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회
chapter2“뒤에는 누구야? 지나가면서 한 번씩 본 것 같은데? 낯이 익네?”
사내가 어느새 나를 보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내게 닿자 정원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우리 둘이서 함께 나란히 걷고 있는 것은 충분히 오해를 살 만 했다. 사실 오해가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좋을 것은 별로 없었다. 사내가 보기 싫은 웃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혹시 둘이 무슨 사이야?”
그 말에 이르러선 정원이는 패닉 상태가 되어 있었다. 아마 입을 열면 어버버거리기나 할 것이었다. 정원이 덕분에 나는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사이랄 게 있겠습니까. 입사 동기인데 너무 서먹하게 지낸 건 아닌가 싶어서 제가 밥이나 같이 먹자고 불렀습니다.”
“그래?”
남자는 서글서글하고 사교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했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미묘한 눈빛만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저런 눈빛을 알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대학동기들이 성규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왜 저쪽에서 저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는 좀 더 판단해야 할 문제였지만, 저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뜻 모를 불쾌함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나는 그 감정을 고이 묻어두려 노력했다. 사내가 하듯이 나도 미소를 지었다.
“예. 아마 지나가면서 봤다고 하는 것을 보니 타 부처의 선배님이십니까? 저는 인사과에서 근무 중인 한강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래? 인사과야? 하 참.”
인사과라는 사실을 알자 사내의 눈빛이 묘해졌다. 인사과와 총무과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당장 과장님이 총무과에 대해 욕하시는 것만 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들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것은 선을 조금 넘은 듯 했다. 아마 내가 신입이라고 우습게 본 것이겠지. 그러나 그 이유 뿐만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긴 말 안한다. 우리 신입한테 손 떼.”
“무슨 소리십니까?”
“무슨 소리긴. 이쪽에서 묻고 싶은데. 인사과가 총무과한테 무슨 볼 일이야?”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함이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입사 동기에게 제가 너무 소홀하게 굴었나 싶어서 친해지는 중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정원씨?”
“아, 네! 맞아요.”
정원이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입을 맞추지도 못한 상황에서 정원이쪽으로 화살이 돌아가 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쪽에 관심을 떼지 못하도록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정원씨는 정확히는 인포에 속해있지 않습니까? 총무과가 인포를 관리한다고는 해도 인포가 곧 총무과 소속인 것은 아니라고 압니다.”
인포를 관리한다. 즉 인포에 필요한 예산을 담당하는 일이나 사무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총무과가 맞으나, 인포팀이 곧 총무과 소속은 아니었다. 이건 좀 복잡한 문제였다. 중요한 건 인포팀이 독립적인 팀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점을 지적했다. 총무과의 녀석은 굳은 얼굴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정원씨와 제가 친해지든 밥을 먹든 사생활의 영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총무과 녀석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정원이도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를 표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총무과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고개를 정원이에게로 돌렸다.
“정원씨. 인사과랑 총무과랑 사이 안 좋은 건 아시죠?”
“그, 모르는데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아세요. 인사과랑 저희랑 사이 안 좋아요.”
“인사과는 인포팀에 별 감정 없습니다.”
“지금 다정원씨랑 대화하는 중인데?”
그는 나에게만 은근한 적의를 보였다. 뜻 모를 경계를 하며 나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회사 일이라는 게 적을 만들면 좋을 것이 없었고, 심지어 나는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해서 여러 과를 돌아야 했다. 총무과 역시 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최대한 껄끄러운 사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
다만 난 아버지에게도 저런 좆같은 태도를 보이는 새끼한테 맞고 다니라고 배운 적은 없었다.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선공권은 넘기겠다. 다만 그냥은 넘어가지 않으리라. 나는 팔짱을 끼고 제 놈이 하는 냥을 바라봤다. 내가 일단 입을 다물자 녀석은 정원이에게 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인사과는 저렇게 다들 싸가지가 없어요. 붙어 다녀봐야 좋은 소문이 안 날겁니다. 특히나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요새 정원씨 소문 안 좋게 돌고 있는 거 아시죠?”
“대충은 알고 있는데요.”
“그럼 더 조심하셔야죠. 저런 남자랑 붙어 다니시면 더 안 좋은 소문이 날겁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정원이는 표정을 굳히고 기분 나쁜 티를 냈다. 사무적으로 변한 말투가 그런 감정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총무과 녀석이었다.
“후, 제 실수군요.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나도 선배로써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에요. 다정원씨한테 좋을 게 없다니까요?”
정원이는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아마 뚜껑이 열리려다가 선임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참았을 것이었다. 정원이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한강휘씨랑 저는 그런 사이도 아닐 뿐더러, 제가 누구랑 친하게 되더라도 제 사생활입니다.”
“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 녀석은 정원이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정원씨 미안한데, 잠깐만 저 친구랑 둘이서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정원이가 내 눈치를 봤다. 나는 녀석에게 들키지 않게 작게 끄덕였다.
“네, 상관없습니다.”
“미안해요.”
사내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기색으로 내 어깨에 멋대로 팔을 올리고 정원이와 멀어졌다. 충분히 정원이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자 녀석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목소리를 깔았다.
“요즘 인사과는 신입이 기도 잘 펴고 다니나봐?”
“선배님들이 과분하게 잘 대해주시긴 합니다.”
“하아.”
녀석은 웃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반되는 감정이 한 동작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인사도 다정원씨 노리고 있나 본데.”
“예?”
내가 당황한 기색을 띠었지만 녀석은 눈치 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내 의도를 제 멋대로 판단한 건지 막힘없이 이어서 말했다.
“다정원씨는 내가 노리고 있으니까 손 떼라고.”
“허어.”
“이 이후로 다정원씨에게 접근하면 다정원씨뿐 만 아니라 너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하나 추가되겠지. 너도 그건 싫지 않아?”
“그걸 협박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어이없어 하며 물어보자 녀석도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얼마나 가오 상하는 말을 한 건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녀석의 도량은 손바닥 한 뼘으로도 셀만했다.
“하여간에. 손 떼라. 난 경고했다.”
“선배님이랑 사귀어도 다정원씨에게 나쁜 소문이 도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나는 속으로 녀석을 비웃었다. 내가 아니라 제 놈과 붙어 다니는 것을 회사사람들이 알게 되면 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한 소문이 나진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녀석은 인포팀을 관리하는 직책에 있었고, 정원이는 그 인포팀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떠올려보더라도 ‘인포팀 막내가 벌써부터 꼬리 흔들어서 직장생활 편하게 하려나 보더라.’ 라는 악질적인 소문이 떠올랐다.
얼핏 보기에 녀석도 딱히 대책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정원이가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그게 제 자신이 생각한 정답이라면 더욱 혐오스러운 녀석이었다. 녀석은 내가 딱히 반론하지 않자 내가 납득했다고 생각했는지 내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좋게 가자고, 좋게.”
나는 그냥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표현을 하든 내 본의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저 알아서 저가 좋게 해석을 한 모양인지 기분 좋게 정원이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녀석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강휘씨도 은근히 말이 잘 통하던데요. 하하.”
정원이는 정중하게 녀석에게 말했다. 겉으로는 예의를 차린 모습이었으나 나는 그 속에 담겨있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 정원이는 화를 내고 있었다.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가 봐도 좋겠습니까?”
“뭐, 가도 그만이긴 한데, 으음.”
그러자 녀석은 조금 난처한 듯이 정원이에게 넌지시 눈치를 줬다.
“강휘씨랑 다니는 건 다음부터 주의하시고. 이번엔 어차피 눈치 챈 것도 저 혼자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이번 일은 못 본 거로 하겠습니다.”
정원이가 기가 차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려다가 참아냈다. 그러고도 남는 숨이 다소 거칠게 흘러나왔다. 나 역시 기가 찼으나 나는 참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치를 못 챈 건지 아니면 눈치를 채고도 뻔뻔하게 구는 건지 모를 태도였다. 녀석은 정원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저랑 다음번에 식사 한 번만 하시죠.”
유치하다. 정말로 유치하다. 한 눈에 의도가 보였다. 녀석은 오늘 내가 정원이와 밥을 먹은 것에 대해 나를 견제하듯이 저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 너무 뻔한 수작이라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가 녀석이 보기라도 하면 싸움이 날 것 같아서였다.
“후. 예. 알겠습니다.”
나는 내가 고개를 돌리고 있음에 감사했다. 얼굴이 순간적으로 싸하게 굳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정원이가 왜 이런 뻔한 수작을 수락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혼란스러워 하는 동안 녀석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약속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잡도록 하죠. 하하. 다음에 봐요, 정원씨.”
어느새 녀석은 내게 신경도 쓰지 않고 정원이에게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나는 몸을 돌리고 있다가 다시 정원이를 바라봤다. 녀석이 사라지자 정원이는 똥 씹은 표정으로 길바닥에 침을 뱉었다.
“시발. 좆같은 새끼.”
나는 그 태도를 보며 조금 안심했다. 정원이 역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수락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느꼈던 감정의 폭 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왜 혼란스러워하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웠다.
“야, 강휘야. 강휘야? 강휘야!”
“어? 어. 어어.”
그래서 정원이가 말을 거는데도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정원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정신을 못 차려. 아, 너도 좆같긴 했겠구나. 괜찮아?”
“아니. 어. 뭐. 너는 괜찮냐?”
그러자 정원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쩌겠냐. 상사가 식사하자는데 까라면 까야지. 하여간에 높으신 분들은 왜 이렇게 식사를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뭐?”
나는 핀트가 조금 어긋난 것을 느꼈다. 정원이가 과연 저 수작에 대해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정원이는 말을 이었다.
“하, 시발. 저 새끼 부탁도 들어줬으니 너한테 피해 안 가겠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냐?”
그러자 정원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나야 그렇다 치고 넌 지금 완전 잘 나가고 있는데!”
“아니, 하아. 그래.”
그래. 너도 그런 녀석이었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정원이도 나름대로 나를 신경 쓴 것이리라. 나쁜 소문이 나는 자신과 나를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겠지.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쓴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순수한 호의에 먹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습관처럼 정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했다. 요즘 따라 정원이가 기특한 짓만 하면 자꾸 칭찬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해서 문제였다. 녀석이 아직 근처에 있다면 위험할 수도 있는 행위이기도 했다.
“고맙다, 그래.”
“오냐.”
정원이가 씨익 웃었다. 나는 마지못해 웃음을 얼굴에 걸었다. 썩 미덥지 못하고, 네 마음을 정확히 파악하진 못하겠지만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하겠다. 악질적인 소문에 대해 단지 열심히 해서 극복하겠다고 한 것도 너의 선택,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저 남자와 식사를 하겠다는 것도 너의 선택이었다.
나는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감정과 뜻 모를 불쾌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쾌감을 너에 대한 섣부른 불신일지도 모른다며 고개를 돌리고 무시하고 있었다. 이 선택이 이 후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쉽게 판단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그저 너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이 순간만큼은. 애써 미소를 얼굴에 걸고선.
[작품후기]음~ 대충 기승전결중에서 승이 마무리 된 느낌이네요. 정원이도 강휘도 이상한 부분에서 움찔거려서 영...
부족한 작품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