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2. 시작을 알리는 소리
둥. 둥. 둥.
웅장한 북소리가 카이로스 도성 성문 바로 앞, 넓고 광활한 대지에 울려 퍼졌다. 수십 만의 카이로스 병사들이 집결한 그곳에는 이미 결연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로엘은 그곳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었다.
둥. 둥. 둥.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맞춰진 그 북소리에 그녀의 심장도 힘차게 뛰었다.
방금 전, 그와 함께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는 몰랐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였다는 것을. 이렇게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질 줄은.
그리고, 그에게까지 걸어가는 이 길이 이리도 길었음을.
둥. 둥. 둥.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였건만 웅성대는 소리 하나가 없었다. 아니 숨소리 한 번을 듣지 못했다. 하나같이 절도 있는 자세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한 몸같이 대기했다. 그 수많은 눈들을 지나쳐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이곳, 가장 높은 곳. 가장 빛나는 제단 위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에게로 걸어갔다.
정오의 태양이 겨울을 잊게 만들 만큼 강하게 내리쬐고, 그 아래 황금으로 뒤덮인 거대한 의자 위에 그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신과 같았다.
얇은 베일로 머리를 가리고 있어, 제대로 그를 올려다볼 수 없었지만 로엘은 그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높이 있어도, 그리고 아무리 빛나고 있어도 선명히 보였다.
아름다운 나의 사람. 나의 폐하.
이 터질 듯한 심장은 오로지 그를 위해 뛰는 듯하다.
그렇게 그녀는 드디어 그 앞에 다다랐다.
“카이로스의 프란시아, 로엘 네아레스. 카이로스의 태양, 카이로스의 심장, 카이로스의 모든 것인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폐하를 뵙습니다.”
준비된,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전하며 그녀는 기꺼이 그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그 긴 거리를 걸어오는 동안 단 한 번을 흔들리게 하지 않았던 그의 검을 그 앞에 내밀었다.
“승리의 여신, 프란시아로서 말씀을 전합니다.”
베일 따위로 가려지지 않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 언제나처럼 그녀는 그 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그를 담았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이 역사에 남을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여유롭다. 여전히 차분하고 여전히 평온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이질적이라 로엘은 그만이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따라 그가 더 멀고 더 높게만 보인다.
그래서 이리도, 심장이 뛰는 걸까.
“폐하의 걸음걸음마다 영광이 깃들기를. 승리의 신이 언제나 함께하시기를. 그 모든 축복이 오로지 폐하만을 향하기를.”
엄청난 전쟁이 시작될 거다. 많은 이들의 피가 초원을 물들이고, 많은 생명이 사그라들겠지.
그 한가운데 그는 홀로 서 있을 거다.
모든 부담과 모든 비난과 모든 원망을 한 몸에 받으면서.
처음, 열다섯의 나이에 선봉에 섰던 것처럼.
그렇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홀로 그 힘들고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지.
로엘은 그 예고된 고난이 너무도 뻔해, 목소리가 떨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멋대로 말을 멈추고 손에 들린 이 검을 거두어들이고 싶었다.
“태양이 지지 않는 위대한 제국, 카이로스의 황제시여.”
하지만, 그러지 못하겠지. 그리할 수 없겠지.
그녀가 그리한다고 한들, 그의 운명이 바뀌지 않을 테니까.
그의 위치가, 그의 숙명이 조금도 변화하지 않을 테니까.
“프란시아의 이름으로, 폐하께 승리의 축복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선택은 그와 함께하는 것.
“폐하. 천하를 누리소서.”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그 넓은 곳을 가득 메웠다.
고개를 조아리고 검을 진상하는 그녀의 모습에 지금까지 계속 무표정이었던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베일을 쓴 그녀의 모습이 이 와중에도 그녀와의 첫날밤을 떠올리게 했다.
‘태양의 주군. 신의 선택을 받은 위대한 카이로스의 황제시여. 제가 당신께 북방의 수호자, 조국 토르티아를 바치겠나이다.’
그때의 그 당돌한 여인이 기어코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놀랍다면 놀라운 것이고 기특하다면 기특한 것이겠지. 에단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신의 품에 안고 싶은 그 마음을 억누른 채, 자신을 위해 축복을 내려 주는 이 아름다운 여신의 검을 잡았다.
그러고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그 빛나는 황금의 검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프란시아의 축복과 함께한다.”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넓은 울림통에서부터 오는 그 낮은 목소리가 그 많은 사람들의 귀를 울렸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오로지 그 하나를 믿고 이 자리에 모인 터.
그들은 기꺼이, 태양의 빛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자신의 주군, 황금의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카이로스는 천하를 누린다.”
우레 같은 함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오고, 그 어마어마한 소리는 카이로스의 도성을 흔들었다. 저 한마디, 저 한 장면을 위해 이 긴 시간을 기다렸다.
자. 드디어 카이로스가 토르티아로 향한다.
그토록 염원하던 북으로, 그들이 간다.
***
“선봉이 로엘이라.”
데릭은 작은 실소를 뱉었다. 이 역시 데릭의 예상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이반을 선봉에 세울 거라는 것은 지금까지 에단 황제의 이반 황자에 대한 총애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심지어 그는 이미 한번 그 많은 북방의 사람들 앞에서 그가 누구인지 증명하지 않았는가.
어디 제이드 네아레스를 기억하는 이가 한둘일까. 그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근 몇 년간을 보지 못한 그 검을 쓰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로엘이라.”
그런 이반에 더해서 제이드의 딸이, 그들의 공주께서 등판하신단 거다.
당당히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황금의 깃발 아래에 서는 그 모습을 본다면 그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그들의 공주였건만. 그들이 자랑하던 승리의 여신이었건만.
이제는 다른 이를 위해, 그들의 패배를 위해 검을 드는 거다.
그 놓쳐 버린 것들에 대한 후회가, 자신들이 해 온 짓들에 대한 죄책감이 그들을 무릎 꿇게 할지도 모른다.
“정말 끝까지 써먹는군.”
데릭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에단 황제는 로엘이라는 존재 가치를 하나도 빠짐없이 이용하는 셈이다.
토르티아의 공주라는 지위로서.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이라는 명성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여자로서까지 말이다.
정확히, 데릭이 원했던 일이다. 정확히 데릭이 로엘을 보며 꿈꿨던 일이다.
“폐하.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생각에 잠긴 데릭을 버리가 불렀다. 그제야 데릭은 허공에 두었던 시선을 다시금 눈앞에 펼쳐진, 테바로스의 군대로 향했다.
얼마 전의 패배의 잔상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도, 여전히 테바로스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깟 아픔 따위, 단번에 잊어버렸다는 듯 빛나는 그 눈들이, 오로지 데릭만을 바라본다는 그 믿음들이 데릭을 기쁘게 했다.
이보다 몇 배에 달하는 군대가 지금쯤 카이로스에서 출정식을 하고 있을 거다.
오로지 군사뿐인 그들과 달리, 그 거대한 황금의 제국은 출정식마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하겠지.
그런 것 따위에 기죽을, 테바로스가 아니다.
“테바로스는 들으라.”
군대의 맨 앞 군사들보다 조금 높은 제단에 오른 그는 테바로스의 군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테바로스의 성을 둘러싼 거대한 북방의 나무들이 만들어 주는 돔이 그의 목소리를 저 멀리, 가장 뒷줄에 서 있는 마지막의 군사에게까지 닿게 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 자신과 확신에 찬 그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테바로스의 모두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자신감이 테바로스를 하나로 뭉치게 하였고, 그 한마음이 역사상 가장 부강한 테바로스를 만들어 가고 있다.
언제나 토르티아에게 뒤처져 온 삶들. 척박한 환경에 가진 것 없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도 남들보다 더 못했던 나날들.
그 테바로스의 비참한 역사를, 지금 눈앞에 있는 젊은 황제가 하나씩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오랜 원정으로 모두가 지친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에겐 쉴 시간이 없다. 테바로스는 이미 많이 뒤처졌고, 적들은 벌써 많이 나아갔으니 어떻게 우리에게 휴식이 허락되겠는가.”
그 역사의 순간을 함께한다는 영광. 그 역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가는 기쁨.
지금의 테바로스를 움직이는 힘이자, 앞으로의 테바로스를 이끌 힘이다.
데릭은 바로 그 힘을 끌어내기 위해, 처음부터 구심점이 되고자 했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 안주하였기에, 나아가기 바쁘다. 그 나아감의 맨 앞에 내가 서리라. 죽어도 내가 먼저 죽고, 살아도 내가 가장 나중으로 살리라. 그러니 따르라. 테바로스여!“
그가 바랐던 것은 나라의 부강. 백성의 행복이라든지, 안위라든지 그런 감상에 젖은 것들을 바란 적은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그저 나라가 부강해지면 자연히 딸려 오는 부수적인 것들일 뿐.
뼛속까지 황족인 그에게 백성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도 위선이이게 그는 그러한 위선과 가식을 떨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든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테바로스는 강해지고 있고, 그들의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니 이 많은 군사들이 기꺼이 데릭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거다.
“데릭 폐하를 받듭니다. 테바로스를 위해! 황제 폐하를 위해!”
수만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고, 예를 표하는 테바로스의 검집 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데릭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신의 군대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패배 따윈 없다는, 승리의 신이 함께한다는 카이로스의 황금의 군대 따위 두렵지 않다.
테바로스는 테바로스의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면 그만.
이번 전쟁 역시, 다를 것 없다.
“가자. 우리의 영광을 위해.”
우뢰와 같은 어마어마한 함성 소리가 테바로스에 울려 퍼졌다.
데릭의 자신에 찬 미소와 함께.
***
카이로스에서의 출정식을 끝내자마자, 이반은 바로 카이로스 국경 의 끝, 에토르로 달려왔다. 처음부터 전쟁의 가장 최전선을 맡고 있었기에, 그의 선발은 당연한 거였다.
무엇보다도 에토르를 비롯한 시엘 전역까지 국경은, 이반의 사람이 있는 이반의 구역.
항상 국경을 담당하고 있는 그들은 황군과는 성격이 다른, 별개의 군대였다.
“역시나 완벽하네요. 우리는.”
“한두 번 해 봤어야지. 수도 없이 준비해 온 일이라고.”
이반과 콜린은 에토르의 망루에 올라와 이미 출정 준비를 마친 군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장 험난한 곳에서, 외로이 국경을 지키는 그들에겐 그들만의 유대가 있었다. 가장 좋은 곳에서, 가장 주목받는 프래카를 보는 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아주 가끔은 꽤나 배가 아팠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의 공을 에단 황제가 알아주어, 남들보다 좋은 대우를 해 준다는 것 정도라 해야 하나.
아마 그마저도 없었다면, 정말 많이 서러웠을 터다.
“우리에겐, 기다림의 시간이었죠.”
그래서 더더욱 그들은 서로가 필요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자부심. 그 희생을 함께해 주는 고마움.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가장 잘 알아주는, 그들의 빛 못 보는 대단한 주군 이반.
북방을 정벌하는 이번 원정은 그들의 그러한 한을 풀어주는, 그들이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다.
콜린은 자신과 같은 마음인, 그들의 군대를 내려 보며 말했다.
“에토르 전쟁 때 처음으로 저희가 빛을 보았습니다. 프래카와 황군이 합류하여 함께 싸웠어도 저희가 가장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으니, 당연한 거야.”
“네. 맞아요. 그 당연함 때문에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어요. 심지어 루카스 장군마저.”
“루카스는 그때도 뭐라 뭐라 하던데.”
이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콜린도, 밑에서 있는 군대들도 그러하며 다들 지나치게 눈을 반짝였다.
너무도 결연히 의지를 다지고 있어서, 오히려 자신이 너무 풀어져 있나 하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 마음이 무엇인지는 이반이 가장 잘 알았다.
언제나 맨 앞이 아닌 뒤에 서야 하는 억울함. 빛 같은 존재들 뒤에서 묵묵히 그림자가 되어야만 하는 그 서러움.
어떻게 이반이 모를까. 그는 평생을 그리 살아왔는데.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우리는 오랜 시간을 준비해 왔어. 크고 작은 국경의 전투들을 묵묵히 버텨 오며. 그 혼란과 위험들 속에서 이 나라를 지켜온 건, 분명 우리야.”
그래서 이번만큼은 이반도 자신을 바라보는 저들의 기대에 부응해 보려 한다.
이반이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닌 빛이 된다는 것은, 그들 역시 그림자에서 벗어나 빛이 된다는 거다.
이렇게도 성실히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이들인데, 한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림자라고 해서 언제나 그림자 역할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게.”
순간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던 주먹에서 다시금 힘이 풀렸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래도 언제나 반가운 목소리.
어느새 망루에 올라온 로엘이 옅은 미소와 함께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나라를 지키고 있었던 분들은 여기 계셨네.”
높게 묶은 붉은 머리. 그녀의 몸에 비해 살짝 큰 듯한 갑옷. 가는 팔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운 검까지.
완벽히, 전장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계신 그녀에게 콜린은 기꺼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저분의 존재 가치를, 특히나 이번 전쟁에서의 의의를 너무도 잘 알기에 저절로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프란시아님을 뵙습니다.”
출정식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가히 여신과도 같았다. 철저히 연출된 각본 속에서 완벽히 연기를 하셨으니 일반 백성의 눈에 그분이 어찌 보일까.
감사하게도 날씨마저 완벽히 도와주어, 그녀가 에단에게 축복을 내릴 때는 정말 천사라도 강림한 듯 햇빛이 내리쬐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콜린마저 그 모습에, 진짜 그녀가 여신이라도 된 듯냥 심장이 뛰었다.
토르티아의 승리의 공주님이라던 그 말이 이젠 이해가 간다고 해야 하나.
이분과 함께하면 승리하리라는 묘한, 근거 없는 확신이 샘솟아 뒤늦게 작은 실소를 뱉었다.
그녀를 매일같이 봐 왔던 자신마저 이러니, 그녀의 얼굴 한 번을 제대로 못 보는 백성들은 어떠할지 눈에 훤하였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계산한 에단 황제는 도대체 어디까지 미리 내다보았단 말인가.
어쩌면, 토르티아에서 그녀를 데려올 때부터, 그분은 그녀를 이리 사용하리라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랬을 거다.
처음부터 북방정벌은 계획되어 있었던 거고, 그 북방정벌을 위한 상징을 내세우기에 그녀만큼 좋은 패는 없을 테니.
물론,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리, 갑옷을 입고 검을 차고 그의 옆에 서리라는 것까지도.
“생각보다 빨리 왔네.”
“응. 이미 지나쳐 오는 영주들에게 미리 언질을 해 놨고, 프래카의 이동 속도야 알아주니까.”
“폐하는?”
“곧 오실 거 같아. 나도 중간에 갈라져서 움직인 터라.”
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로엘을 선봉에 세운다고 하였을 때 이반은 에단이 막연히 그녀를 곁에 둘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항시 그녀를 곁에서 지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에단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떨어트려 놓았다.
“선봉장은 처음 아닌가.”
“처음이지.”
“그러는 것치고 지나치게 자연스러운데요, 마마.”
“지금 상당히 놀리시는 거 같은데요, 황자님.”
이반을 슬쩍 흘리는 로엘에게 이반은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음 같아서야, 아마 성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도 않을 귀한 사람. 그건 이반에게도, 그리고 에단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그녀를 전장에 내보내면서 에단의 마음이 어떨지 말해 뭐 할까. 그러함에도 그가 그녀를 떼어 놓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놀리는 거 아니야. 진짜 너무 자연스러워 그래.”
“그게 내 능력인가. 프란시아라는 지위가 알아서 그렇게 만드는 거지.”
그와 함께라면, 그녀는 그저 에단 황제 옆의 여인일 뿐이다. 그녀가 프란시아든 아니든.
그저 그런 인형 노릇 시키려고 이 위험한 곳에 그녀를 데려고 온 게 아니다. 그건 원로회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공식적인 선봉장으로 세운 의미를 몰각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그녀에게 단독 부대를 맡긴 거다. 그저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명목뿐인 공주님이 아니도록.
이 전장을 이끌 한 명의 주체로서, 승리의 영광을 받을 주역으로서. 그렇게 당당히 프란시아가 되도록.
그렇게 칼라리엔에 오르도록.
“프란시아가 너여서 그런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너. 로엘 네아레스라서 기꺼이 충성을 바치는 거라고.”
이반은 정확히 로엘의 눈을 보며 말했다. 빈말이 아닌, 진심 가득한 그의 말에 로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반의 말처럼 그들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그녀 역시 그 마음에 걸맞는 마음을 가져야 하므로.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므로.
“열심히 하란 소리네.”
“맞아. 이 나라 사람의 하나로서 부탁드리는 거야.”
“네. 황자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물론, 황자님도 그리하셔야겠지만요.”
서로를 보는 두 사람의 눈엔 습관 같은 신뢰가 담겼다.
나를 믿어 주는 상대에 대한 믿음.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오랜 시간을 보아 왔기에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이반과 로엘 사이에는 바로 그런 믿음이 있다.
어느 순간은 사랑이었고, 어느 순간은 우애였을, 우정이었을 바로 그 감정.
무어라 정의를 내리건, 중요한 건 이 믿음은 절대 어느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거란 사실이다.
“물론입니다. 저도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황자로서, 그리고 어느 누군에게는 한 명의 주군으로서.
이미 데릭의 군대가 첫 전투를 시작했고, 바로 승전보를 울렸다는 소식이 어제 새벽에 들려왔다.
출정식을 한 지 만 이틀 만에 들려온, 테바로스의 승전보는 확실히 카이로스 사람들을 바짝 긴장하게 할 만큼 빠른 소식이었다
결코 만만히 풀리지 않을 전쟁이 되리라는 것.
단순히 토르티아의 문제만이 아닌, 동맹의 명목하에 속을 알 수 없는 이와 경쟁한다는 부담까지 함께한다는 것.
데릭의 행보는 모두에게, 그 사실을 너무도 명확히 확실하게 알린 셈이다.
에단과 로엘은 각자의 이동 중에, 이반은 에토르의 성에서 그 소식을 접했다.
“이번 전쟁. 황자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아요.”
그건 모두를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확실한 선전포고였다.
“그만큼 많은 기대가, 많은 눈들이 황자님에게로 쏠리겠죠.”
그 선전포고를 받은 것은 비단 에단만이 아니다. 명백히 이 전쟁의 선봉장이자 책임자인 이반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데릭의 승전보에 대응할 첫 이는, 당연히 가장 먼저 카이로스에서 출발한 이반의 몫.
“저는 황자님께서 그 부담을 잘 헤쳐 나가시리라 믿습니다.”
그 몫을 훌륭히 잘 해내 주리라는 것. 그렇게 이반 카이로스라는 자를 모두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
그렇게 이반은 멋지게 해내리라는 그 믿음은, 에단의 마음이자, 콜린의 마음이자, 여기 눈앞에 있는 모든 이반의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림자로 사실 이유가 없으신 분. 그림자로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그들의 주군.
빛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그 마음은 사심 한 점 없는 진심.
“저는 언제나, 늘 그렇듯, 황자님 편입니다.”
그 진심이 닿아 이반의 마음에 따뜻함이 전해졌다.
습관처럼 또다시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다치지 마세요, 마마.”
그녀 역시 그 손길에 미소 지었다.
“황자님도요.”
그를 믿어 준다는 이 눈과 이 미소가 있는데,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멀리, 황제폐하의 군대가 들어온다는 소리가 에토르의 성을 올렸다.
저 먼 거리, 에단을 상징하는 황금의 깃발 수백 개가 흩날리며, 그가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명확히 구별되는 빛나는 사람.
자연히, 이반과 로엘의 눈이, 두 사람이 너무도 사랑하는 그에게로 향했다.
오직 저 한 사람을 믿고, 이 많은 사람이 모여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하려는 거다.
“카이로스를 위해.”
“에단 폐하를 위해.”
에단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미소가 점점 더 닮아 갔다.
카이로스의 깃발이 푸르른 하늘 아래, 빛나는 태양을 받으며 에토르 평원을 가득 메워 갔다.
***
에단의 군대까지 모두 에토르에 당도했다.
카이로스 수도에서부터 이미 셋으로 나뉘어 있던 부대들은 각자, 가장 맞는 길을 택해 최단 시간으로 에토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애초에 워낙 많은 인원의 부대라 한 번에 움직이는 것 자체가 비효율 적이었으며, 각자의 병종에 따라서도 적합한 경로는 따로 있었다.
애초에 국경에 주 부대를 가지고 있던 이반은 자신이 데려온 소수부대를 데리고 제일 먼저 출발하였으며, 기마병을 담당한 로엘이 그다음으로 말들이 달리기 쉬운 초원길을 택하였고, 가장 많은 보병을 꾸린 황군은 제일 짧은 길이자 제일 잘 정비된 정식 루트를 택해서 움직였다.
“이 많은 인원이 그 긴 거리를 이리 단숨에 이동하다니. 역시 대단하네. 카이로스 군대는.”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둠이 찾아왔건만, 어찌나 불들을 여기저기 많이 켜 놓았는지 전초지가 대낮처럼 밝았다. 전쟁의 긴장감에 다들 군기가 바짝 들어 있지만, 아직은 제대로 실감이 안 나는 듯, 다들 그저 바뀐 장소에 조금은 들떠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 있으면서도 지휘관들이 일일이 자신의 부대들을 점검하는 것을 로엘은 에로트의 가장 높은 성벽에 올라 지켜보고 있었다.
“멍청해 보여도, 대장군은 대장군이야.”
그런 로엘의 뒤로부터 너무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소리 소문 없이 올라왔는지 어느새 에단이 그녀의 뒤에 있었다. 이젠 놀라지도 않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로엘은 턱을 괸 채로 살짝 고개만 틀고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그럼 모를까.”
에단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아 좀 더 자신의 곁으로 당겼다. 출정식에서 그리 눈을 마주하고, 처음 제대로 대화를 하는 거였다. 워낙 출정식 때는 해야 할 일도 많았고 사람도 많아 둘만 있을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선봉으로 먼저 출발할 때도 제대로 그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근 일주일 만의 상봉인 거다.
“내가 루카스 장군을 보고 있는 건 또 어찌 알았대.”
“그 또한 내가 모를까.”
에단은 피식 웃었다. 앞으로 이리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의 없을 거란 걸 에단과 로엘,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다. 전쟁을 시작한 지 고작 일주일이 되었는데 그 일주일만으로도 아주 톡톡히 느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둘만의 시간이 소중했다.
“루카스 장군을 멍청하다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어요. 어떻게 멍청한 사람이 이 대단한 부대의 수장이 되었겠어.”
“멍청한 건 사실이야. 수장이 될 만큼 대단한 것도 사실이고.”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한 가지만 해 줄래요?”
“칭찬도, 욕도 둘 다 사실이야.”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무도 진심이라 이번엔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 또한 전부 애정임을 잘 알아 로엘은 조금 부럽기도 했다. 루카스에 대한 에단의 신뢰는 루카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바로 드러났다. 에단이 이반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신뢰.
절대 그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그의 명령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해내리라는.
그 실력과 그 충성에 대한 믿음.
에단은 루카스에게 그런 믿음이 있다.
“지난번 에토르 전쟁 때도 느꼈지만, 루카스 장군은 눈빛부터가 달라져요. 검을 잡을 때. 그리고 전쟁에 임할 때.”
루카스는 순수하게 즐기고 있다. 검을 잡는 것도. 전쟁에 나서는 것도. 조금 더 나아가자면 적을 베고 생명을 거두는 바로 그 일까지도.
에단의 말에 충성하는 것. 에단의 명령을 듣는 것. 어쩌면 그 자체도 즐기고 있는지 모르지. 그래서 로엘은 처음 루카스가 조금 두려웠다.
황금의 황제가 데리고 다니는 지옥의 개, 루카스 세버.
물어뜯지 못하는 이가 없고, 물어뜯어 죽이지 못하는 이가 없다는 잔혹한 에단 황제의 칼.
그 맹목적인 충성이 지나쳐 어쩌면 에단에게 피가 튈 수도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로엘이 너무도 ‘바깥 사람’의 시선에서 루카스를 보았을 때 이야기다.
“루카스 장군은 진중해요. 절대 즉흥적이도, 감정적이지도 않지요.”
검을 휘두르는 그는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가장 적합하게, 철저히 계산된 움직임. 본능과 감정으로 만들어진 그런 실력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신의 사람들을 귀히 여겨요.”
그는 항상 최전방에서도 가장 선두에 선다. 가장 먼저 검을 빼 드는 선봉장.
자기가 좋아서, 순순히 즐겨서 그러한 것도 있겠지만, 그는 분명 그런 식으로 자기의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에토르의 피해에 분개했고, 테바로스의 동맹을 여전히 탐탁지 않아 했다.
로엘은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부대 하나하나를 챙기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루카스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역시나 부러운 일이다. 저런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은.
“그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당신에 대해서.”
로엘은 슬쩍, 자신처럼 루카스를 내려다보는 에단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에단은 이 와중에도 부하 장수의 투구를 가지고 장난치는 그를 한심스럽게 내려다보았지만, 그 심드렁한 눈길 속에는 분명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로엘은 이런 두 사람이 관계가 참 좋았다. 낯간지런 충성 맹세도, 뻔한 신뢰의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을 아는 바로 그러한 관계.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 아닌가.
“루카스는 당신의 명령을 고민하지 않아도. 당신의 의중을 알아내려 들지 않아요. 들은 그대로 믿고, 따릅니다. 그저 당신이라서.”
그는 너무도 위대한 주군,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라서.
“알아.”
에단은 덤덤히 답했다. 여전히, 그의 눈은 루카스를, 이제는 루카스에게 잔소리하러 나오는 아론까지 함께 바라보며.
“알고 있어.”
그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지는.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거 같아, 로엘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특별히 그에게 부담을 준다든가, 새롭게 상기시킨다든가 하려는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루카스를 보고 있자니, 그렇게 아론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 이들에게 대해 말해 주고 싶었다. 제삼자의 눈으로 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당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하여.
로엘은 살짝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또한 저도 알고 있지요.”
그러자 그는 손을 올려 그런 로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부드럽게 잡아 내리는 감촉이 제법 기분 좋았다.
“그래서 부럽다는 소리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꽤나 진심인 그녀의 말에 에단은 웃고 말았다.
밤이라 좀 더 소리가 울리는 탓도 있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는 탓도 있어 이 밤중에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꽤 높은 두 사람의 망루에까지 들려왔다. 카이로스의 도성의 마을 하나를 고스란히 가져다 놓은 듯한 시끌벅적함이 조금은 이질적이라 로엘은 그들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런 로엘의 머릿속에 지나치게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오가는 게 보며, 에단은 그녀를 살짝 들어 안쪽 성벽에 앉게 만들었다.
“위험해요.”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제야 겨우 그녀의 눈이 제대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리 둘만 갖는 시간이, 이 전쟁통 속에서 얼마나 귀한 것인데. 더 이상 다른 이들을 보는 데에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나랑 있는데.”
그런 그의 마음을, 조금은 유치하고, 많이 귀여운 그 질투를 한 박자 늦게 알아채고선, 로엘은 예쁘게 미소 지었다. 질투도 많은 우리 낭군님. 또 풀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로엘은 자연히 자신을 두 팔로 가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게요. 이리 아름다운 사람을 두고 내가 어딜 보는 걸까나.”
장난스러운 그녀의 말이 이번에는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의 품안에 이리 쏙 들어오는, 작고 여린 그의 여인인데 이리 갑옷을 입고 검을 찬 채로 자신의 앞에 있는 모습이 아직은 많이 낯설었다. 아니, 낯설다기보다 불편했다.
“오는 데는 별일 없었나요?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그건 내가 물어야지.”
“당신이 더 늦게 왔다구요. 나는 별일 없었고. 당연히.”
혹여 어디라도 다칠까 봐, 혹여 어디라도 상할까 봐 불안하고 걱정이 되어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이럴 거면 그녀가 아무리 데려가 달라고 하여도. 그녀가 아무리 이 전쟁에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데려오지 않는 건데 하는 이미 늦어 버린 후회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올라왔다.
그런데도 그는 그를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번 전쟁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도야.”
그를 바라보는 눈에 가득한 걱정이 그를 더 걱정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리 불안하게 만드는 건지. 그가 선봉에 선 이후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것을 일일이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도 아무 일 없었어.”
하지만 아무리 많은 승전 소식을 듣었다 한들 그녀의 눈에서 이 걱정들이 사라질 거 같진 않았다. 그녀에겐 그건 과거일 뿐일 테니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그가 전쟁에 나가 있다는 것과 그 전쟁에서 벌어질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그가 충분히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이니.
자신의 뺨을 덮은 그녀의 작은 손을, 그의 큰 손이 다시금 덮었다. 살짝 상체를 더 기울여 그녀와 이마를 맞대는 그는 언제나처럼,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지지 않아.”
“알아요. 알아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러면 조금만 해. 이렇게, 살짝만 건드려도 울 거 같은 얼굴로 하지 말고.”
“그게 마음대로 되면 내가 여기 있지도 않았어.”
로엘은 다시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다가온 그를 좀 더 당겼다.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닿을 것만 같은 거리.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게 되겠어.”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입이 열리고, 그녀는 뜨거운 그를 반겼다. 여전히 저 아래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런 소리 따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이를 느끼기에도 벅찼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둘만이 들을 수 있는 질척한 소리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서로의 향이 섞여 갔다. 뜨거움과 뜨거움이 얽혀 지금 서로가 닿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서로의 곁에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몇 번이고 확인했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이 애틋함은, 이 간절함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토르티아의 붉은 성에 카이로스의 깃발이 꽂히고 그가 무사히 황금의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될 거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그를 너무도 사랑하니까.
“……그래. 그게 어떻게 되겠어.”
그리고 그 역시,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니까.
그렇게, 너무도 사랑해서 두려운 거다.
***
“폐하는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거야?”
“어딘가 계시겠지.”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할 때냐? 지금이!”
아론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어김없이 나왔다. 루카스 또한 어김없이 그 짜증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어련히 알아서 챙기고 계실까. 처소에 안 계시면 잠시 마실 나가셨겠거니 그리 생각하면 되잖아.”
루카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대충 물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론은 속이 터져 발을 동동거리는데, 루카스는 태평해도 너무 태평했다. 그게 오히려 더 아론의 짜증을 돋웠다.
“지금 어디 놀러 왔니? 전쟁 중이라고! 마실은 무슨 마실이야!”
“말이 그렇다고, 말이. 이 멍청아.”
아론 기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루카스가 자신을 멍청하다고 하니 아론이 바로 발끈하였지만, 루카스는 오히려 그런 아론에게 쯧쯧 혀를 찼다.
이 바보 멍청이가 진짜 폐하가 어디 계신지 모르나 보다. 남들은 다 아는 거 같은데.
“진짜 마실이라도 나가신 거 아니야? 내가 다 찾아봤다고. 혼자 나가신 거라면 당장…….”
“워워. 진정해, 진정해. 폐하 호위는 내 담당이야. 우리 수석 보좌관님 담당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프래카에게 수색 명령이라도 내릴 거 같은 기세에 루카스는 바로 말렸다. 지금 한창 좋은 분위기이실 텐데 괜히 산통 깼다가 혼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함께할 시간이 솔직히 이 원정 동안 몇 번이나 되겠나. 그 짧고 소중한 시간을 루카스는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 어디 혼자 나가셨으면 큰일이라고. 여기가 카이로스 도성도 아니고 엄연히 국경이고, 전쟁 중인 데다가…….”
“인간아. 누가 온다고 한들 그분 손끝 하나 건들 수 있겠냐? 여기서 제일 센 분이 우리 폐하시라고. 뭘 걱정하는 거야. 도대체.”
“그야 그렇지만…….”
루카스 말이 너무도 사실이라 아론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긴. 누가 얼마나 찾아온들 그분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들 수 있을까.
솔직히 그가 다친다거나 위협을 받을 거란 걱정보단, 그러다 일이 커질까 봐 하는 그 걱정이 더 컸다.
“그래도 어디에 계신 줄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에토르 성내에 게시겠지. 로엘 님이 계신 곳에.”
아.
뒤늦게 아론은 알겠다는 듯이 작은 소리를 뱉었다. 아무튼 둔팅이. 루카스는 혀를 찼다.
제일 똑똑하면서도 정말 이런 쪽으로는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전쟁 중에는 거의 안 부딪히려 하시는 거 같던데.”
“그러시겠지. 그래야 로엘 님이 프란시아로서 활약하고 인식되는 데에 도움이 되니까.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두 분이 시간을 갖게 내버려 두란 말이야. 괜히 눈치 없이 찾지 말고. 네가 무슨 부모 잃어버린 애새끼냐. 좀 아빠를 냅둬라, 냅둬.”
루카스의 핀잔에 아론의 입이 조금 나왔다. 구시렁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번 역시도 루카스의 말이 옳아 그만두었다.
정도를 모르시는 분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실 분도 아니니 루카스의 말대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돌아오실 테다. 그러고는 돌아오자마자 아론에게 보고하라 하겠지.
테바로스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아론은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대충 테이블 위에 올려다 두고, 그제야 의자에 편히 앉았다.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 폐하를 너무 열심히 찾았다.
“도대체 무슨 보고를 드리려고 이리 난리였어.”
“뭐긴 뭐야. 테바로스지.”
루카스 역시 아론의 앞에 앉으며 그가 들고 온 보고자료를 들춰 보았다. 방금 올라온 따끈따끈한 승전 소식과 함께 나머지 전투에 대한 승전보가 상세하게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테바로스의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 우리가 예정했던 일정보다 사흘이나 빨리 진행되고 있어. 그것도 훨씬 적은 피해로, 훨씬 더 완벽한 승리를 이루어 내며 말이지.”
아론의 표정이 꽤나 굳어져 있었다. 루카스 역시 테바로스의 첫 승전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다. 아무리 테바로스가 많이 가까운 지역에 이미 집결되어 있었고, 그들에겐 꽤나 익숙한 곳이라 더 유리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걸 고려해서도 지나치게 빨랐다.
에토르 전쟁의 여파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 테바로스 군대는 아주 사기가 높단 소리다. 그러니 신경이 쓰일 밖에.
“짜증 나지만 우리 동맹이잖아. 뭐가 문제 되는데?”
“믿을 수 없는 동맹이란 게 문제지.”
아론은 바로 답했다. 에토르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리고 이번 동맹을 진행하면서도 느꼈지만 데릭 테바로스라는 자는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솔직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에토르 전쟁 이후 묘하게 버리와 경쟁 구도에 놓이게 된 아론의 입장에서 이리 테바로스의 완벽한 승리는 거슬릴 수밖에 없다.
당장 그도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은 그런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 리스크, 안고 시작한 거잖아. 일단은 동맹을 맺은 건 사실이니 그들도 그걸 쉽게 깨진 못하겠지. 보복이 두려우면 말이야.”
루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테바로스의 전승이 신경 쓰이지 않은 것은 솔직히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론만큼 조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는 그의 경쟁심을 아주 많이 자극하고 있어서, 재밌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 잘난, 지 멋대로인 건방진 황제 자식. 이번 기회에 제대로 눌러 주고 말겠다는 그런 마음이랄까.
그런데, 미우나 고우나 그의 죽마고우인 이 천재께서는 그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성을 유지하는 평소의 아론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루카스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참 생각이 많아 보이는 자신의 친구를 빤히 보며 말했다.
“뭐가 그리 불안하실까. 전혀 그러실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계획이야 늘 어그러지는 법이고,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조율할 수 있잖아? 우리 천재 보좌관님은.”
아론을 보며 씩 웃는 루카스의 격려에, 아론도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내비친 초조함을 이 오래된 친구는 바로 알아차렸나 보다.
그제야 아론 역시 조금 더 편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루카스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아론 역시 안다. 지금 자신이 전혀 이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테바로스라는 변수는…… 우리의 오랜 계획에 없었던 일이야.”
“그렇지. 한 번도 이렇게 동맹이란 방식으로 북방에 가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래서 불안한 거야. 우리가 너무 성급했나 싶어서. 너무, 데릭 테바로스에게 떠밀려 시작해 버렸는가 해서. 그렇게, 참 오랜 시간 우리가 들였던 공이 무너져 버릴까 봐.”
어떻게 무섭지 않을까. 그들이 함께 들인 시간과 마음이 있는데.
루카스의 장난 어린 격려에 조금 풀렸던 얼굴이 다시금 굳어 갔다. 좀처럼 펴질 줄 모르는, 그 얼굴을 보며 루카스는 조금은 그의 마음이 이해될 거 같기도 했다.
솔직히 루카스의 입장에서야 테바로스가 들어오든 말든, 그저 검을 들고 눈앞에 있는 적을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이미 짜 놓은 판 위에 놓인 하나의 장기 말로서 자신의 맡은 바를 다하는 걸로 그의 역할은 끝.
그런데 아론은 그 판을 에단과 함께 짜는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짜 놓은 작전과 전략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어.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에토르 전쟁 한 번으로, 테바로스의 침략 한 번으로 그렇게 어그러졌어. 우리가 간과했던 것들이 나왔고 우리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미리 터져 버린 거지. 우린, 그런 상태에서 다시 판을 짠 거야. 이렇게 단기간에. 그것도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를 이들과 전혀 계획에도 없던 동맹까지 맺으면서.”
그러니 변수가 너무도 많아졌다. 그래서 아론이 이토록 불안한 거다.
혹시라도, 이번에도 그가 놓쳐 버린 무언가가 있을까 봐.
“어쩌면 테바로스는 처음부터 이 속도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몰라. 우리한테만 그런 내색을 안 했을 뿐.”
그렇다면 그게 어디 한둘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고, 걱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의 대화 속으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왔는지, 이반이 뒤에 서 있었다.
“황자님.”
자연히 일어나려는 두 사람을 다시 앉히며 이반은 두 사람 곁으로 갔다.
루카스야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아론은 확실히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 마음을 너무도 알 거 같아 이반은 작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에단 황제의 영특한 지략가께서 쓸데없는 긴장을 하고 있나 보다. 그 긴장이 도리어 독이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피차 서로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도, 서로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도 똑같아. 그들이 우리에게 전부 패를 드러내지 않았듯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우리 역시, 로엘이 선봉으로 선다는 거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어. 출정식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려지게 된 거지.”
애초에 동맹이란 명목이 아주 우스운 관계였다. 분명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이 움직이고 있건만 오히려 토르티아보다 테바로스를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이리될 줄 분명 모두가 알았다. 그래서 득과 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과연 무엇이 옳은가에 대하여. 이렇게 큰 전쟁에 이러한 불안을 얹고 가는 것이 과연 맞느냐에 대하여.
“우리가 불안한 만큼 저들도 불안해하고 있어. 우리가 모르는 만큼, 저들도 몰라. 그래서 저들도 계속 고민하겠지. 계속 신경 쓰겠지. 혹여 우리에게 숨겨진 의중이 있을까 봐.”
그러함에도 에단은 동맹을 택했다. 이 부담을 지고서라도,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득이라는 판단이 섰으니.
이반은 지금 그걸 믿고 있는 거다. 아론의 불안과 걱정을 너무도 이해하지만 그러함에도 이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리 선택했으니까. 더한 설명이 필요한가.’
이반은, 전적으로 자신의 형제를 믿고 있었으니.
“그러니 아론. 걱정하지 마. 그 누가 와도 너보다 똑똑한 사람, 테바로스에 없으니까. 그들이 생각지 못한 걸 너는 생각할 수 있고, 그들이 숨기려 든 걸 너는 알아챌 수 있어.”
이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역시나 이반. 부하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다독여 주는 데에는 타고났다.
“너는 여태껏 그걸 증명해 왔어. 그러니 폐하가 오로지 너하고만 전략에 대해 함께 논의를 하는 거야. 그 서류 더미 가득한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나 아니고서야 네가 처음이라고."
이반은 아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며 칭찬을 이어 갔다. 진심 어린 그 위로에 아론의 굳어진 표정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너의 주군이자 나의 형제, 이 나라의 황제 폐하께서는 네가 그러리라는 걸 믿고 있어.”
물론, 잔뜩 주눅 들어 버린 그 마음을 온전히 풀어 줄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지만.
“그러니 그 자리에 앉혔지.”
어느새 등장한 에단은 평소와 다름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투덜거릴 시간이 있는 걸 보면 내가 일을 덜 시켰나 보군.”
아론의 불안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너무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변함없는 여유로움이 저절로 아론의 조급한 마음을, 끝없는 불안감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저 이분이 함께한다는 그 사실이 주는 안정감. 이분과 함께한다면 승리한다는 이 믿음.
아론의 흔들리는 마음을 단번에 다잡아 주었다.
에단은 아론이 보고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자료를 하나 들어 올려 대충 눈으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우는소리만 한 거치고는 역시나 일목요연하게, 완벽히 정리해 둔 보고서였다. 어디 정리뿐이랴. 틀어진 일정표에 따른 대체 경로와 테바로스의 의중에 따른 다양한 경우의 수까지, 아주 온갖 고민들을 다 들이부은 보고서였다.
그 단시간, 이동 중에 이걸 어찌 작성했는지. 에단은 속으로 작은 웃음을 뱉었다.
역시나 그의 사람들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네가 걱정하는 모든 것들을 그저 걱정만 하고 있지 않다는 거 알아. 걱정하는 만큼 더 보고 더 생각했겠지. 그런 후 내린 결정임을 알기에 나는 네 의견을 존중하는 거야. 너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올 이, 이곳에 없다는 걸 나는 아니까.”
언제나처럼 무심하기 그지없는, 표정 하나 없이 하는 말들. 그 무미건조한 말들이 제법 아론의 심금을 울렸다.
워낙 이런 말을 안 하시는 분이기에, 그만큼 그 말이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아론의 표정이 바로 밝아졌다.
“당연히 불평만 하고 있진 않았죠. 보고드리려고 얼마나 폐하를 찾았는지 아십니까. 제발 말씀 좀 하고 사라져 주세요.”
“말을 하면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그니까 사라지지 말라는 말이죠!”
다른 누구도 아닌 이분의 인정이다. 그렇다면 더 무엇이 필요할까. 단번에 바닥까지 떨어졌던 아론의 자존감이 올라갔다.
얼굴색이 달라지고 목소리까지 달라진, 평소 그들이 알던 아론의 모습에 루카스와 이반은 그저 웃고 말았다.
아무튼, 가만 보면 제일가는 에단 바라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론이 맞는 거 같다. 로엘을 그렇게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의 질투였으니 말 다한 거지.
“테바로스가 앞서 나가는 것. 네 말대로 그들은 일부러 노린 거일 수 있어. 애초에 테바로스가 담당하기로 했던 영역에서의 일정은 그들이 제안한 거고, 그에 대해 우리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니.”
“성과를 부풀려 보이고자 그리 노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게 자기들 사기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우리 카이로스의 심기를 흔드는 것에도 한몫할 테고.”
“무엇보다 그 데릭 테바로스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죠.”
어쩌다 보니, 모두가 테이블에 착석하게 되었다. 루카스가 부대를 점검 중인 터라 일반 병사들이 오가는 그런 곳인데 무려 황제 폐하에 이반 황자님, 수석보좌관에 대장군까지 착석한 회의장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소란스러운 시장통 같은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다들 무서워서 어디 그 근처에라도 가겠나. 따로 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멀어져 갔다.
“로엘 님은요?”
“자기 부대에 있겠지.”
루카스의 질문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랄까,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그냥 로엘을 내버려 두라는 말 같아서 루카스도 눈치껏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 오시면 좋을 텐데. 저도 마마 못 뵌 지 일주일이나 되었다고요.”
“보지 마. 닳아.”
단호히도 말하는 그의 대답에 루카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두 사람이 서로를 걱정하느라 얼마나 절절한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안다. 그러니 잠시나마 함께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귀중하겠는가.
이 얼음장 같은 분에게도. 그리고 그 햇살 같은 분에게도.
그런 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다. 아무리 아론이 그 방면에 대해 빡빡할지라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어차피 출정해야 해서 시간도 없어.”
“네?”
그런데,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갑작스런 에단의 말에 모두의 눈이 놀라 커졌다.
이 밤에 출정이라니. 이 듣도 보도 못한 소식은 무언가.
“이반이 말했잖아. 패를 안 깐 것, 피차 마찬가지라고.”
먼저 선전포고를 해 왔으니, 응해야지.
테바로스의 승전보에 그의 커다란 손이 턱 올라갔다.
“저쪽이 속도를 냈으니, 여기도 속도를 낸다.”
그것도 친히, 프란시아님께서.
에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세상 무관심한 그의 흥미가 동했을 때에나 볼 수 있는, 바로 그 미소.
저 미소가 지어질 때, 항상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프란시아 부대는 오늘 밤 미르로 출정한다.”
그러니, 긴장할 밖에.
저 미소 뒤에 또 어떠한 피바람이 불지 모르니.
“내일부터 닷새 내, 프란시아는 미르를 비롯한 요르, 나르, 타르 지역을 수복하고, 본부대와 합류한다.”
“네?!”
미르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테바로스의 선 점령 지역의 여섯 번째 성이 함락된 후에야 출정하기로 계획된 곳.
그것도 미르 단독 성 수복이 그러한데, 이는 그보다 훨씬 앞서 나간 셈이다. 테바로스가 사흘 먼저 진행한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만요, 폐하. 이건 현실적으로…….”
“그럼 저희는요?”
아론의 말을 끊고 바로 루카스가 치고 들어왔다.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자신에겐 어떤 명이 떨어질지 아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너는 프래카 정예군을 끌고 나시베로 가.”
“옛썰!”
“폐하, 나시베는 소수부대로 점령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이반.”
“그럼 나도 엄청 당겨지겠네. 나흘이면 되겠어?”
“그래.”
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이미 폐하는 다른 말을 들을 마음이 없으시다. 그만큼 그의 고민이 끝이 났고, 결정이 이루어졌다는 거다.
루카스의 말대로, 그리고 이반의 말대로 그리 조급해하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는데 너무도 멍청한 걱정을 해 버렸다. 테바로스에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이 없다는 그 말, 아론은 고스란히 폐하께 돌려 드리고 싶었다.
당신의 비상함을 뛰어넘는 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냐고.
아론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물자 정비,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군소리 없이 바로 일을 진행하겠다는 아론의 대답에 에단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가장 많이 준비하고 가장 오래 계획했건만 지금까지의 전쟁 계획들 중 가장 무용한 계획이 되어 버리다니. 그만큼 변수도 많고 그만큼 빗나간 예상도 많다.
“일해. 카이로스.”
그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카이로스.
지지 않는 태양의 민족이다.
“하늘 같으신 페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러니 괜찮다.
이분과 함께라면, 어디든 언제든 승리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