 누님한테 보낸 것 까지만 용서하며 다른 이들에게 보일 경우 즉시 전쟁을 선포하겠노라 약속했다. 우리는 극적인 체결을 이루었다. 사실은 정하가 무서운 것이었다.
“사진 찍으러 가자.”
“이젠 걸을 수 있고?”
“방금도 완전 걸을 수 있었거든?”
방금 전까지 버럭버럭 화를 내면서도 의자에 앉아서 몸을 떨던 녀석 답지 않은 소리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정원이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서 손을 내밀었다.
“니가 좀 도와주면 걸을 수 있었다고.”
“어련하시겠어.”
나는 손을 마주잡고 힘을 주어 당겼다. 정원이가 휘청하며 일어나서 겨우 의자에서 일어섰다. 보기에 꽤나 위태위태해 보였다. 영화관에서 확실히 힘을 다한 모양이었다.
“정말 괜찮냐?”
“괜찮다고! 그만 좀 물어봐!”
“아니, 놀릴 라는 게 아니고. 정말 괜찮냐고.”
정원이는 내가 무표정하게 물어보자 그제야 한 발자국씩 걸어보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조금 더 쉬어야 될지도.”
“그럼 쉬어라. 어, 사진관은 그만 두자. 어차피 이따가 그 뭐냐, 옛날 경의선 다니던 거 모아놓은 곳.”
“경의선 책거리?”
“그래 뭐 이름이야 뭐든 간에. 거기서 사진 찍을 테니까, 겸사겸사 하면 되겠지.”
“오! 좋은 생각……이 맞나?”
정원이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두 개를 합치면 남들이 찍어주는 러브러브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나 역시 정원이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입을 떼려는 순간 정원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절대로 부탁 못하니까.”
“하아, 야.”
“나 원래도 말 주변 없잖아. 사람들이랑 대화도 잘 못해. 이번에 더 그렇게 됐어.”
정원이가 빠르게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이렇게만 말할 수 있다면 의사소통 능력에 장애는 없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제 편할 때만 말을 못하는 녀석이었다. 사실 나도 현실에 눈을 돌리고 싶었던 것뿐이지 정원이가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사진 좀 찍어달라는 모습은 쉽게 떠올리기 힘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그래. 너한테 뭘 부탁하겠냐. 내가 한다, 내가 해.”
“그, 그렇지?”
정원이가 얼굴에 화색을 띄며 말했다. 이따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다소 부끄러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을 하니 뭔가 억울해졌다. 내가 느끼는 부담감을 조금은 정원이에게 덜어주도록 하자.
“그럼 그 러브러브한 포즈는 니가 생각해라.”
“엉?”
“싫으면 니가 부탁하든가.”
“어, 음. 아니야, 그래. 생각해볼게.”
“그래, 뭐 마시고 싶은 건 있냐?”
“생각의 박차를 가해줄 달달한 거.”
“언젠 아니었냐.”
나는 정원이를 보며 낄낄 웃고는 카페로 향하려고 하다가 차라리 앉아서 쉴 거라면 같이 이동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정원이에게 그 생각을 전달하고는 조금만이라도 걸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정원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깨끗이 생각을 접었더니 정원이가 내 팔을 붙잡고는 말했다.
“어떻게 좀 부축해주면 저기까진 갈 수 있을지도.”
“너무 무리하지 마. 어차피 너 쉬라고 이러는 거야.”
“음, 그래도 나도 카페에서 쉬는 게 눈치도 덜 보이고 그러니까.”
“그래?”
그렇게 말하는 정원이였지만 아직 일어나기는 영 힘들어보였다. 당장 휘청거린 지 채 오 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새 회복됐을 리가 없었다. 나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허리를 숙였다.
“업혀.”
“……응?”
“업히라고.”
내가 부끄럼을 숨기기 위해 짜증을 겉에 둘러 재차 말하자 정원이가 깜짝 놀라며 내 등에 업혔다. 굉장히 애매하게 힘을 주고 있는 게 느껴져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그냥 목에 팔 두르고 제대로 업혀.”
“아니, 그럼, 음.”
“야, 저번에 공주님 안기할 때가 배는 쪽팔렸어.”
“그 때 얘긴 왜 꺼내구 그러냐.”
정원이가 툴툴거리며 내게 온전히 무게를 실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채하며 정원이를 업고 카페로 걸어갔다. 정원이는 보이는 것처럼 별로 무겁지 않았다. 요즘 운동을 하기 때문에 저번보다 더 수월하게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어려운건 오히려 등에 느껴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에 정작 말을 꺼냈던 내가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패착이었다. 영화관에서 한참을 붙어있어서 방어기제가 제 역할을 못한 지도 모르겠다. 걸을 때마다 네가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화 향이 코를 찌른다. 네 작은 숨결이 내 귓가에 스칠 때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데에만 집중한다.
마침내 카페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자리에 정원이를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운터로 나아갔다.
“주문하시, 어, 주문하시겠어요?”
“아, 예.”
점원이 나를 보고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한 걸 보니 내 얼굴이 어땠는지 알 법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은 후에 익숙한 메뉴를 입에 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초코 프라푸치노 하나씩 주세요.”
나는 메뉴가 나오고 나서도 마치 번호를 듣지 못한 냥 미적거렸고, 한참을 그렇게 모른 척하다가 결국 프라푸치노가 조금 녹아서 네게 불평을 듣고 말았다. 그러나 프라푸치노가 녹았다고 불평을 하는 너도 평소와는 달리 한 마디만 남기고는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았다. 네 마음과 내 마음이 같다면, 아마 너 역시 프라푸치노가 조금 녹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
카페에서 쉬고 조금 이르게 저녁을 먹기로 했다. 선정해 놓은 곳은 많았으나 네가 고른 곳이 결국 치맥이라 조금 웃음이 나온다. 내가 그래도 데이트니 분위기 있는 곳으로 갈래? 라고 물으니 너는 우리는 이게 맞는 분위긴데? 라며 우문현답을 했다.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답변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평소처럼 술을 부어라 마셔라할 순 없었다. 내일 나는 운전을 해야 했고, 너무 이른 시간에 출발할 필요는 없었으나, 반주정도를 걸치는 데 그쳐야했다. 그러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면 반주가 내 등을 밀어주는 데 도움을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할 일이라고 하니 정원이가 생각한 포즈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그러자 정원이는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는 이쪽을 바라보다가 부끄러운 듯 미소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대체 뭔데 그렇게 숨기고 그러냐.”
“비밀.”
“어이구, 어련하시겠어.”
그리고는 점원을 불러 후양반반을 순살로 시키고 맥주를 두 잔 시켰다. 나에겐 턱도 없이 부족하고, 정원이에겐 충분한 양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엔 딱 맞았다. 치맥을 먹으면서 오늘 있었던 얘기를 하다가 문득 떠올라서 말을 꺼냈다.
“원래 오늘 사진 찍기 전에 하려고 했던 건데 나중에 내 옷 보는 거나 한 번 도와줄래?”
그러자 정원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내 팔을 콕콕 찔렀다.
“이야, 강휘 모르는 척 하더니 선수였네. 벌써 다음 데이트 잡냐?”
“다음 데이트는 내일 바다로 갈 드라이빙 데이트구요. 이 사람아.”
“에이, 재미없게.”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정원이는 흥이 식은 듯 그 주제에서 멀어져서는 다시 원래의 질문에 집중했다.
“근데 옷은 왜? 너 나 옷 못 입는다고 맨날 깠잖아.”
“지금은 좀 다르겠지.”
“지금이 뭐가 다른데?”
정원이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순순히 답을 넘겼다,
“너랑 이런 거 할 때 입을 옷이 모자라서.”
“아. 음, 그러고 보니 저번이랑 똑같은 옷인가.”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내가 골라주면 니가 싫어하는 옷일 거 아니야.”
“그러게 지금은 다르다고 하잖냐. 너랑 만날 때 입을 건데 너 평소에 입었던 그런 거적데기 걸쳐 줄 거냐?”
“거적데기라니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어?”
정원이는 내 말을 곱씹어보더니 뭔가를 깨달은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때 마침 치맥이 나왔다. 정원이는 바로 맥주잔을 들고 내게 들이 밀었다.
“치느님 오셨다! 건배하자! 건배!”
“하하. 그래, 건배.”
나는 정원이가 말을 돌리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받아줬다. 이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 한 잔을 걸치는 건 너무도 편했다. 오늘 했던 무엇보다도 가장 우리다웠고, 술잔을 부딪칠 때마다 우린 즐겁게 오늘 일을 씹어댔다. 정하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고 어느새 우리는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못 다한 숙제를 마무리 할 시간이었다.
경의선 책거리는 한 번씩 지나다니던 곳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이고, 거리 자체가 신기해서 한 번씩 두리번거리며 걸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정원이는 예전까지 이 근처에서 살았는데도 처음 와본다고 했다. 우리는 천천히 길을 엉거주춤하게 걸어갔다. 얼핏 보면 수상해보일 정도로 폼이 우스웠다. 몇 발자국을 걸어가다가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폼이 그게 뭐냐!”
“너는 다른 줄 아냐?”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보고 폭소하다가 너무 웃어서 나온 눈물을 털어내고 천천히 다시 걸음을 걸었다. 채 몇 걸음을 걷지도 않았는데 네가 눈에 띄게 피곤해보였다. 카페에서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관에서 너를 옥죄던 긴장은 상정 이상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모른 척 네게 손을 건넸다.
손과 손이 허공을 몇 번 가로지르다가 손가락 끝이 톡, 톡, 톡.
걸음에 맞춰 닿았다. 마치 조심스럽게 피아노 건반을 터치하듯이 톡, 톡, 톡.
어느새 너도 그것을 눈치 채고 톡, 톡, 톡.
손끝과 손끝이 맞닿는 소리,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혔다 풀리는 모양, 그리고 손바닥과 손바닥이 마주하는 온기. 어느새 너는 내 손을 쥐고 조금 더 내게 거리감을 좁혀서, 붙어서, 내 곁에서 걷고 있었다.
어느새 새카만 가을 밤하늘을 낡은 가로등이 밝히고, 낡아빠진 경의선은 책과 별빛을 욕심쟁이처럼 혼자서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보일리가 없는 별빛 대신 우린 그저 천천히, 이 순간을 만끽하며 이제는 기차가 달리지 않는 녹슨 철로를 따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었다.
손 안에 있는 네 손은 너무나 작아서, 그리고 내게 여기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온기를 품고 있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놓치지 않도록 네 손을 쥐고 있었다. 우리는 평소와는 달리 말 한마디 없이, 그리고 서로의 얼굴도 바라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걷고 있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 맞다. 사진.”
“아, 분위기 못 맞추네, 진짜.”
정원이가 갑작스레 산통을 깨서 내가 볼멘소리를 내자 정원이가 나를 노려봤다.
“그럼 정하한테 뭐, 혼날래? 두 개짜리거든?”
“하아, 씨발. 너한테 무드를 바란 내가 문제다.”
나는 쫑알거리는 정원이를 뒤로하고 주위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커플에게 말을 걸었다. 커플에게 말을 건 이유는 그들 역시 이런 자리에서 둘만의 사진을 남기길 원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교섭이었으며, 나 역시 부탁보단 교섭에 더 능한 그런 부류였다. 이들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먼저 찍어드리죠.”
“네, 고맙습니다!”
저 쪽은 여자 쪽이 주도하는 모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를 갈았을 풍경이다. 나는 미소를 걸고 저 혼자 먼저 낡아버린 경의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연인들은 몇 가지의 포즈를 지으며 찍었고, 하나 아쉬운 것은 시간이 늦어 사진이 썩 예쁘지 않게 나왔다는 점이었다. 다행히도 저쪽에서도 그 정도는 감안한 것 같았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정원이를 데리고 손가락으로 방금 연인들이 찍은 곳을 가리켰다. 정원이는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핸드폰을 넘겨주고 자리를 맞바꿨다.
“준비되셨죠? 김치!”
김치라니 거 오랜만에 듣는 말이구만 하고 생각하고 미소를 걸려고 할 때 정원이가 양손으로 내 오른쪽 팔을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균형이 무너지고 오른쪽으로 쏠렸다.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균형을 잡으려는데 볼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말캉한, 조금은 따뜻한, 그리고 짜릿한.
“무, 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경악을 담아 너를 눈에 담자 너는 부끄러운 듯 뒤돌아서 쭈그려 앉았다. 나는 한참을 멍청하게 서있었고, 정원이는 한참을 그렇게 쭈그려 앉아 있었으며, 그건 사진을 찍어주는 여자가 둘이 너무 귀여워요! 라는 감탄사를 외치며 다가올 때까지 이어졌다. 여자가 내 손에 내 핸드폰을 쥐어주고 손을 흔들고 가는 동안 우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집에 데려다 줄게.”
“마, 마지막 미션은?”
“내가 안 돼.”
“왜?”
“아무튼 안 돼.”
나는 단호하게, 그리고 강한 의지를 담아 내뱉었다. 정원이는 내 기세에 밀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돌아가는 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정원이네 집에 도착하자 정하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러나 사진을 확인하고 나서야 간신히 납득은 해주겠다는 얼굴로 나를 돌려보냈다. 나는 정원이네 집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 앞에서 쪼그려 앉아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무른 각오와 날뛰는 감정이 얽혀 뭐가 뭔지 모를 한 잔의 칵테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품후기]쓰면서 생각이 든 건데 얘넨 왜 아직도 지들끼리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정답은 둘 다 모솔아다라 그렇습니다... 정하의 염원이 이뤄지는 날은 언제일까.
더해서 강휘ts물은 생각을 해둔 건 있는데, 음... 어째 본편을 완결내고 쓰려고 해도 'ts식 완결'이 날 것 같은 느낌이 강하네요. 쓰고 싶은 건 있는데 스토리 플롯은 또 없어서... 아, 물론 본편은 스토리 플롯이 정해져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늘도 부족한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