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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1. 추억과 현실, 그 어디쯤 서 있는 당신에게 (52/69)

Chapter 51. 추억과 현실, 그 어디쯤 서 있는 당신에게

“읏!”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를 찾았다.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숄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녀는 성급하게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갔다.

“으응. 에단……!”

열기에 달아오른 그녀의 새된 소리가 새어 나오고, 그는 바로 셔츠를 벗어 던졌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 그는 바로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몇 걸음에도 그녀는 그의 입술을 찾으며 조금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몸을 밀착시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나무, 진작 줄걸 그랬네.”

눈빛, 표정, 행동. 그 모든 것들이 오로지 그만을 원한다고 소리치고 있어 에단 역시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는 데도 그녀가 그의 목을 놓아주지 않자 에단은 피식 웃음을 흘렀다. 언제부터 이 여자가 이리 적극적이었나.

“내가 나무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요?”

그의 짓궂은 놀림에도 그녀는 아랑곳 않고 그녀가 먼저 그의 팬츠에 손을 가져가 그 버클을 풀었다.

“당신 때문에 이러지.”

한껏 상기된 얼굴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이 발칙한 여인에게 에단은 순간 숨을 삼켰다. 침실까지 걸어오는 데도 몸이 달아 미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눈빛, 표정이라니.

단번에 온몸의 피가 한 곳으로 쏠리는 것만 같았다.

“네가 먼저 유혹한 거야.”

짧은 경고와 동시에,

“응!”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 안에 가득 차는 그 익숙한 감촉을 느끼는 순간, 바로 그녀가 짙은 신음을 토해 냈다.

두꺼운 겨율 숄 안에 숨겨진 얇은 나이트 드레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고, 그 천 위로 그녀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속살이 훤히 비치는 그 얇은 소재에 에단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이러고 나온 거야?”

“당신이 재촉했잖아요. 빨리 오라고.”

분명 제롬과 그 시종들이 뒤를 따랐을 거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호위병들도 수도 없이 지나쳤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천만한 모습이라니. 아무리 두꺼운 숄 덕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드러나는 가는 발목과 그 위로 살랑거리는 레이스 자락은 남자로 하여금 참 많은 것들을 상상할 수 있게 했다. 그러니 그의 표정이 더 찡그려질 수밖에.

로엘은 작은 한숨을 삼키며 그의 양볼을 양손으로 감싸 제대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시는 거 같은데. 죄송하지만 이 성안에서 아카시스와 제대로 눈을 맞출 수 있는 남자는 내 눈앞에 계신, 폐하 한 분뿐이거든요.”

그런데 무슨 걱정을 하시나. 이 독점욕 많은 남자야.

그녀는 좀 더 그를 당겨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지금, 유혹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계속 딴청 피울 건가요.”

하. 그 아찔한 속삭임에 그는 작은 실소를 뱉고야 말았다.

월계수 나무. 아무래도 백 그루는 심어야겠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몸을 겨우 가리는 그 얇은 천을 그녀로부터 걷어 냈다.

“하아.”

새하얀 속살이 불빛 아래에 훤히 빛나고, 풀어진 붉은 머리가 새하얀 시트 위로 흐드러졌다. 얇은 끈으로 겨우 고정되어 있는 마지막 남은 천 조각을 걷어 내 침대 아래로 떨어트리며 그는 숨을 삼켰다. 그가 방금 전 선물한 금빛 월계수 목걸이만이 그녀의 몸에 걸쳐진 채로 그녀는 그의 아래에서 수줍게 그에게 준비되었다 말하고 있었다.

“나를 진짜 미치게 만들 셈이야.”

이 아름다운 나신을 보는 게 어디 한두 번일까. 그러함에도 오늘따라 더 그녀의 모습이 요염해 보였다. 언제나 소녀처럼 수줍게 가리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스스로 팔을 올려 훤히 몸을 드러내며 온전히 그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

막 꽃봉오리를 맺던 소녀가 언제 이리 활짝 만개한 여인이 되었나.

“난 아까 전부터 미쳐 있었어요.”

그러니 어떤 남자가 이 모습에 제정신일 수 있을까

“그러니까, 안아 줘요. 야하게.”

그는 바로 그의 몸에 걸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자신에게 안겨 오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읏!”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단번에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 으응!”

어쩌면 성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조금 더 열이 오르고 조금 더 그녀를 젖어 들게 만들어겠다는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아니, 그럴 틈을 그녀가 주지 않았다.

“하아. 로엘……!”

첫사랑을 하는 소년처럼. 첫 경험을 하는 청년처럼. 에단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을 원한다고 속삭이는 이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에……단……! 응!”

단번에 들어차는 느낌. 불두덩 속으로 불두덩이 비집고 들어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쾌감. 이미 아프게 커진 그의 것이 그녀의 안에서 더 단단해지며, 그녀의 안을 거칠게 두들겼다.

“아. 아. 아앗!”

그가 규칙적으로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그녀의 가녀린 몸이 흔들렸다. 탐스럽기도 한 어여쁜 가슴이 출렁이고, 기나긴 머리가 아름답게 흩날렸다. 그의 땀방울인지 그녀의 눈물인지 모를 서로의 모든 것이 뒤섞여 온 방 안에 열기가 가득 차 갔다.

“으읏! 에단!”

그녀가 그를 찾고,

“하. 로엘……!”

그가 그녀를 찾았다. 그는 가볍게 한 손으로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그의 위에 앉혔다. 마주 앉은 자세에 더 깊숙이 들어차는 그 느낌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뒤로 젖혀 눈물을 떨어트렸으나 그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하아.”

입술이 얼얼해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게 뭐가 대수랴. 서로의 채취에 취해, 서로의 열기에 취해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을.

그녀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자신의 입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뜨거운 혀를 반갑게 맞이했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고 그 질척한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불이…… 나는 거 같아.”

“어디가.”

“진짜…… 당신은 너무 짓궂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은 채로 잠시 속도 조절을 하며 그녀를 그의 위에서 쉬게 하는 그에게 그녀는 눈을 흘겼다. 이리, 서로가 하나가 된 부분이 움찔거리는데도 그의 여유는 사라지지 않나 보다.

“네가 너무 귀엽게 구니까 그렇지.”

물론 그 토라진 모습도 그의 눈에는 언제처럼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지만.

그는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순간, 그 손길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눈에 띄게 그의 표정이 굳었다.

“에단?”

여전히 그녀의 안에 들어와 있는 채로,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면서 순식간에 그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그 갑작스러운 정색이 당황스러운 로엘은 순간 그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 깨달았다. 그러고는 아차 싶었다.

“아. 이건……!”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손으로 가리려는데, 그의 손이 거칠게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뭐야, 이거.”

“그게……. 읏!”

그리고 아프게 그 손목을 잡았다. 바로 정색하는 그의 차가운 눈은 살벌하기 그지없어 로엘은 덜컥 겁이 났다.

아. 그를 화나게 해 버렸다. 그녀를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준비해 준 그였는데.

“이거 뭐냐고 물었어.”

그래서 더 미안하고, 더 아팠다. 자신의 안일함에 그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었을까 봐.

여전히 그의 위에 있는 그녀가 이만 설명을 위해 일어나려는데, 그는 그녀의 도망을 허락지 않았다.

“아읏!”

대신 더 강하게. 더 깊게 그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예고되지 않은, 갑작스럽고 우악스러운 침범.

로엘은 바로 등을 뒤로 꺾으며,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자, 잠깐만요. 내가 설명을…… 으응!”

그는 아무래도 그녀의 변명을 들을 마음이 없나 보다. 이미 잔뜩 성이 난 그가, 여전히 그녀의 안에 있는 그 상태 그대로, 힘으로 그녀를 뒤돌려 자세를 바꾸었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로엘은 순간 겁이 났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안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말해. 누구야.”

“그니까……! 읏!!”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녹아내릴 것 같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사랑해 주던 그인데.

순식간에 화가 잔뜩 난 짐승처럼 난폭해졌다.

“에……단, 잠……! 아!”

그렇게 그녀에게 말할 틈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으응……!”

문제는 이런 그마저도, 길들어진 그녀의 몸이 조금도 싫어하지 않는 다는 거다. 그저 그가 데릭으로 인해 화났다는 그 사실이 겁이 날 뿐. 여전히 그녀는 그의 품에 강하게 안기는 이 순간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그건 그만큼이나 그에게 길들여졌고, 그만큼이나 이 남자에게 미쳐 있다는 거겠지.

“아. 이거……!”

너무 깊었다. 한 손을 뒤로 잡아당기며, 그는 힘으로 그녀를 안았다. 아프게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채로, 그는 쉴 새 없이, 몸무게를 실어 가며 그녀를 몰아세웠다. 거친 움직임에 침대가 삐걱거리고 그를 받아들이기가 버거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그녀는 최대한 버텼다.

“아흑! 에단……!”

그렇게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겨우 몸을 지탱하는 그녀의 목덜미를 그가 거칠게 물었다.

“윽!”

보지 않아도 그 위치가 어디인지 로엘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데릭이 다시 덮은 그 부분이다. 그가 그녀의 몸에 피운 붉은 꽃이 어디 한둘인가. 그 수많은 흔적들 속에서도 그는 정확히 다른 남자의 흔적을 단번에 알아챘다.

속으로 설마 알아볼까 싶었던 그녀마저 놀랄 정도로, 너무도 손쉽게 알았다.

“오해하지 말아요. 데릭…….”

“이름. 부르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어.”

“아읏!”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하면, 그는 더 깊숙이 들어차 말문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원래 여자를 이리 안나 싶을 정도로, 조금의 배려도 없는 거친 움직임.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힘에 로엘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어디까지 허락한 거야.”

“허락한 적 없어요!”

그녀는 바로 소리쳤다. 멋대로 말해 버리는 그에게 순간 울컥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게 싫은 거야.”

그가 그녀에 대해 모르는 순간이 단 1분이라도 있다는 그 사실이.

감히 그의 여자에 함부로 흔적을 남긴 이. 그녀가 굳이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데릭 테바로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만큼, 그녀가 안일했다는 것이므로.

심지어 그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것까지.

“하아. 하아. 내가 잘못했어요. 그냥 사고였어. 사고인 걸,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몰라.”

그는 차갑게 대꾸했다. 여전히 그녀의 안을 들락거리는 그의 몸은 불두덩처럼 뜨거웠고, 그런 그를 받아들이는 그녀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지만 에단은 속이 상했다.

“사고였어요. 그런데도……! 내가 미안해.”

잠시라도, 그가 없는 곳에서 데릭 테바로스가 멋대로 이 여자에 닿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애써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려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고서는 집어 삼키듯 키스를 퍼부었다.

“하아. 읍!”

숨 쉴 틈조차 없도록. 여전히 그녀의 안을 뜨겁게 두드리며.

그녀의 숨결 하나까지도 갖겠다는 듯이 집요하게.

“에단……!”

달뜬 그녀의 숨이 그의 이름을 연신 찾았다. 그가 화가 나 멋대로 안았지만, 이미 그에게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그녀의 몸은 기꺼이 사나운 그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교성이, 차오르는 뜨거움이, 열기에 취한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아아아!”

누가 들을까 눈치 보지 않는 기나긴 교성이 넓디넓은 그의 방 안을 가득 메우고,

“하아아.”

그의 뜨거움이 가득 그녀의 안을 채워 갔다. 분노에 멋대로 몰아치느라 그녀를 끝의 끝까지 몰아세운 만큼 그도 그녀도 최고의 절정까지 내달렸다.

“아아. 하아. 하.”

그를 증명하듯 평소보다도 진한 여운이 두 사람의 몸을 훑었다. 잔진동이 계속되며 그도 그녀도 한동안 정신이 아득했다. 그렇게 겨우 로엘은 자신의 등 위에서 내려간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을 차갑게 하면서도,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가는 하리를 안아 당겼다. 그래서 그녀는 더더욱 울컥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조금도 밀어내지 못했다.

쿵쿵쿵. 그녀만큼이나 심하게 뛰는 그의 힘찬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를 꼭 안았다.

혹시라도 그가 그녀를 놓을까 두려운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마.”

그 마음을 그는 바로 알아차리는 게 문제다. 알아차려 버리니, 이리 제대로 화 한 번을 내지 못한 채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를 품에 안는 거다.

그 역시도, 이런 그녀를 놓칠까 두려운 그 마음으로.

정말. 이 여자를 어찌할까.

점점 더, 이렇게 그 스스로가 통제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수준으로 그녀가 욕심이 나는데.

이러다, 오히려 그가 그녀를 상처 입힐까 봐, 겁이 났다.

이 마음을 다 드러내면, 그녀는 도망갈지도 모른다.

“에단…….”

그녀의 부름에 답하지 않은 채, 그는 그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 그녀의 생일을 시작하는 격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난밤, 그의 아래에서 그녀는 몇 번을 울었을까.

그가 그녀의 페이스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원껏 그녀를 안으면 어떻게 되는지 로엘은 지난밤 뼈저리게 깨달았다.

“……삭신이야.”

다른 여자들에 비해 체력 하나는 정말 자신이 었는데, 그에게 비할 바는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진짜 쓰러지다시피 하여 잠든 후 그녀는 정오가 되어서야 겨우 그의 황금빛 가득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정말 온몸을 얻어맞은 것같이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그렇게 나신인 채로, 훤한 대낮에 그의 침대 안에서 눈을 떴을 때의 민망함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나이트 드레스라니. 어휴. 내가 못 살아.”

지난밤 서둘러 그에게 오는지라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그녀에게 그 낮에 입고 나갈 옷이 있을 리 만무했다. 눈을 뜨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원래대로라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을 그녀의 얇은 천을 찾아 헤매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방은 너무도 깨끗했다.

“……그 와중에 이건 또 어찌 생각하셨는지.”

로엘은 자신이 지금 입고 있는, 가벼운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혹여 그녀가 깰까 봐 조심하라 하면서도, 그녀가 민망하지 않도록 그녀의 입을 것들을 미리 가져다 놓은 거다.

“얄미운 사람.”

그가 이런 식이니 늘 그녀가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로엘은, 지난밤 데릭으로 인해 그녀에게 화를 내던 아니 속상해하던 그가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제대로 말을 해서 설명을 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는데, 그는 좀처럼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보다는 밤새 그녀를, 뜨겁게 안았다. 그러니, 그녀가 힘이 들 밖에.

“……그만큼 좋았던 거고.”

로엘은 속도 없이 어젯밤의 일이 생각나 얼굴을 붉혔다.

분명 월계수 나무 아래까지만 해도 너무도 행복했는데. 아니, 그에게 안겨 처음 울었을 때까지만 해도 너무도 행복해 정신이 이상해질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 행복이 데릭 테바로스의 그 작은 흔적으로 단번에 와장창 깨져 버렸다.

‘나는 반드시 너를 되찾으러 온다.’

로엘은 그제 밤 데릭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 얼굴을 찌푸렸다. 데릭이 절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가 저런 말을 저리 대놓고, 일부러 찾아와서까지 한다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그녀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

당연히 그녀의 마음과 의사 따위는 고려하지 않을 테고.

로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 문제만으로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세상 모든 일을 혼자 하는 사람. 그렇게 바쁘고 힘든 사람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치정 싸움까지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엔 그녀가 먼저 그의 곁을 떠나고야 말지.

“하아.”

“땅 꺼지겠다.”

또 한 번의 깊은 한숨이 채 나오기도 전에, 익숙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엘은 자연히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낮의 햇빛을 오롯이 받으며, 황금빛 머리칼을 빛내는 이반이 한 손에 책을 몇 권 든 채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반 황자님.”

그녀가 여기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아셨는지. 이 귀신 같은 분은, 하루 종일 신년회 준비에 부산스러운 황궁을 피해 베리타스 후원, 에단이 준 월계수 나무 밑에 있는 그녀를 단번에 찾아냈다.

“보아하니 싸웠나 보네. 이리 심기가 불편하신 걸 보면.”

생각이 다 드러나는 그녀의 울상인 표정을 보며 이반은 작게 웃었다.

이렇게 단둘이 있는 이때에도 ‘이반’이 아닌 ‘황자님’이라 칭하는 것도 그러하며, 그의 등장에 조금도 놀라 하지 않는 이 심심한 반응도 그러했다. 이건 누가 보아도 에단으로 인한 고민.

“아니면, 네가 또 잘못했거나.”

로엘은 반박하지 못한 채, 자신의 곁으로 완전히 다가운 이반을 흘겼다. 오늘은 이런 가벼운 놀림마저도 웃으며 넘기지 못할 만큼 심기가 좋지 못했다.

“가던 길 가시죠, 황자님.”

“이봐, 이봐.”

이반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뚱한 표정의 그녀 옆으로 이반이 섰다. 이반은 그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그녀보다도, 우선 이 거대한 월계수 나무에 눈이 갔다. 꽤 키가 큰 이반마저 제법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정말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였다.

“에단이 이걸 준 거야?”

“……응.”

“진짜 에단스럽네. 로엘에게 진짜 Laurel을 선물하다니.”

이것도 이리 멋지고 귀한, 그녀의 마음의 쏙 드는 월계수로.

이반이 새로 생긴 그 월계수에 감탄하는 동안, 로엘 역시 함께 고개를 들어 월계수를 한 번 더 보았다. 역시나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렇게 사람들이 쉽게 다가올 수 없는, 비밀 공간 같은 베리타스 후원에 존재하는 것도 마음에 들고 과하지 않게 딱 한 그루. 물론 그 한 그루가 아주 귀하겠지만 그 한 그루만을 주어 그녀가 그 하나에만 오롯이 애정을 줄 수 있게 된 것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좋아?”

“……응. 너무 마음에 들어.”

로엘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물어 뭐하랴. 이리 좋은 것을.

이미 수십 번을 더 보았을 그 나무를 우러러보며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반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반은 로엘이 이 푸르른 상록수를 보며 무엇을 그리는지 알 거 같았으니까.

“하아. 풀 냄새. 이게 얼마 만에 맡는 숲의 냄새지.”

그녀는 이 월계수를 통해 북을 그리고 있다.

“나무 하나 들여다 놓았을 뿐인데도 주변 공기가 훨씬 맑아진 기분이야. 그래서 머리도 안 아플 거 같고 잠도 잘 올 거 같아.”

그렇게 타르타니를. 그 속에서 뛰어놀던 그때의 추억을 그리는 거다.

“그지, 이반?”

어쩌면, 토르티아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살짝 타르타니의 향기가 나는 거 같지 않아?”

정말 그녀는 그 시절을 추억하나 보다.

그렇다면 이반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 타르타니가 생각나네.”

이반은 자연히 그녀 옆에 앉았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사로웠으며 바람은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잔잔한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새로운 나무를 반기는 작은 새들의 지저귐도 듣기 좋았다.

“이런 거. 오랜만이네.”

같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

정말 얼마 만인가.

“그러게.”

한때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었는데.

이반은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여러모로, 그녀의 말처럼 타르타니를 생각나게 했다.

“이제는 타르타니의 하늘이 어땠는지도 기억이 안 나. 그렇게 수도 없이 봐 왔는데.”

이반은 편히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어 옆에 있는 그녀를 보았다. 로엘 역시 이반처럼 온전히 몸을 기댄 채로, 저 높이, 나뭇잎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푸르른 하늘을 응시했다.

“뭐 세월이라는 게 있으니까.”

“여유도 없어졌고.”

로엘은 역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토르티아 성으로 들어간 후에 하늘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있기는 했던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동안 정말 아무런 삶의 의지가 없었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거 자체가 죄스러웠던 그녀에게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사치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리, 호사스러운 지금이 로엘은 여전히 낯설다. 토르티아 탑 안에 유폐되었던 게 고작 1년 전.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말도 안 되게 사치스러워졌지.”

자조적인 실소가 절로 나왔다.

“참 사람 일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을 이때 써야 하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냥. 좀 인생이 웃긴 거 같아서.”

참 지독히도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던 인생이 요새는 버거운 행복을 주나 싶더니만, 다시금 마치 그 행복을 돌려받으러는 것처럼 불안불안한 사건 사고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원래 인생은 웃긴 거야. 그러니 너와 내가 이 카이로스의 후원에서 이리 앉아 있지. 그것도 형수와 시동생 사이로.”

이반이야말로 실소가 절로 나왔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자라면 그만 한 이가 또 어디 있을까.

“일일이 마음 쓰지 마. 원래 하던 대로.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아무리 그게 헛발질이어도. 어차피 그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와. 그거 진짜 잔인한 말인데.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뛰어들라는 거잖아.”

“그러다 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을 하는 거지. 그리고 넌, 꽤나 하늘의 예쁨을 받는다고. 이래저래.”

“하?”

이반의 진지한 말에 로엘은 진심으로 웃어 버렸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는, 왕족인 아버지가 소리 소문 없이 죽고, 자신을 지키려다 어머니가 죽었으며, 그녀를 끔찍해하는 숙부 가족들에게 유폐되어 있다가 다른 나라로 팔려 온 이 인생이 어딜 봐서 하늘의 예쁨을 받는 거냐고. 구구절절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러니 여기 앉아서, 에단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

그런데 이반의 저 한마디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의 모든 생각이 훤히 드러나는 그녀의 표정에 이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참, 투명하기도 하려라. 말하는 사람, 조금 질투 나게.

“그렇지? 아카시스 마마.”

타이밍 맞는 존칭에, 싱긋 웃는 미소까지. 로엘은 정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카이로스의 아카시스가 된 것. 그리고 에단을 만난 것.

그렇게 그와 사랑에 빠진 것.

그래. 어쩌면 그녀는 정말 하늘의 사랑받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열심히 살라는 말을 되게 길게도 하네.”

“내가 원래 말이 많아.”

오로지 한 여자에 대해서만.

이반은 조금은 망설였지만, 이내 로엘의 머리에 손을 올려 평소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익숙한 손길을 로엘은 피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더 몸에서 힘을 빼고, 좀 더 편한한 눈으로 이반을 응시했다

“위로 고마워.”

“별말씀을.”

고분고분 고맙다는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딱 어린 시절, 처음 그녀와 만났던 시절의 작은 소녀였던 로엘을 떠올리게 만들어 이반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생각해 보면, 그때야말로 진짜 오빠와 동생이었는데.

돌고 돌아, 다시 그 관계로 돌아간 기분이랄까.

“생일 축하해.”

“고마워.”

딱 이 정도까지. 과하지도 서운하지도 않을, 그런 축하 인사. 로엘은 이반이 건넨 작은 상자 속, 귀여운 펜던트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토르티아에서는 검끝에 부적처럼 작은 펜던트를 장식처럼 거는데, 이반이 선물해 준 것이 바로 그거였다. 여자아이라면 검에 항상 달고 다니는 그 펜던트는 보통 주변 친구나 가족들이 선물해 준다.

그러니 이반의 선물은 토르티아를 아는 자만이 선물할 수 있는, 토르티아 출신인 그녀를 위한 아주 센스 있는 선물이었다.

그래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소중히 간직할게.”

“그래.”

마치, 정말 오빠에게 생일 선물을 받은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

붉은 홍등이 토르티아의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 그리고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날.

그 경계선쯤에서 토르티아 사람들은 붉은 등을 올려 감사와 염원을 하늘에 표했다.

토르티아의 사람들에게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기도 한 이날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다들 속도 편하네. 어쩌면 이게 마지막 홍등일지 모르는데.”

“야. 그건 좀 심하다.”

“솔직히 틀린 말 아니잖아?”

벤의 자조적인 말에 맥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두 장군은 높은 망루에 올라, 술을 한 잔씩 기울이며 멀리 보이는 토르티아의 시내를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카이로스가 쳐들어온다는 것. 그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리라는 것. 분명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음에도 너무도 평화로운 사람들의 모습이 허탈하게 다가왔다.

아등바등하는 건, 두 사람뿐인가 해서.

“다들 이미 놓아 버린지도 모르지.”

맥스는 벤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도 이미 놓아 버린 거일 수도 있고.”

맥스는 나지막한 벤의 읊조림에 잠시 벤을 보았다. 전쟁 준비를 하고는 있다만, 그도 벤도, 그 밑의 병사들도 모두 다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그래. 우리부터 이미 놓아 버린지도.”

어차피 결과가 너무도 뻔했으니.

다른 나라도 아닌 카이로스인데 무얼 기대하고 무얼 희망할까.

“차라리 항복 선언 하는 편이, 제일 현명할지 몰라.”

“하. 우리 손으로 이 나라 역사를 끝내자고?”

“다 같이 죽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지.”

덤덤한 벤의 말에 맥스는 선뜻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어차피 카이로스가 이길 전쟁이라면, 그래. 발악하지 말고 순순히 백기를 드는 편이 가장 현명할지 모른다.

“……하지만 안 할 거잖아. 너도. 나도. 그리고 다른 토르티아 사람들도.”

그 현명한 방법을, 그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 것. 택할 수 없는 것.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광활한 북방의 지배자였던 토르티아의 마지막 자존심인 거다.

“그게 가장 큰 문제인 거고.”

그 자존심이 무어라고 다 같이 사지로 뛰어들까. 벤과 맥스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멀리, 하늘 높이 올라가는 홍등이 오늘따라 괜시리 쓸쓸해 보였다.

저 많은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지금 저 홍등을 띄울까 싶어서.

“……제이드 님을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전부 다.”

벤의 물음에 맥스는 바로 답했다.

“그럼, 공주님을 기억하는 이도 전부 다겠네.”

“그렇겠지.”

“그래서, 저런가.”

그래서 저리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걸까.

하필. 그들에게로 오시는 이가 그분이라서.

“……모두들 빚이 있는 거지. 절대 털어 낼 수 없는 그런 마음의 빚.”

피투성이로, 맨발로 그녀가 뛰쳐나와 울부짖을 때 그 누구 하나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 누구 하나 그녀를 품어 주지 않았다. 그토록 그녀를 예뻐했으면서, 그토록 ‘그분’을 따랐으면서 말이다.

“내가 또 다시 공주님께 검을 빼 든다면, 난 진짜 제이드 님 얼굴을 다시는 못 보겠지.”

“……이미 지금도 우리는 볼 수 없어.”

무슨 염치로 그분을 뵐까.

그들이 받은 게 있고, 한 게 있는데.

“너무 많이 와 버렸어. 우린.”

외면하고 또 외면하였지. 카이로스에 팔려 가는 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들은 눈을 돌렸다.

그 마지막 가는 길. 배웅이라도 할 것을. 그렇게 쓸쓸히. 비참하게 홀로 가게끔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짜 비겁한 거지. 너나 나나.”

자조적인 실소가 또 한 번 더 나왔다. 이 부끄러움은, 이 죄책감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들을 괴롭히겠지. 또 한동안, 두 사람 사이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오늘따라 정말 유독히 저 홍등이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다.

공주님이 고사리손으로 그들에게 홍등을 만들어 주던, 그때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 시절 그들은 분명 행복했던 거 같은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어쩌다 이리되었나.

“그래.”

두 사람은 자신들의 검을 쥐었다. 이미 닳고 닳아 수도 없이 손잡이를 새로 감고 또 감았다.

그 오래된, 그들의 역사와 함께한 바로 그 검. 이 검마저, 그분이 내리신 거다.

“공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지,”

최선을 다해. 그리고 마음을 다해.

“마지막까지, 토르티아를 위해.”

두 사람은 마지막 잔을 부딪히며, 한 번에 들이켰다.

붉은 홍등이 빼곡히 토르티아의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

화려하고 성대하기도 한 카이로스의 송년회가 겨우 끝이 났다. 장차 4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송년회는 한 해를 감사하는 의미의 제를 시작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해의 축복을 기원하고, 마지막은 서로에게 덕담하는 파티로 막을 내렸다.

“고생 많으셨어요, 마마.”

“응. 너네도.”

장신구를 하나씩 빼 내며, 로엘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만큼은 화려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자리라 그녀도 오랜만에 제대로 힘을 주어 꾸몄다. 펄럭이는 화려한 드레스에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짤랑거리는 수많은 보석까지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을 그 차림새는 참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말 여신이라도 된 양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으니.

“아깝네요. 정말 예쁘셨는데.”

“하나도 안 아까워. 제발 좀 풀자.”

로엘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하나같이 아름답다는 그 말이 그녀는 잘 와 닿지도 않았거니와 전혀 그녀 인생에 도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뻐 보여서 뭐하나 싶은 마음도 너무 컸다.

물론, 그 사람 눈에야 예뻐 보이고 싶지.

“……정작 필요한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는 걸 뭐.”

문제는 그 한 사람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단 사실이지만.

화해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 어색한 상태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옆에 서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로엘은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 옆에서 어쩔 수 없이 그의 팔 위에 손을 얹으며 그 옆을 지키는 건 가시방석도 그런 가시방석이 없었다.

게다가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때의 그가 어디 좀 무서운가.

아마 그에게 인사하는 귀족들 모두가 등에서 식은땀을 흘렸을 거다.

“오늘 폐하 기분이 별로 안 좋긴 하셨죠.”

“지난밤에 분명 두 분, 잘 지내셨는데……. 다른 일이 있으신 걸까요?”

딜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로엘은 그 질문에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지난밤 결코 좋지 않았다는 것. 그의 나쁜 기분의 원인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라는 것.

이제는 그녀 입으로 말하는 것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그만큼, 그녀는 이미 여러 번 그를 실망시켰으니까.

로엘 역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녀에게 질려 한다 한들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마마 생신이신데……. 폐하와 함께 계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얼마 남지도 않았어.”

로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솔직히, 어쩌면 그가 그의 방으로 부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홀에서 그를 보는 순간 그러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 군소리 없이, 기다리지 않고 파티가 끝나자마자 바로 그에게 인사도 없이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뭐……. 나 아니어도 인사받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어.”

로엘은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그의 얼굴에 피곤함이 너무 역력하여 그게 좀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래서 그저, 오늘은 그도 편히 잘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흠. 그래도 좀 서운한걸요.”

“카이로스에 오시고 처음 맞는 생신이신데.”

로엘보다 더 서운해하는 딜리아와 헤더의 말이 이어졌다. 시무룩한 표정이 정말 실망을 한 거 같았다. 오히려 그 모습에 로엘이 웃고 말았다.

“하나도 안 서운해. 지난밤에도 같이 있어 주셨고. 오늘은 나도 정말 피곤해.”

로엘은 격한 어젯밤의 여파로 아직까지도 얼얼함이 느껴지는 터라,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서 티도 못낼 이 통증은 아마 며칠은 더 갈 거 같았다. 붙어 있으면 분명 참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원할 테니 어쩌면 떨어져 있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다만, 그 생각을 그가 동의하지 않았을 뿐.

“마마. 제롬 경께서 오셨습니다.”

귀걸이를 빼면서 말하는 그녀의 말을 뚝 끊는 신나는 목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갑작스런 그 소식에 로엘을 제외한 나머지 시녀들의 표정이 바로 밝아졌다.

“거봐요, 마마!”

“이러실 줄 알았어요.”

역시나 그녀보다도 그녀의 시녀들이 더 신이 났다. 어찌 된 게 그의 총애를 그녀들이 더 바라는 거 같았다. 이러다 그녀가 그의 눈밖에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러나. 로엘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기껏 열심히 벗고 있건만 이제 와서 부르는 건 또 뭐람.

“부르실 거면 진작에 좀 부르시지.”

작은 투덜거림을 뱉어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머리 매무새를 다듬었다. 어디 그뿐이라, 눈에 띄게 밝아진 그 표정에 시녀들의 표정도 저절로 밝아졌다.

역시나, 폐하가 마마의 생일날 마마를 혼자 두실 리 없다.

지난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겠다만 어찌 두 사람의 사이가 그리 쉽게 흔들릴 사이던가.

이리 하루를 버티지 못할, 사랑싸움인 것을.

“마마. 다시 화장 고쳐 드릴까요.”

“어휴, 무슨. 됐어 어차피…….”

로엘은 뒷말을 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무어냐고 짓궂게 되묻는 그녀들의 놀림에 저도 모르게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요.”

“맞아요, 마마. 제롬 경껜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 말씀드릴게요.”

일어나려는 그녀의 어깨를 누르는 헤더의 손에 로엘은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이제야 좀 예뻐 보이는 거 같았다.

아니, 이제야 예쁘게 보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 웃기네.”

그 순간 로엘은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가 부른다는 그 사실이 뭐라고.

그 한마디에 마음이 이리 변할까.

“뭐야. 진짜 웃기네.”

자조적인 실소가 절로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빗을 들고 있는 거울 속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진짜 우습잖아. 나.”

어쩌다 이리되었나. 그에게 절대 사랑을 구걸하지 않겠다 그리 다짐했던, 악에 받친 토르티아의 로엘은 어디로 가고 그의 부름을 기다리는, 그녀가 정말 싫어하던 사랑에 눈이 먼 여인이 되었나.

“……딜리아.”

순간 정신이 팍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뛰던 심장이 천천히 제 속도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널뛰던 그녀의 감정을 누르고, 그녀의 이성이 돌아온 거다.

“네. 마마.”

“제롬 경께 그냥 돌아가시라고 전해.”

“네?”

순간 로엘의 머리와 화장을 봐 주던 헤더와 딜리아의 손이 딱 멈췄다. 어안이 벙벙한 그녀들의 놀란 표정과 달리 로엘의 표정은 너무도 평온했다. 평소의 그녀처럼 온화하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을 뿐이다.

“폐하께 오늘은 가지 못한다고, 죄송하다고 전해 줘.”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지, 지금 아시긴 하는 걸까.

딜리아는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다, 너무도 또렷한 로엘의 눈에 이만 입을 다물었다.

저 표정과 저 눈을 보아하니 이미 마음을 굳히신 거다.

“……예. 마마.”

그러니 따를 밖에. 딜리아는 작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이 말을 제롬 경께 어찌 전해야 할지 머리가 딱딱 아파 왔다.

***

“뭐?”

에단은 제롬이 전해 온 소식에 어이가 없어 바로 되물었다.

“로엘 님께서 오늘은 피곤하시어, 오지 못하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

실소가 저절로 나왔다. 세상에 황제의 부름을 거절하는 비도 있던가.

말하는 제롬도 이리 어이가 없는데 듣는 그는 어떻겠는가.

“폐하. 아무래도 오늘 워낙 일정이 버거우셨고 마마께서도 쉬고 싶…….”

“됐어.”

에단은 로엘의 편을 들어주는 제롬의 말을 짜증스럽게 끊었다.

진짜 화낼 사람은 누구인데 지금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아도 그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렇게 훌쩍 도망가듯 그의 시선을 피해 돌아간 것도 심히 마음에 들지 않은 차였다.

“폐하. 어찌할까요.”

미리 그의 방에 와 기다리고 있어도 화가 풀릴까 말까인데, 심지어 오라는 그 말을 듣지도 않다니. 정말 이대로 영영 보지도 않을 요량인 건지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에단의 표정이 바로 찌푸려졌다.

“폐하?”

눈치를 보며 제롬이 또 한 번 더 되물었다. 딱 보아도 그러지 않아도 안 좋았던 그의 심기가 더욱 안 좋아졌다. 제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범상치 않은 분이라는 건 진즉에 알았지만, 이 정도로 간이 크신 분인 줄은 몰랐다.

원로원 귀에라도 들어갔다간, 불경죄를 운운할 일이었다.

“……가자.”

“네?”

“못 오겠다면 내가 가야지.”

에단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 여자가 이걸 노리고 이랬는지 모르겠다만 노렸다면 아주 제대로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아마, 그러진 않았을 거다.

“폐하께서 직접 가시겠다고요?”

“그래.”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 역시 다 알진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이리 유치한 방식으로 그의 속을 태울 여자가 아니란 건 안다.

아마 그저, 그가 쉬길 바랐겠지. 풀지 못한 이 불화를 푸는 것보다 그의 건강을 더 걱정해서겠지. 아주 건방지게도, 황제의 마음 따위 알아주지도 않으면서.

기어코 황제의 발걸음을 이리 움직이게 만들면서 말이다,

“……준비하겠습니다. 폐하.”

제롬은 두 번 묻지 않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마 아론은 기함을 토했을 거다. 루카스도 꽤나 놀란 얼굴로 휘파람이라도 부르며 폐하를 놀렸겠지. 하지만, 제롬은 그저 좋았다. 무엇이 되었든, 온기 없던 그의 주군꼐서 제법 사람 온기를 띠는, 그 나이에 맞는 사랑을 하는 남자가 되어 있었으니까.

이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위대한 황제께는 그런 감정 따위 필요 없다고. 이분은 범부가 아니기에,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고. 감정은 죽이고 냉철한 이성만을 가져야 한다고. 옆에 있던 제롬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그 수많은, 같잖은 충고둘이 참으로 싫었는데 로엘 님께서는 그 모든 말들을 단번에 깨 버린 거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이리 귀엽고, 이리 사랑스럽게.

투덜거리는, 짜증이 가득한, 그러면서도 절대 안 가겠단 소리 한 번을 하지 않는 자신의 주군을 보며 제롬은 기꺼이 길을 텄다.

오늘 밤도, 주군께서 자신의 여인 곁에서 편히 주무시길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

“제롬 경께서 그냥 돌아가셨다고?”

“네. 무슨 일이실까요?”

“설마, 폐하의 부름을 로엘 님께서 거절하신 걸까요?”

“에이. 설마요.”

수아는 베티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 시간에 제롬 경이 왔다는 건 뻔하지 않은가. 심지어 오늘은 로엘 님의 생일이다. 그녀가 이런 날 폐하 없이 혼자 지내신다는 것 자체가 수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죽고 못 사는지 수아가 제일 잘 아는데, 그런 폐하께서 로엘 님을 생일날 혼자 둔다고? 그럴 리 없다.

“로엘 님이라면…… 그럴 수 있지.”

수아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파티에서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항상 서로를 좇던 눈이 의도적으로 서로를 피했다. 그걸 수아만 느낀 게 아닐 터. 귀족들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리길래 발끈하고 부인했다.

로엘 님 생일날, 로엘 님께서 폐하의 방에서 아침 늦게 일어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는데 그걸 듣고도 그런 억측이라니.

“……진짜 싸움이라도 하셨나.”

로엘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일보다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베티와 쥰은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한 엄마도 이 정도는 아닐 거 같다.

“근데, 원래 이렇게 로엘 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는 거야? 그렇다면 좀 소름인데.”

지금까지 묵묵히 그녀들의 말을 듣고 있던 리암이 뒤늦게 끼어들었다. 이제는 하다못해 수아의 방까지 들어온 리암이었다.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쥰이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본 거지.”

“아닌 거 같은데…….”

“아니라고, 그 정도는”

수아와 리암이 함께 있는 게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째, 세 번째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켈트가의 소식을 전한다든지, 방범을 핑계 댄다든지 명분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상대가 바로 폐하신데, 오히려 폐하는 전혀 상관을 안 하시니. 그렇다고 후궁에 있는 다른 이들이 수아를 걸고 넘어지기엔 지금 켈트가가 잘나가도 너무 잘나가고 있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할까. 베티와 쥰도 이제는 거의 포기 수준이었다.

“만일, 진짜 로엘 님께서 그 폐하의 부름을 그렇게 대놓고 거절한 거면 진짜 대단하네.”

“로엘 님은 원래 대단했어.”

바로 말하는 수아에게 리암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찌나 로엘 님을 좋아하는지, 이거 수아 내에서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는 그런 수준이었다.

“어차피 폐하께서 져 주시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네. 로엘 님 생일이잖아.”

“져 주실지 누가 알어. 황제의 마음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야.”

“폐하는 달라.”

단호하게 말하는 수아에게 리암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괜히 다른 남자의 편을 드는 거 같았으니까. 저렇게 대놓고 단호히 폐하는 다른 남자하고 다르다고 선을 그으니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 폐하라고 다르지 않아.”

“아니라고. 다른 분도 아닌 로엘 님이야. 세상 어느 남자라도, 절대 변심할 수 없어!”

근데, 그 짧은 질투는 너무도 허망하게 꺼져 버렸다. 수아의 맹목과 확신은 폐하가 아닌 로엘이었으니. 리암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정말……. 너를 어쩌면 좋니.”

“뭐가.”

“이러다 로엘 님한테 너를 뺏기겠어.”

“그럴지도 몰라. 나 진짜 로엘 님이 같이 살자고 하면, 고민할 거 같아.”

수아의 눈동자가 진지해도 너무 진지해서 리암은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혼자 세상 심각한 수아의 허리를 안아 리암은 자신의 어깨에 그녀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

“너무 진지하게 말하지 마. 나 조금 무서워진다고.”

살짝 풀이 죽은, 시무룩한 리암의 말에 이번엔 수아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 덩치 큰 남자에게 이런 귀여운 모습이라니. 정말 이 반전된 모습에 푹 빠져 버리고 만 거다.

“어이구. 무서웠어요?”

“놀리지 마. 나는 너 없이 하루도 못 사는데, 네가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을 따라간다고 하니까 심장이 덜컥한다고.”

수아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결국 그의 품에서 나와, 리암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의 뺨을 감쌌다.

“나도야. 나도 리암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어.”

살며시 이마를 맞대어 오며 환하게 웃는 그녀에게 리암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더더욱 로엘 님이 중요해. 나에게, 리암과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주실 분이 그분이니까.”

리암과 수아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서로의 온기가 전해지는, 지금 이 순간 함께하고 있다는 그 기분 좋은 감각에 수아의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고 리암 역시 그런 수아가 귀여워 미소가 더 진해졌다.

“있지, 리암. 나는 이번 전쟁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응?”

“로엘 님께서, 아카시스로 있는 마지막.”

수아는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정확히 리암의 눈을 보며, 단호히 말했다.

“로엘 님께서, 목숨을 걸고 그 위험한 곳에 계실 동안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다른 비들을 내보낼, 그 계획 말이야?”

“응. 그거뿐 아니라, 모든 걸 다 준비해 놓을 거야. 그분께서 돌아오면, 바로 칼라리엔이 되실 수 있도록.”

리암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너무도 수아의 눈이 진심이라서.

이거, 그냥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폐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 그건, 이 후궁에서 오로지 그분 하나만 바라보고 몇 년을 살아온 그녀들이 제일 잘 알겠지.”

그 얼음장 같은 분이 오직 한 분에게만 봄에 눈 녹듯 사르르 녹듯 녹아 버렸다. 그걸 그 누가 대신하겠는가. 절대, 그 누가 와도 대체가 불가능하단 소리다.

“그렇다면 그들은 평생 여기서 살까? 이렇게 페하의 눈길 한 번을 받아 보지 못한 채로 평생을 여기서 늙어 가고 싶을까? 이 숨 막히는 곳에서. 매일을 말이야.”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엔 그들은 이미 지나치게 화려하게 살아왔고, 그리 썩기엔 어린 시절 꽤나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고 살아온 이들이다.

“폐하의 선대 황제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아카시스와 귀인들을 두셨지. 귀인들을 영지 귀족들에게 포상으로 내리는 일, 비일비재했어.”

“……너 지금,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다 내보낼 거야. 그녀들이 원하는 젊은, 혹은 아주 부자인 귀족들에게.”

리암은 순간 헛웃음을 뱉어 버렸다.

켈트가의 영애님. 정말 빈말 따위, 하지 않으셨나 보다.

“지참금. 얼마든지 내가 내겠어. 내 모든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다 낼 거야.”

“네가 내지 않아도 폐하께서 내시겠지. 그걸 제일 원하는 분이 그분일 테니.”

수아가 이 말을 꺼내면 에단이야말로 아 소리도 하지 않고 전부 치를 테니.

수아는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차근히 준비해야지. 일일이 남은 귀인들을 만나면서, 회유를 해야 할 거야. 귀족가의 영애님들이야 골치가 좀 아프겠지만, 그 밑단은 아마 내가 제안을 하자마자 바로 물어 버릴걸?”

신나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던, 죽은 듯 한 수아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렇게 모두를 내보내면, 그다음은 원로회를 포섭할 생각이야. 칼라리앤은 기본적으로 만장일치로 이루어지니까. 이를 위해서는 아버님이 힘을 빌려주셔야겠지?”

“드보아 님께서도 찬성하시잖아.”

“응. 켈트는 전폭적으로 로엘 님 편이지.”

아버님도, 어머님도. 전부 다.

그건 아버님의 계산 아래 그분을 미는 게 더 이득이란 판단이 섰다는 거다. 그렇다면 일처리는 훨씬 더 쉬워진다.

“아버님이 마치 나를 밀듯 로엘 님을 지지해 주실 거야. 지금 켈트가 다시 찾은 이 권력, 아버님도 놓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

“로엘 님께서 켈트의 사람이 되진 않으실 텐데?”

“전혀 아니지. 아마 로엘 님은 켈트가 너무 지지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실 거야. 그분은 그 누구도 자신으로 인해 권력이 독점되는 걸 원하지 않으실 테니까. 근데, 내 아버지, 드보아 켈트 공도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

수아는 씩 미소 지었다.

“우리 아버지가 제일 잘하시는 게 뭔 줄 알아? 바로 선을 지키는 거야. 그리고 그 선을, 아버님은 로엘 님에게 맞췄어,”

아주 확실하고, 아주 정확하게. 그래서 수아는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한다.

수아는 케인 몰브가 이제껏 다른 이들보다 유달리 욕심이 많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케인 몰브의 그 권력욕은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르지. 자신의 아버지는 그 당연한 잘못된 길을 아주 현명히 잘 피해 가시는 거고.

“거기에 어머님의 사교계 동의도 뒷받쳐지겠지.”

“……그렇다면 끝난 거잖아?”

리암의 물음에 수아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응. 그럼 끝난 거지.”

그 미소에 리암은 두 손 두 발 들었다.

로엘 님이 이 카이로스의 칼라리앤이 되실 일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

“아……. 폐하.”

갑자기, 떡하니 등장한 에단에게 로엘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거절한 의미가 그로 하여금 이리 오라는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오해가 생긴 거 같았다.

“오셨네요.”

그런데 그 당황스러워하는 태도가 오히려 더 큰 오해를 만들어 버렸다. 대놓고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의 반응에,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두 팔 벌려 그를 반겨 줄 거라 생각지 않았지만 이 정도의 냉담한 반응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다.

“네가 안 오니 내가 와야지.”

“제 말은, 이리 오시라는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로엘은 말끝을 흐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멀찍이 떨어진 거리. 흔들리는 시선. 마치 거부하는 듯한 태도.

에단은 기분이 매우 상했다. 그는 제롬에게 민망함을 무릅쓰고 심지어 자존심을 내려놓으면서까지 그녀를 보러 온 거였는데, 그녀는 그런 그가 조금도 반갑지 않은가 보다.

“폐하. 저는 정말 폐하와 싸움을 하려는 게 아니……!”

“시끄러.”

에단은 평소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녀를 단번에 당기며 그녀의 말을 끊어 버렸다.

로엘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이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녀가 그의 화를 더 돋운 거 같았다.

일부러 그를 안 보려고 한 건데, 이리 찾아와 버리시면 그녀의 결심은 뭐가 되나.

“폐하.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읍!”

기어코 그녀의 입에서 나오고야 만, 명확한 거절의 의사표시는 단번에 입으로 막혀 버렸다. 에단은 망설임 없이, 그의 마음에 조금도 들지 않은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녀가 일부러 그를 자극하려 거절한 것이 아님을, 그가 제일 잘 안다. 이 여자는 그런 영악한 짓을, 그런 여우 같은 짓을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자신은 그 칼 같은 거절에 애가 닳아, 자존심도 구기면서 이렇게 찾아왔는데 여전히 그녀는 조금도 그를 반기지 않아서.

그렇게, 같잖은 지나간 인연 때문에 그녀와 여러 번 싸우는 것도 짜증 나는데 그 사실에 그녀가 거리를 두는 것은 더 화가 치밀었다.

“으, 읍. 폐……. ! 으읍!”

그래서 더 격렬하고 더 거칠었다.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 몸을 빼면 뺄수록 더 깊게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한 손이면 다 잡히는, 그녀의 작은 머리를 받친 채 다른 한 손은 가는 허리를 단단히 잡고 그녀에게 그의 향기를 불어넣었다.

“하아……!”

진득한 물소리가 서로의 귓가에 울리고, 서로의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가슴을 밀어내던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이내 그녀 역시 그의 셔츠를 잡고 매달려 그를 갈구했다.

그녀의 눈에서 열기에 어린 눈물이 고이고, 그의 입에서 열띤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를 돌게 해야 직성에 풀리는 건가.”

“그게 아니라, 폐하…… 응!”

폐하라는 소리도 오늘따라 굉장히 거슬렸다. 평소, 둘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던 이름은 어디로 가고 또다시 폐하인가. 그가 아프게 왼쪽 가슴을 움켜쥐자 바로 로엘의 입가에서 신음이 나왔다. 이미 그의 키스로 열이 올라 앙증맞은 끝이 단단해져,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단번에, 그 얇은 천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녀의 뽀얀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여전히 부끄러움을 타는 그녀가 애써 그를 밀며 뒷걸음질 쳤지만, 에단은 절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보다는 가볍게 그녀를 뒤로 밀어 기어코 침대 위로 눕혔다.

“폐하. 잠시만요. 제 말을 좀……!”

또 폐하. 정말 에단의 화를 돋우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드러난 가슴을 입에 머금었다. 혀끝으로 아프게 정점을 자극하며, 다른 한 손 역시 거칠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로 인해 더 예민해져 버린, 이 기분 좋은 풍만한 감촉은 만지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 모두를 달아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읏. 응!”

그에 더해 그는 그녀의 가장 예민하고 은밀한 그 중심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거칠게 지분거리는 그 노골적인 손놀림에 로엘은 바로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이제는 그가 닿기만 해도 몸의 스위치가 켜지는 그런 기분이다. 바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그 아래에 열이 쏠리는 기분이 확 들었다. 움찔거리며 물이 차오르는 이 느낌. 저절로 다리를 오므리고 힘을 주어 몸을 긴장시켰다.

“왜 안 온 거야.”

본능적으로 그녀의 몸이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열이 오르는 건 맞았지만, 너무 사납게 몰아치는 그에게 적응하지 못한 채 저절로 방어 본능이 일어났다. 몸을 열기보다는 더 단단히 오므리고 닫아 버리는 그녀의 태도에 그의 이성이 더 날아가 버렸다.

이미 한 번 거절당했는데, 또 한 번 그를 거절한 셈이다.

“아윽!!”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힘을 쓰고야 말았다.

“하아. 폐하……!”

힘으로 그가 안으로 들어차자, 로엘은 바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지 않아도 지난밤, 그의 거칠고도 집요한 사랑에 지친 상태였다. 얼얼한 곳에 또다시 억지로 가득 찬 그를 로엘은 힘겹게 받아들였다.

“데릭 테바로스라도 추억하고 싶었던 건가.”

“에단!!”

거기에 이리 못된 말이라니.

로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갑작스레 들어찬 그가 버거웠지만, 한 편으론 반기고 있는 자신에게 얼마나 이 남자에게 자신도 미쳐 있나 싶다.

문제는, 그를 열렬히 반기고 있는 그녀의 몸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 읏!”

그래서 그녀의 저항에도, 그는 억지로 움직였다. 그가 힘으로 그녀를 내리누르면 그녀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아니, 이건 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몸이 이제는 너무도 에단에게 익숙해져 있어서, 그녀는 그를 거부하는 법을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아! 응!”

아픔은 이내 가시고, 그가 주는 짜릿한 감각이 그녀를 저절로 움직였다. 이미 남자가 주는, 여자로서 느낄 수 있는 이 쾌감을 알아 버려서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과는 관계없이, 그를 찾았다. 자신에게 들이치는 익숙하면서도 절대 익숙하지 않은 이 뜨거움을 놓치지 싫어 계속 빠져나가는 그를 붙잡았다. 그것이 더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에. 아! 에단, 응!”

살과 살이 마찰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워 갔다. 그 리듬에 맞추어 그녀의 새된 소리가 울려 퍼지고, 격렬한 움직임에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도 뒤섞였다. 흔들리는 새하얀 가슴을 세게 움켜쥐며, 신음까지도 삼켜 버리는 키스에 그는 그녀가 조금도 다른 생각을 하게 두지 않았다.

“아……! 너무……!”

자극적이었다. 이미 그녀의 약한 부위는 훤히 꿰고 있어 그는 이리 짐승처럼 달려드는 와중에도 그녀를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 속에서 울게 만들었다. 안에서부터 깊게 들쳐 올리는, 뜨겁고도 단단한 그가 너무도 선명히 느껴져 로엘은 진즉에 정신이 아득했다.

“으응……!”

그렇게 기어코 그녀의 안에 다시금 그의 뜨거움이 가득 찼다. 잘은 진동이 이어지고, 그녀는 허리를 들썩였다.

“하아. 하아.”

얕은 숨을 헐떡이며, 그녀는 이내 긴장했던 몸을 이완시키고 축 늘어졌다. 뒤늦게 그 역시 마지막의 마지막 진동을 끝내며 겨우 그녀를 놔주었다. 그 순간 그녀는 왈칵 눈물이 났다.

“흐윽.”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그는 그녀의 말을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쉼 없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게 아닌 거 알면서……!”

크기도 한 그 눈망울에서 굵은 눈물이 쉼도 없이 흐르자, 에단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로엘은 이제야 자신을 제대로 봐주는 그가 더 미워서, 오히려 눈물이 더 났다.

“내가 잘못한 거 나도 알아요. 나도 당신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 나도, 지나간 과거로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다고!”

서럽고, 또 서러웠다. 그냥 자신의 이 상황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의 탓이었으므로.

“당신이 미워. 이렇게 못되게 굴어도, 당신을 기다리는 내가 싫어. 당신의 눈길 한 번. 말 한 마디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왔다 갔다 하는 내가 너무도 싫어.”

로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 애 같은 투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눈물로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그녀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로엘.”

“부르지 마요. 당신, 진짜 너무 미워.”

그녀의 진심을 뒤늦게 듣자, 에단은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도, 이런 식으로 그녀를 안고 싶었을 리 없다. 보기도 아까운 여인인 것을.

“내가 잘못했어.”

그가 부드럽게 다시 그녀를 안자, 그녀는 바로 그의 가슴을 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물론, 그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지만.

“네가 계속 나를 피하니까, 그러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당신이 그랬지.”

“네가 그랬어. 네가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안 걸어서. 멋대로 가 버리고, 나를 기다리지도 않아서. 거기에 불러도 오지 않았잖아.”

에단의 입에서 쉬지 않고 말이 나왔다. 너무도 유치한 그런, 투정 어린 말들이.

그 말에, 로엘의 눈물이 뚝 그쳤다.

이 남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왔는데 너는 나를 피하기만 하고, 싸늘하게 대했잖아. ……이름도 안 부르고.”

“풉.”

결국 그녀의 입에서 웃음이 나오고야 말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보려는데 그가 더 세게 그녀를 품에 안아 자신을 숨겼다.

그녀가, 이리 비웃을 줄 알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기 싫었는데 아무튼 이 여자는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무서운 여자다.

“지금 너무 귀여운 거 알죠?”

“조용히 해. 나 화났어.”

“나는 무서웠어요. 에단. 내가, 너무 당신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에 에단은 살짝 팔에서 힘을 풀어 품에 안겨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고개를 들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그를 마주하였다.

아름다운 사람. 어디서든 빛이 나는 나의 황제.

“에단. 내가 그랬죠.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여자가 되진 않겠다고. 사랑에 눈이 멀어 평생을 사랑하는 이에 울고 웃는, 그러다 그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혼자가 되는 그런 불쌍한 삶을 살진 않겠다고. 그런데, 나는 아까 당신의 부름에 내가 인지하지도 못했던 내 서운함과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쁨을 마주하였어요. 그러고는 내가 이미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무서웠어. 이러다 정말로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할까 봐.”

그의 셔츠를 움켜쥔 그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주책맞게도 또다시, 멋대로 눈물이 고여 갔다.

“그렇게 당신의 눈 밖에 날까 봐. 그렇게, 내가 너무도 싫어하는 황궁 여인의 삶을 살게 될까 봐.”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눈으로 이리 바라보는데 왜 이 시선이 이리도 아픈지. 로엘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도통 눈물은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에게 갈 수 없었어요. 당신이 나를 불러 준 게 너무 기뻐서. 그게 무서워서. 이런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서, 괜한 자존심에 또다시 당신과 싸우게 될까 봐. 그래서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리 와 버리시면 어떡하나.

그녀의 결심과 노력이 단번에 수포를 돌아가 버리는데.

“……진짜 바보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단은 결국 한숨이 가득 섞인 한마디를 뱉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눈가에 눈물을 닦아 주며, 그는 그녀와 이마를 맞대었다.

“나의 비께서 언제부터 이리 바보가 되셨나. 내가 아는, 나의 아카시스는 놀라울 정도로 영특한 여인인데.”

그의 나긋한, 그녀에게만 들려주는 목소리를 그녀의 귀 안에 울려 퍼졌다. 다정함이 가득한 그의 눈길과 손길에 그녀의 서러움이 더 폭발해 버렸다. 이 따뜻함이 익숙해질까 봐 무서운 건데, 또 이렇게 한없이 따뜻해 버리면 그녀는 어쩌라는 건가.

“네가 그렇게 말하면, 속도 없이 거절당하자마자 달려온 나는 뭐가 돼.”

그는 또렷이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여자의 두려움을 그는 너무도 잘 안다.

정확히, 그가 느끼고 있는 바로 그러한 두려움이니까.

“로엘. 내가 왜 너에게 달려왔을까. 내가 왜 너에게 그리 화를 냈을까.”

로엘도, 그리고 그도 아는 그 답. 로엘은 자신을 바라보는, 황금의 눈동자를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응시하였다. 늘 그녀가 그 황금의 눈동자에 가득 담기고, 그가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오롯이 서로만을 바라보는 이 눈. 이 눈이 다른 이를 담을까 봐 불안한 거다.

그도, 그리고 그녀도.

“살면서, 단 한 번도 무서운 것이 없던 내가 네가 무서워. 너를 잃을까 봐. 혹여 네가 다른 사람에게 갈까 봐. 그렇게 내 곁을 떠날까 봐.”

그래서 에단은 그녀에게 그의 마음을 전했다. 그녀의 마음이 곧 그의 마음이라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네가 걱정하는 만큼 나도 걱정하기에 나는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네가 데릭 테바로스와 관계될 때마다 내가 왜 화를 내는 줄 알아? 못나게도 나는 너에게 불안하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네가 혹여나, 지나간 인연에 흔들릴까 봐. 그렇게 나를 버리고 그놈을 쫓아갈까 봐.”

이번엔 로엘이 자신을 뺨을 감싸고 있던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이 말이야말로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가.

“그럴 리 없잖아.”

“알아. 알면서도 불안한 거야. 내가 너를, 속도 없이, 너무도 많이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아. 이러면 또 어쩌라고. 로엘은 그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단 한 순간이라도 나를 피하지 마. 네가 그러면, 나는 덜컥 겁이 나니까.”

“진짜…… 당신은 바보야. 내가 당신을 피할 리 없잖아.”

로엘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자신의 이기적인 도망에도 또다시 이리 먼저 와 안아 주는 그에게 그녀는 또 붙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또다시 그에게 미안해지고 말았다.

“내가 어딜 가겠어요. 이리,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로엘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꼭 안자, 에단 역시 바로 그녀의 허리를 품에 안았다. 조금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안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아니 얼마간 떨어져 있었다고 이리 애절한지.

둘 다 너무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들인데, 서로에 대해서는 서로가 바보가 되어 버렸다.

“내 사랑. 나를 사랑해 주세요.”

그러니, 이 감정이 사랑인 거겠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고 있어.”

한 해가 저무는 마지막 날이자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인 그 밤.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아무리 확인하여도 불안한 바로 그 마음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지기만 하는 바로 그 감정을 말이다.

***

한 해의 시작이자 토르티아 원정의 첫날이 될 1월 1일.

아침 햇살이 드리우는 그녀의 발코니로, 장장 2시간에 걸쳐 준비를 끝낸 그녀가 나왔다.

날이 날인 만큼 헤더가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로엘은 평소의 자신의 몸집보다 두 배는 커진 듯한 느낌이다. 오늘만큼은 카이로스를 상징하는 것들로 온몸을 꾸미느라 드레스부터 장신구까지 온통 금색뿐이었다.

카이로스의 문양을 참 다양한 형태로 녹여 낸 온갖 것들을 보며, 로엘은 작게 중얼거렸다.

“화려하네.”

그녀의 시녀들이 워낙 열심히 준비해 준 것인 만큼 흐트러트리고 싶은 마음은 그녀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도 겨울바람이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겨우 한숨을 돌리려 나왔다.

물론 그 작은 걸음 한 번에도 흔들리는 것들이 아주 많았지만.

로엘은 조심스럽게 발코니 난간을 잡아 몸을 지탱하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바람이 새벽부터 준비하느라 조금 멍한 상태인 그녀의 정신을 깨워 주었다.

“저기도 화려하네.”

로엘은 출정식을 위해 모인 카이로스의 군대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신년제를 위한 높디높은 신전이 세워지고, 그 아래 북방의 출정을 고하는 제단도 준비되었다.

황제의 아카시스로서, 그리고 이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로서 로엘은 오늘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 자리 가장 높은 곳에 선다.

“화려해야지.”

한동안 밖을 내다보고 있던 그녀 뒤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웅장하기도 하고요.”

“그 또한 그래야지. 필요하다면.”

그녀만큼이나 참 준비가 오래 걸렸던 그는 준비가 끝나자마자 눈에서 안 보이는 그녀부터 찾았다. 은근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그녀라, 에단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겨울인데, 저렇게 어깨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도 저리 태연하다.

저러다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나.

에단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가 바로 그녀부터 품에 안았다.

“당신도 그러하고.”

갑작스레 등장하고 갑작스레 안아도 그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가슴에 좀 더 몸을 기대면서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이로스의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의 도포는 오늘따라 더 거대하고 화려했다. 부드러운 고급의 모피로 장식되어 닿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로엘은 좀 더 편히 넓은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당신 되게 황제 같다.”

“원래 황제야.”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출정식장으로 향해 있었다. 제법 추운 한겨울이었지만,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끄떡없다는 표정으로 절도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군대는, 저도 처음 봐요.”

“쉽게 모일 수 있는 숫자는 아니지.”

여기에 모인 저들이 몇이나 될까. 수만 명에 달하는 그 거대한 인원들이 카이로스의 깃발 아래 카이로스의 문장을 달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모인 거다.

그러니 그 한 사람의 어깨에 도대체 얼마의 부담이 올라간 건가.

로엘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을 단단히도 안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실까.”

“그냥…… 당신은 진짜 대단하다 싶어서.”

“그것도 원래부터 그러했어.”

에단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머리로만 상상하던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막연히 서류상으로만, 생각만으로만 언급되던 그 숫자들. 그 숫자만큼의 사람이 실제 눈앞에 도열해 있는데 어떻게 그 무게감이 같을까.

저 많은 사람들 중 얼마는 죽고, 얼마는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마음의 짐. 당연히 그들을 그 전장에 이끌게 한 자. 그리고 전장에서 그들을 지휘한 자. 그러면서도 지켜 주지 못한 자.

즉, 에단이 지는 거다.

“……내가 덜어 줄게요.”

로엘은 그걸 마음 아파하고 있는 거다.

“아니. 덜어지진 않겠네. 함께 부담할게요.”

프란시아로서. 그리고 그의 여인으로서.

“그래.”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에단은 충분히 그녀의 마음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품에 쏙 들어오는 그녀는 그와 비교해 너무도 작았다. 이 작은 어깨와 여린 팔로 무얼 그리 열심히 안으려 드는 건지.

에단은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녀가 그저 고압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꼭 지켜 줄게요.”

로엘은 자신을 안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보다 두 배는 될 거 같은 큰 손.

곱게 자란 티가 나는 보들보들한 손등에 비해, 얼마나 검을 많이 잡았는지 손바닥은 굳은살이 아예 박혀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펜을 잡은 곳은 이미 뭉그러져 모든 것이 완벽한 그의 신체에서 유일한 상처였다.

그래. 이 손만 보아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한눈에 보이지.

“꼭 지켜 줄게.”

그는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는지라,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지금 얼마나 결연한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말 좀 하지 마. 지켜 준다가 아니라 지켜 달라고 좀 해.”

“나는 내가 지켜요. 당신은 당신만 생각해.”

“그것도 네가 아니라 내가 할 소리고.”

에단은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정말 그의 마음을 모르나 보다.

저 많은 인원의 군사를 보며 그를 걱정하면서, 왜 저들을 데리고 가는 이 큰 전쟁에 그녀를 데리고 가는 그의 마음을 모를까.

마음 같아서는, 그저 황궁 가장 깊숙한 곳에 두고 조금도 다치지 않게, 조금도 위험하지 않게, 그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그렇게 편히, 곱게 살게 하고 싶은 것을.

괜한 그의 욕심에 그녀를 사지로 데려가는 거 같아 내내 마음이 좋지 않다.

지금, 이리 진짜 여신 같은 모습으로 프란시아라는 가장 큰 부담을 안긴 채 모두의 앞에 세우려는 이 순간에도 그의 마음엔 갈등이 휘몰아치는 중이다.

이제라도, 다 그만두고 그냥 여기서 그를 기다리라고, 그리 말해야 하나 싶어서.

“있잖아요. 에단. 데릭 황제가,”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한껏 서로를 위하는 애절한 분위기가 그 이름 하나에 바로 깨졌다. 눈썹부터 찌푸리는 그의 반응에 로엘은 한숨을 삼켰다.

이렇게 싫어하시면서 어떻게 동맹은 맺으셨는지. 공과 사가 확실하다는 걸 진짜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다.

로엘은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당신에게 숨기지 않으려고. 다 말하고 싶어서 말 꺼내는 거예요. 시기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 붉은 눈동자는 꽤나 단호했다.

뭐가 이리 당당하신지. 숨겨도 모자랄 판에, 지나치게 솔직했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묘한 기분이라 에단이야말로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데릭 테바로스의 일로 다시는 그와 싸우지 않겠다는. 아니 그를 화나게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은 그가 이해한 것과 다른가 보다.

그에게 솔직해지는 것은 감사하나, 그가 원하는 것은 솔직해질 일이 애초에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임을 이 여자가 알아들은 것인지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그가 모르는 데릭 테바로스와 그녀와의 일이 있는 건 작은 거라도 싫으니, 일단 들어 봐야겠다.

화내는 건 나중에 하더라도.

“해 봐.”

“벌써 화나신 거 같은데.”

“맞으니까, 그냥 해.”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드러난 목덜미로 올라갔다. 정확히, 그가 선명히도 남겨 놓은 흔적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훑자 바로 발갛게 드러났다.

애써 헤더가 열심히 덮어 놓았건만. 로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일부러 이러는 걸 너무도 뻔히 알았으니. 이러면 더 말하기 어려워지는 것을 왜 모를까.

“데릭 황제가 찾아왔어요. 폐하가 원로회와 마지막으로 회의하시던 그날 밤. 제 방으로.”

“뭐라고?”

역시나 격한 반응이 바로 나왔다. 그는 바로 안고 있던 팔을 풀어 그녀를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돌렸다.

바로 굳어진 그 얼굴에 로엘도 순간 흠칫했다. 역시나 괜히 말한 건가 싶어서. 그냥 그대로 덮어 두었으면 되었던 것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뒤늦은 생각이 마구 올라왔으나 그래도 이내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데릭 문제만큼은 정말 더 이상 이 사람에게 그 어떠한 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그에게 그녀에게 있어 데릭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알려 주고 싶었으니까.

“저도 놀랐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아플 지경이었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은 저 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냐고 묻고 싶지만, 묻고 싶지 않은 그 뻔한 생각이 훤히 드러났다.

그래서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열러 있던 제 방 발코니로 들어왔고, 저는 자고 있었어요. 그 목걸이, 다시 돌려받았고 대화를 했고. 그리고…….”

그녀가 말을 하면 할수록 눈에 띄게 그의 눈이 살벌해져, 로엘은 마지막 말을 하려다 잠시 말끝을 흐렸다.

정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고민이 되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키스당했고, 당신이 보았던 그 자국도 생겨 버렸어요.”

아무리 결심을 해도 역시나 심장이 뛰었다. 식은땀마저 나는 거 같았다.

에단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부단히, 속으로 화를 억누르는 게 보였다.

밖에는 시종들과 시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더 밖으로는 신년회 준비에 웅성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울렸다.

그 와중 이 차가운 침묵이라니. 로엘은 한 번 더 시기를 잘못 잡았단 생각이 마구 들었으나, 더 이상 지체하다간 영영 말하지 못할 거 같아 저질러 버렸다.

“……그래.”

그런데, 그 숨막히는 정적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그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친 채,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드레스를 꼭 쥐는 그녀의 손을 그는 부드럽게 잡았다.

그래서 순간 로엘은 깜짝 놀랐다.

“다음부턴 그렇게 두지 마.”

그리고 울컥했다. 이 남자가, 너무도 미안할 정도로 그녀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 주어서.

“다음은 없어요. 있으려 하면 죽여 버릴 거야.”

바로 받아치는 그녀의 말에 그가 피식 웃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윽박질러서 혼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이번엔 그가 참았다.

데릭 테바로스로 인해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은 것.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가능하긴 한 거야?”

“당신. 진짜 가끔 나를 너무 무시하시는데요, 제가 어디 가서 막 지고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자주 지던데.”

“내가 언제요?”

“이반한테도. 나한테도.”

“그건 애초에 비교 선상의 사람들이 아니잖아!”

로엘은 바로 발끈했다. 이래서 천재들과는 말을 섞으면 안 되는 건데, 기준 선부터가 다르니 무슨 말을 더 하랴.

아무튼 은근히 사람 자존심을 건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는 다시금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아 그녀를 한 걸음은 더 가까이 당겼다. 순순히 그가 당기는 대로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간 만큼 거리가 좁혀졌고, 그만큼 로엘은 그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고개를 더 들어 올려다봐야 했다. 그렇게 똑바로, 그의 아름다운 황금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 목걸이 받았어요.”

“어째서.”

“그래야 끝이 날 거 같아서.”

조금, 그녀의 허리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었다. 그것이 고스란히 느껴져, 로엘은 작은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결심을 해도, 여전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앞에서, 데릭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파이어는 테바로스의 황태자가 아닌 황자를 상징해요. 그러니 그 사파이어는 곧 그에겐 절대로 황제가 될 수 없다는 낙인 같은 것이었지요.”

어쩌면 그래서 테바로스의 황실은 더 일부러 그리 눈에 띄는 보석들을 황자들에게 주었는지 모른다. 황태자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와 색이 선명한 유색 보석들이 절대 헷갈릴 수 없듯, 애초에 황태자와 황자는 전혀 다르다고. 그러니 황자라면 황제 자리, 꿈도 꾸지 말라고.

“그래서 참 지독히도 싫어하고, 그 아름다운 것을 너무도 족쇄로 여기는 거 같기에, 어린 마음에 달라고 했어요. 황자님이, 황제가 되는 그날에.”

에단은 작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어린 마음에 한 말이라.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 놓았을 말인 듯한데, 이 순진한 여자는 아직도 그를 모르나 보다.

그 데릭 테바로스가 그 오래된 약속을 지키려, 무려 이 카이로스까지 왔음에도.

“일종의 증표였는지도 몰라요. 저와 그 사람 사이에.”

그럴지도 모른다가 아닌, 누가 봐도 명백한 증표다. 그것도 미래를 약속한, 남자와 여자의 증표. 역시나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데릭 사이의, 그가 모르는, 그래서 어찌할 수 없는 그 과거의 추억들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대로 그가 모르는 데릭과의 일이 있는 건 더 싫으니 그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래서 받았어요. 그걸 주어야 끝이 날 거 같다는 그 말에 저도 어느 정도 공감했으니까요.”

그녀 역시 그 사파이어를 그 오랜 시간 만에 다시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반가워하고 말았다. 참 멀리도 돌고 돌아, 드디어 그녀가 그 사파이어를 받게 되었구나 싶어서.

그제야 실감이 되었다. 데릭이 진짜 테바로스의 황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아마 절대로 제 목에 걸 일 없는 목걸이겠지요. 아니, 꺼내 볼 일도 없겠지요. 그래도 받아야 할 거 같아요. 저는 끝을 내고 싶었으니까요. 저와 그 사람의, 우연으로 시작된, 그렇게 이어진 그 인연을.”

로엘은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추억에 잠겨 감상에 빠져 있는 것도,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덤덤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단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추억과 현실의 어디쯤에서, 지나치게 감성적이지도 지나치게 이성적이지도 않은 지금의 그녀의 반응이.

말 그대로, 정리를 하고 있는 거다.

추억도. 인연도. 조금은 남아 있었을지 모르는 그 감정이란 것도.

“그렇게 저는 과거의 저와 데릭 황자의 인연을 끝냈습니다. 상호 합의하에, 완전히.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상호 합의라. 에단은 속으로 작은 비웃음을 뱉었다.

누구 마음대로 상호 합의라고 하는 건지. 아마 데릭 테바로스가 대놓고 그랬다면 그자는 거짓말을 한 거다. 인연이라는 것이 그렇게 말로써, 가위로 실을 자르듯 쉽게 잘라 낼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데릭 테바로스 본인 자체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에단이 잘 안다.

그는 그저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 목걸이를 그녀에게 줄 명분. 그렇게 한 번이라도 그녀를 더 만날 명분.

그러함으로써 그녀의 추억을 소환시키고 그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녀 안에서 흐려지는 자신을 다시금 선명하게 만드는 그런 얄팍한 수법.

“그래.”

하지만, 그러함에도 에단은 로엘의 순진무구함을 탓하지 않았다. 혼내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 명분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리 카이로스에 호위 하나 없이 홀연히 온 데릭 테바로스의 노력이 가상해서가 아니다.

“잘했어.”

데릭 테바로스의 그 명분뿐인 말들이, 적어도 그녀에겐 단순한 명분으로 끝나지 않음 역시 에단은 알고 있었으니까.

“네가 끝냈으면 된 거야.”

에단은 작은 미소와 함께, 그의 반응을 긴장하며 기다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데릭의 마음과 생각 따위. 에단은 조금도 중요치 않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일 뿐.

그녀가 끝을 내었다면, 그걸로 된 거다.

“네. 폐하.”

그거면 충분하다. 지긋지긋한 그놈의 정혼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올 일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에단은 만족하고도 남았다.

“이제 내가 들은 건 다 들은 건가?”

“……아니요.”

로엘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충분히 말하기 힘들었는데 더 힘든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어쩌면, 지금 이 이야기를 시작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데릭이 그날 밤 그녀의 방을 찾은 진짜 이유이기도 한 바로 그 이야기. 로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시 한 번 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무슨 이야기가 더 남았길래 이리 비장해.”

“……당신이 화낼까 봐 미리 긴장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화낼 이야기란 소리군.”

“네.”

어느 정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터라 놀랍지도 않았다.

그날 밤 그녀를 그냥 자신의 집무실에 두지 않은 것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주 많이 후회될 뿐. 아니면, 그가 그녀의 방을 그날따라 찾아가지 않은 것을 탓해야 하나.

아니다. 만일 그가 그녀의 방에 들어갔을 때, 데릭 테바로스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보았다면 그는 정말로 그자를 죽여 버렸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더 깔끔했으려나.”

“네?”

“그보다는 말도 안 되게 시끄러워졌겠지.”

앞뒤 자른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로엘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그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또 한 번 쓸어 줄 뿐이었다. 무려 아카시스의 방에,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는데 더 놀랄 일이 무엇이 있겠나 싶기도 하다.

“해 봐. 나야말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을 테니.”

에단이 작은 한숨을 쉬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로엘은 조금 뜨끔했다. 충분히 더한 말을, 아니 훨씬 더 어마어마한 말을 할 예정이었으므로. 로엘은 크게 숨을 들어마시고선 결심을 끝냈다는 얼굴로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데릭 황제가 그랬어요. 테바로스 황자와 토르티아 공주와의 정혼은 끝났다고. 그러니, 이제는 테바로스의 황제로서, 되찾으러 오겠다고.”

역시나, 에단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 버렸다.

아니, 굳어 버린 정도가 아닌 서슬 퍼런 살기가 순식간에 번졌다.

“뭐라고?”

감히 누굴 되찾아?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에 바로 과한 힘이 실렸다. 그녀의 가는 허리를 꺾어 버릴 듯한 그 힘에 로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격한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감히, 한낱 북방의 황제 따위가 카이로스의 아카시스를 되찾아 가겠다고?”

“폐하.”

“누구 마음대로.”

그를 진정시키려는 그녀의 말이 제대로 들어올 리 없다. 머리를 띵하게 하는 그 정도로 어이가 없는 말에 에단은 분노가 치밀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머리가 뜨끈해지는 거 같았다.

‘되’찾는다니. 한순간도 가져 본 적 없으면서 어디서 뻬앗겼다는 듯이 말하는가.

“너는 내 거야.”

옛날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 너무도 치기 어린, 그를 찌푸리게 만들었을, 그가 참 한심스럽게 생각했을 법한 이 한마디가 이리 쓰일 줄이야.

“처음부터, 영원히 내 것이야.”

그런데 그 한마디가 그의 정확한 대답이었고.

“네, 맞아요.”

그녀는 기꺼이 그 대답을 받았다. 로엘은 손을 뻗어, 무섭게도 정색하는 그의 양 뺨을 감쌌다. 그렇게 정확히, 살기가 등등한 그의 황금 눈을 똑바로 응시하여 자신을 그의 눈에 담았다.

“저는 폐하의 것이지요.”

로엘 역시, 평생 하지 안 했을 법한 말. 그 말이 너무도 쉽게 망설임 없이 나와 버렸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여자는 물건이 아니라고. 그 누구도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로엘이 참 많이도 했던 말이다.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그러함에도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답하였다.

자신은 에단, 당신의 것이라고.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건 변하지 않아요.”

사죄를 하여도 부족할 판에, 로엘은 그 말을 하는 순간 괜히 울컥해 버렸다.

자신의 마음이 너무도 진심임에 스스로가 놀라서.

그러한 이 순간이 너무도 감사해서. 그리고 혹여나, 그러지 못할까 두려워서.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단. 나의 폐하. 저는 다짐했어요.”

그렇게 갑자기 키스를 당하는 그 순간에도.

머리를 띵하게 만들 만한 그 멋대로인 말에도.

그녀는 오히려 마음을 단호히 먹었다. 그리고 감성에서 나와 더욱 정신이 또렷해졌다.

“반드시, 이 자리를 지키겠노라고.”

데릭이 말했다. 아카시스인 그녀는 필요치 않다고.

그런데 어쩌나. 그녀는 이 아카시스 자리를, 그리고 이 나라의 프란시아를 지켜야겠는 것을.

“그렇게 당신의 곁에, 최선을 다해 남겠노라고.”

로엘은 결연한 눈으로, 똑바로 그를 쳐다보며 너무도 단호히 말했다

“그 누가 찾아와도, 그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절대 그러하겠노라고.”

그래서 이번에도 에단은 웃고야 말았다.

지금까지 논의하고 고생했던 그 모든 테바로스와의 동맹 결정을 단번에 엎어 버리기 바로 직전까지 왔는데, 그녀는 단번에 그를 다시 붙잡아 주었다.

“저는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폐하.”

그녀를 아프게 안았던 팔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 다시, 언제나 그녀를 바라보는 그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에 이리도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니.

그야말로 두렵다. 이 여자에게, 너무도 미쳐 가는 자신이.

“……그래.”

그걸 알면서도 이 여자를 놓지 못하는 자신이.

이러다, 이 여자가 사라지면 어찌 살까.

“그 누가 와도 주지 않아.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놓지 않아.”

아마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거다.

에단은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단단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 역시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의 진심에 그런 그의 목을 꼭 안았다.

“나는 네 것이야.”

어떻게 이 남자를 두고 추억 따위에 흔들릴까.

이번에는 그를 안은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네. 당신은 내 거야. 절대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거야.”

데릭은 그녀를 추억 속에 잡아 두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다.

“평생. 영원토록 그럴 거야.”

그러기엔, 이미 그녀는 이리도 현실을 살고 있으니.

추억과 현실의, 그 어디쯤 머물고 있던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씩 그에게로 가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현실로 나아가고 있다.

“나도.”

너무도 아름다운, 이 빛나는 남자 옆에서.

그녀 역시 그와 같이 빛나길 바라며. 그렇게 그의 곁에서 평생 함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명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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