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chapter1정원이가 서울로 올라왔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정하를 따로 불렀다. 전화로 들었던 얘기를 정리해야 할 때였다. 같이 놀자는 정원이에게 잠시 정하와 둘이서 할 말이 있다고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다. 정원이는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내 어째서인지 스스로 납득하곤 우리를 보내줬다.
“오빠, 어쩔래?”
“글쎄다.”
정하의 전화를 받고나서 나는 어제 하루 종일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다. 하지만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공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엔 나는 새삼스럽지만 너무도 감성적인 인간이었다. 감정에 좌지우지 되고 있었다.
정하랑 나는 서로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서로의 음울한 시선이 어딘가에서 얽히고 묶인다. 어느 쪽도 정답은 없었다. 그냥 자신이 내린 판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판단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정원이에게 모두 다 말해주자.”
“뭐? 오빠 미쳤어?”
정하가 나를 보며 소리를 높였다가 제 풀에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이 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카페의 분위기 자체가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른 장소이기도 했다.
“정원이한테 일어난 일이야. 정원이는 알아야해.”
“그래도…….”
정하는 망설이는 듯 했다. 사실 정하가 그 시점에서 정원이에게 얘기하지 않은 것은 결국 정원이에게 그 사실을 숨기겠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것 역시 내릴 수 있는 판단 중 하나였다. 정원이를 상처주지 않으려는 상냥한 마음에서 나온 판단이겠지.
반면 나의 판단은 가시밭길이며 정원이를 상처 줄수도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정원이는 이 길을 걸어 나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정원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막연하게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정원이라면 들을 수 있어. 괜찮을 거야.”
정하는 내 말을 듣고 한참을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도 다정원이랑 똑같아.”
“뭐가?”
정하의 시선이 한쪽으로 흐른다. 그 시선에 담겨 있는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적어도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다정원은 자기를 오빠라고 부르래. 근데 다정원은 이제 언니야. 다정원은 여자애라고 이제.”
“……나도 알고 있어.”
“아니, 오빠는 몰라.”
왁자지껄한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마치 재판의 선고를 내리듯이 정하는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오빠도 다정원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
우리의 이야기는 평행선이었다. 마치 수학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공식처럼 보였다. 아무리 무한으로 가더라도 결국 두 선은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평행선이었다. 우리의 의견이었다.
우리는 서로 정원이에게 이 일을 말해야 할 이유를,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평행선에서 결국 양보를 한 것은 정하였다.
“좋아, 대신 오빠가 얘기해.”
“뭐?”
정하가 나를 싸늘하게 째려보면서 말했다. 날선 시선에 움찔하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난 마지막까지 말하지 말자고 했어. 말하고 싶으면 오빠가 얘기해.”
맞는 말이었다. 상황에 맞는 말이면서 동시에 쳐맞는 말처럼 느껴졌다. 이것을 밝히려면 내가 정원이를 신경 써서 정하에게 연락을 했다는 점을 말해야 했고, 그리고 나서야 정하가 본 광경을 말해줘야 했고, 그리고 그걸 들은 정원이의 반응에 맞춰서 반응을 해줘야 했고, 또, 어…….
“도와주십시오, 누님!”
“아, 됐어!”
“제발, 제발! 이 아우가 부탁드립니다. 제발!”
정하는 아예 고개를 돌리고 내 말을 씹고 있었다. 이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여자의 빡침이란 말인가. 오빠 내가 왜 화를 내는지 몰라? 남자에게 이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화를 풀 수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아! 성규! 나 성규랑 약속 잡았어!”
“아, 뭐. 어쩌라고!”
정하가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삐지고 나서 처음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을 서둘러서 이었다.
“아니 성규가 너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만난다고 했는데, 또 어, 나랑 다정원이랑도 같이 보면 더블데이트를 한다고 그랬는데, 어…….”
“뭐? 더블데이트?”
정하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었다. 화가 나있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결국 조금 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종전엔 지금까지 화난 구석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의 빈자리에 점점 기쁜 기색이 들어차고 있었다. 나는 이 변화에 대해서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전해야 할 말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정하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 다정원한테 말할 때 나도 도와줄게.”
“어, 고맙다.”
“대신 더블데이트는 최대한 오빠도 도와줘야 돼.”
“뭔 소리야?”
“뭔 소리긴 뭔 소리야.”
정하가 선고했다.
“최대한 데이트 분위기 나게 차려입고 다정원 에스코트해.”
“뭐?”
본 법정은 피고 한강휘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땅
땅
땅
***
더블데이트 건으로 정하의 기분이 풀리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딱히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원이에게 좋지 않은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정원이의 집에 돌아갈 때 우리는 다시 축 쳐진 분위기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 왔냐? 어, 정하 넌 왜 돌아왔냐.”
“너한테 할 말 있어서.”
“그러냐.”
정원이는 나를 보며 반기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정하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정하가 조금 혼낸다고 하더니 한참을 잔소리를 한 모양이었다. 정원이는 내 팔을 잡고 나를 끌었다. 내가 못 이기듯이 끌려가자 나를 올려다봤다. 정하 좀 니가 어떻게 해봐. 하지만 오늘 나는 정하의 편이었다. 나도 못해. 눈빛을 나누자 정원이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자리를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내가 뭐 좀 만들게.”
“냉장고에 뭐 없을 텐데.”
“뭐라도 있겠지.”
냉장고를 열어보니 진짜 뭐가 별로 없었다. 마늘에, 마늘말고……. 없어도 너무 없었다. 별 수 없이 나는 핸드폰으로 치킨을 시켰다.
“무슨 냉장고에 마늘 두 편 말고 아무것도 없냐.”
“아, 맞다. 시발!”
정원이는 허겁지겁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보니까 반찬통이 가방 안에 들어있었다. 정원이는 그것을 옮겨서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정하가 그것을 보더니 소리 질렀다.
“야, 다정원! 이 화상아!”
정원이는 허둥지둥거리며 냉장고에 반찬들을 넣고는 조금 침울해졌다.
“오랜만에 엄마가 만든 반찬인데, 안 상했겠지.”
“엄마?”
묘한 기시감과 함께 정원이가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자 정원이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엄마가 엄마라고 부르래. 정하보다 어려보이는 딸이 어머니 부르는 거 적응 안 된다고.”
“아 그러냐.”
정원이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러고 보니 반찬이 있었다면야 치킨을 괜히 시켰나 싶었지만 이미 시킨 건 어쩔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자 곧 치킨이 왔다. 내가 치킨 두 마리를 받아들자 정원이가 상을 폈다. 나는 그 상 위에 치킨을 올려놨다.
“그러고 보니 다정원…….”
“아 오빠라고 부르라고.”
“굳이 부르면 언니겠지, 이 화상아.”
정하와 정원이가 투닥이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몰라서 정원이의 눈치를 봤지만 이미 친가에서 몇 번 들어서였는지 정원이도 별 다른 티를 내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언제 운을 뗄지에 대해서 고민했지만 어차피 치킨을 영접하기 전에 듣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주제였다.
결국 치킨이 왔고 내가 둘을 바라보자 둘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쩜 저런 것만 닮았을까? 나는 결국 내 카드로 긁고 치킨을 상에 내려놨다.
“자, 하늘같은 치느님께 기도드립시다.”
“치멘.”
“다리멘.”
“아, 두 마리니까 다리 네 개다.”
“아.” “오.” “아.”
선 넘지 마라. 내가 계산했다 이 년들아.
[작품후기]정하의 '여자아이 발언'에 대해선 고민을 좀 해봤습니다. 코멘트 주신 분 말도 이해가 됐거든요. 다정원의 외양 설정을 잘 쳐줘봐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로 설정을 해서 제 안에서 정원이가 여자아이로 인식이 돼서 그런 모양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정하가 느끼기에 다정원의 여성으로써의 성관념이 모자란 점, 동시에 원래 나이는 29살 먹은 아저씨라는 걸 생각해서 '여자애'라고 수정을 했습니다.
여자애 역시 여자아이와 같은 뜻이지만 한국에선 여자를 구어체로 사용할 때 좀 더 사용하는 느낌이 있거든요. 여자아이와 여성 사이에서 어느 쪽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는 단어란 생각이 개인적으론 들어서... 하여간에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