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회
chapter2집으로 돌아오자 오늘을 가득 채우던 행복이 어느새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찜찜함이 메우고 있었다. 정원이도 나도 서로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 어색하게 웃은 건 나뿐일지도 몰랐다. 나는 정원이에게 그 녀석의 식사 권유가 어떤 의민지 아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정작 그렇게 묻는 내 의도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이라고 하고보니 그 총무과 녀석은 내가 자기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었다. 생각할수록 짜증나는 녀석이었다. 첫 인상부터 대화를 나누고 난 이후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더 중요한 것은 정원이에 대한 생소한 감정이 재차 나를 덮쳐왔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 인류애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더 정확하게는 측은지심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정원이는 세계에 의해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을 당했으며, 그것에 대한 연민이 생겨 내가 정원이를 돕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단순히 연민만 가지고 정원이를 대한 것은 아니었다. 우정, 도의, 동경 등 많은 감정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모자랐다. 큰 오산이 있었다.
나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생소했으며, 또한 왠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을 고민하는 기분이었다. 판도라의 상자에 손대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이 감정 때문에 내가 정원이에 대한 태도를 확실하게 정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 고민을 끝내기 전까지는 무덤덤하게 정원이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 전에 정원이가 여자가 됐을 때, 나는 정원이에 대한 정의를 뒷일로 미뤘었다. 그 때의 여파가 뒤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고민을 끝까지 하면 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정원이는 정원이다. 이미 이 전제를 바탕으로 나는 정원이와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제는 정원이도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차마 이 관계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이 관계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관계에 대해 진중하게 탐구하고 고뇌함으로써 결과가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 것을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겁쟁이였다. 그리고 결국 이번에도 정원이에 대해 판단하는 것에 대해 고개를 돌렸다.
고민을 회피한 순간 나는 다른 중대사에 대해서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을 잃은 셈이었다. 조력자가 필요했다. 핸드폰을 들었다.
[나 : 술ㄱ?]
[성규 : ? 웬 일?]
[나 : ㄱ?]
[성규 : ㅋㅋ?]
[성규 : 그래]
[성규 : ㄱ]
[나 : ㅇㅋ 낼 몇 시?]
[성규 : 월욜 출근이니 5시ㄱ?]
[나 : ㅇㅋ 장소는?]
[성규 : 니가 술사니까 니 집 근처로 내가 갈게]
[나 : ㅇㅋ]
핸드폰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언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비겁하게 눈을 돌렸던가. 나는 애써 그 사실에서 고개를 돌렸다.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피하려고 귀를 막았다. 그러기위해 가장 좋은 것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도망갈 구실을 만들고 있었다.
***
성규는 옷을 참 잘 입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새끼들끼리 둘이서 술을 마시러 가는 자리임에도 그랬다. 사실 성규가 잘 차려입는다기보다 그냥 그렇게 입는 것에 익숙해서 일지도 몰랐다. 저번에 대충 입은 것이 오히려 나를 신경써준 결과물이라고 하니 오히려 그게 더 일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왔냐?”
“그래. 웬일이야? 니가 먼저 술을 다 먹자고 하고.”
“아니 저번에도 말했잖냐. 나라고 뭐 그렇게 연락 끊고 산 건 아닌데.”
“지난 한 달 동안 전화 한 통 없다가?”
성규가 사람 좋은 웃음을 비치며 말했다. 변명을 할 수야 있긴 했다.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아, 그래. 회사 들어 갔댔지? 축하한다.”
“어.”
성규가 순수하게 축하해주자 마음 한 구석이 찔렸다. 그 와중에도 정원이와는 연락을 했던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딱히 성규가 정원이보다 중하지 않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요즘 정원이와 엮이는 일이 많았으며, 정원이가 좀 더 도움이 필요한 친구였기에 더 자주 만난 것이었다. 또한 같은 회사라서 얼굴 보면서도 인사 한 번 나누지 못해 미안한 감정도 쌓였었고. 나는 성규에게 말하지도 않을 변명을 마음속에서 하고 있는 내 꼴이 우스워 한숨을 내뱉었다.
“축하한다는데 왜 한숨을 쉬고 그러냐?”
“아니, 아니다. 이런데서 서있지 말고 술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그러자.”
술집에 도착해서 메뉴판을 보는데 유난히도 과일소주가 눈에 걸렸다. 의식하기 싫어서 일부러 무시하려고 했지만 계속 눈에 밟혔다. 결국 과일소주 메뉴 중에 깔라만시 소주를 시켰다. 그러자 성규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원래 과일소주는 술에 장난치는 거 같다고 안 마시지 않았나?”
“어, 글쎄. 그랬나?”
“그랬었던 거 같은데? 아님 말고.”
성규는 관심을 끊었지만 오히려 내가 과일소주를 시켰다는 사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성규가 되려 당황했다.
“아니, 표정이 왜 그래?”
“어? 아, 아니야. 별 거 아니야.”
그러자 성규는 난처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성규는 내가 아는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사교성이 좋았다. 즉 눈치가 빠르다는 소리였다. 성규는 내가 일부러 숨기려고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모른 척해주었다.
“술 마시면 얘기하자. 그러려고 부른 거지?”
“티 났냐? 하아. 왜 난 너만 부르면 뭔가 목적이 있어서 부르는 것 같냐.”
“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이럴 때 나 부르는 거 꽤 기분 좋다니까? 그리고 사내새끼들끼리 고민 털어놓는데 맨 입도 아니고 술사는 거면 무조건 나올만하지.”
“그래, 아무튼 고맙다.”
“뭔 얘기도 털어놓기 전에 고맙대? 그리고.”
“그리고?”
어쩐지 대꾸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자 성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린아이가 장난을 치기 전에 한껏 준비를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재밌어 보이는데 안 나오곤 못 배기지.”
“뭐?”
“아, 너무 나댔나? 하하, 나도 참 참을성이 모자라서.”
성규는 능글맞은 얼굴이었다. 묘하게 거슬리는 태도였다. 기시감이 들었다. 그 때 술이 나왔다. 나는 내 몫으로 나온 깔라만시 소주를 따랐다. 성규는 생맥주를 시켰다.
밸런스가 잘 맞지 않는 술잔 두개가 부딪혔다. 원 샷을 한 깔라만시 소주는 시고 달았다. 그 두 개의 강렬한 맛이 주향을 교묘하게 숨기고 있었다. 정원이는 조심히 마셔야 될 것 같은데?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깔라만시 소주를 따라 원 샷을 했다.
“뭐야? 그렇게 맛없어?”
“아니 맛은 있는데…….”
“아. 평소에 말하던 술에 장난치는 것 같은 느낌? 그러게 왜 시켰어.”
“아니, 음. 그래. 뭐.”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애꿎은 소주만 한 잔 더 들이켰다. 새콤달콤한 맛이 내 얼굴을 쥐었다 폈다하고 있었다. 술이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세 잔이나 연달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맛이 고약했다.
“그래서. 무슨 고민이 있어서 불렀는데?”
성규는 대화에 능숙했다. 굳이 내가 먼저 말 머리를 잡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줬다. 내가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사실 고민 상담을 하려고 불러낸 자리이기도 했다.
“아니, 흠. 타 부서에서 재수 없는 새끼가 하나 있어서 말이야.”
“어.”
“좀 좆같게 굴어서.”
“좆같게?”
“아니, 뭐. 여러 가지 있는데. 뭐 내가 자기소개 하는데 지는 안하고 튄 것도 있고. 좀 거슬리는데.”
“뭐가 그렇게 거슬렸는데?”
“아니 내 앞에서 이상하게 견제구 넣잖아.”
“견제구? 뭐 요새 너 잘나갔냐?”
“아니 뭐 인사과에서 잘 봐주긴 했는데. 그건 아니고. 다른 의미에서.”
“다른 의미? 뭔 일이 있었는데?”
“아니 그 개새끼가 정원이한테 수작 부린다고 나한테 눈치주……시발.”
“아하.”
성규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규의 숙련된 맞장구와 연거푸 마신 세 잔의 소주가 불러일으킨 대참사였다. 악질인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문제의 원인이 된 술을 다시 들이키는 것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성규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둘이 언제부터 사귀었어?”
“아니, 사귄 건 아니고. 그냥 둘이 노는데. 아니 아, 시발.”
헛소리를 하는 나 자신에게 벌을 주듯이 한 잔을 더 들이켰다. 벌주는 새콤달콤한 맛이 났다.
“둘이 노는데 와서 깽판을 쳤어? 그거 아주 개새끼네. 언제부터 거슬렸는데?”
“아니, 하. 내가 회사에선 정원이랑 모른 척 하거든? 괜히 사내에서 구설수에 안 오르려고?”
“어, 그런데?”
“근데 시발. 정원이가 요새 안 좋은 소문이 좀 돈단 말이야?”
“와, 힘들겠네. 그거 신입이 견디기 좀 힘든데.”
“그치? 시발 근데 내가 그래서 정원이가 너무 힘들어보여서 힘내라고 과자 좀 넘겼더니 그 새끼가, 아.”
“뭐야, 혹시 그 새끼가 정원씨한테 포카리라도 넘기디?”
“아니 시발,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그 자리에 있었냐?”
“아니 척하면 척이지. 수작질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잖아.”
“와, 너 시발. 아니. 아…….”
나는 다시 술잔을 들었다. 정신 차리자. 성규가 음료수의 종류까지 너무 정확하게 말해서 흥분한 게 문제이리라. 하지만 성규는 절대 물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군견마냥 말꼬리를 계속 잡고 늘어졌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 새끼가 너한테 꼽이라도 주디? 정원씨한테 얼씬거리지 말라고?”
“와, 너 진짜. 너도 그랬냐?”
“아니 내가 그럴 리가 있겠니. 난 더 스무스하게 넘기지. 하하. 그건 됐고. 설마 너랑 정원씨랑 둘이서 노는데 마주쳤어?”
“아니 그러니까! 그 개새끼 눈치도 없이 거기서 꼽을 주잖아.”
“와, 그 새끼 쓰레기네.”
“그렇지? 하, 시발. 아니 뭐라고 하기도 애매하잖아. 내가 정원이랑 그런 사이도 아닌데, 괜히 회사에 소문나면 안 그래도 힘든데 더 힘들 거고.”
“정원씨가?”
“그래, 정원이가. 하아. 근데 그 정원이 그 모지리가 내 신경 쓴다고 괜히.”
“어? 정원씨가 뭐라고 했어?”
“그 새끼가 벌충이라도 하라는 듯이 정원이한테 저녁약속 잡잖아.”
“벌충? 와. 그 새끼 뭐 자기가 정원씨 남친이라도 되는 것처럼 군다?”
“아니 그러니까. 시발! 정원이 그 등신새끼도 지 걱정도 안하고 괜히 나한테 안 좋은 소리날까봐 수락했다고 하는데 하.”
“아이고, 걱정이 과했네.”
“그래. 지 걱정이나 하지, 모자란 새끼가. 하아. 지가 내 걱정은 왜 해, 하기는.”
“그래서 정원씨랑도 싸웠어?”
“아니, 싸운 건 아니고, 그냥. 어?”
나는 내가 뱉은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성규는 웃고 있었다.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무슨 말들을 내뱉었는지 깨달았다. 깔라만시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원 샷을 했다. 뒤늦게 소주의 쓴 맛이 올라왔다. 쓰고 신 맛이 단 맛을 이겨내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하.”
“어휴. 강휘야, 강휘야. 이 병신아.”
성규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상담자 같은 태도로 혀를 찼다. 그 상반되는 태도가 어울린다는 점이 더 기가 막혔다.
“강휘야. 후회하기 싫으면 정원씨한테 그 자리 나가지 말라고 해라.”
“아니, 내가 무슨.”
“니가 뭐라도.”
성규는 단지 웃음기를 빼고 내 손 위에 물 잔을 쥐어줬다. 그리고 그 안에 생수를 따랐다. 단지 그 뿐이었는데 도저히 거절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성규가 턱을 까딱거리자 조종이라도 당하는 인형마냥 물을 들이켰다.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었다. 성규가 말했다.
“니가 지금 정원씨를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확실한 게 하나 있어. 뭔 줄 알아?”
“……뭔데.”
“니가 그 자리에 정원씨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거야.”
변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성규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기해도 좋아. 너 정원씨가 잘못되면 아마 존나게 후회할거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차마 성규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겨우 폐에서부터 찌그러진 소리를 냈다.
“솔직히 가지 말라고는 못하겠고.”
“그래?”
성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말했다.
“그럼 적어도 따라가. 뭔 일 안 생기게.”
“야, 그건 좀 그런데.”
“강휘야.”
고개를 들자 성규는 평소에 짓지 않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버지께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징징거리지 말고 둘 중에 하나는 해라. 따라가든, 가지 말라고 하든.”
“……그럼 따라가는 쪽으로.”
“그래.”
성규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다시 빙긋 웃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규와 친구가 된지 어느덧 5년쯤이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은 내가 모르는 성규였다. 나는 뒷목을 잡고 뻣뻣해진 목을 주물렀다. 나는 술잔을 들어 건배 제의를 했다. 성규는 평소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하며 술잔을 나눴다.
나는 그렇게 술잔을 나누며 왠지 모를 안심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 자신도 납득해버린 방법을 마음속에 담아두고서.
[작품후기]성규의 원래 성격은 지금 나오는 모습이 가장 가깝습니다. 사회성, 말빨 만렙에 시원한 훈남. 1부때 그런 모습이 좀 덜하긴 했죠.
인류애... 요즘은 단어의 의미가 변질됐지만 원의미로 생각해주세요. 이 이상 딱 들어맞는 단어가 없어서... 부성애? 는 조금 아닌 거 같고?
하여간에 조회수가 어느덧 2만을 넘겼습니다. 추가로 오늘은 선작도 추천도 평소보다 많네요. 부족한 글을 독자님들께서 사랑해주신 덕분입니다. 더 힘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선작 추천 코멘트 날려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