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황제께 붉은 월계수 꽃을 4권
연아 장편소설
목차
Chapter 34. 마지막에 웃는 자
대개는 에단이 먼저 눈을 뜨지만, 가끔 그녀가 먼저 눈을 뜰 때가 있다. 애초에 잠에 잘 들지 못하는 그라서, 그리고 유난히 잠귀가 밝은 그라서 로엘은 먼저 눈을 뜨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잠든 그를 바라만 보고 있다.
그러다 그가 눈을 뜨면 환희 웃으며 말한다.
‘잘 잤어요?’
그 미소가 너무도 눈이 부셔서, 에단은 매번 따라 웃지 않을 수 없다.
해가 오르기 시작하는 여명의 시간.
그녀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하늘을 바라보며, 에단은 유독 그녀가 아른거렸다.
‘푹 주무시던데.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가녀린 어깨에 붉은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흘러내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넘겨주겠지. 그럼 그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아 품에 당길 거다.
‘좀 더 자요. 아직 아침이 되려면 멀었어.’
‘그럼 다른 걸 하고 싶은데.’
‘어휴. 정말!’
부드러운 살결. 달콤한 향기. 따뜻한 체온.
그만을 빤히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까지.
하나같이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맞는 아침마다 그녀를 품에서 놓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폐하. 루카스 장군께서 성문을 열었습니다. 계획대로 바로 퇴각 중이시며, 루카스 장군을 따라 테바로스 군대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굳이 보고하지 않아도, 에단의 눈에도 전부 상황이 들어왔다.
역시, 루카스가 마음먹고 달려들면 막을 자가 없다. 프래카들과 함께였지만, 그들 중에서도 제일 앞서서 달려 나가 순식간에 성벽을 넘어 버렸다. 그런 그가 성안에 안착하여 두 발을 땅에 딛고 싸우는데 당황한 병사를 상대하는 것쯤. 수십이 달려들어도 끄떡없다.
“이반 전하의 부대도 막 전투를 시작했군요.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게 눈에 보입니다.”
아론의 덤덤한 보고에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루카스는 훨훨 날았으며, 이반 역시 마음먹고 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확실히 승산 있습니다.”
아론은 에단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제법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아직 몰라.”
그러나 에단의 대답은 그 확신에 미치지 못하였다.
심각한 눈으로 계속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말의 고삐를 다시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쪽 손을 들자,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정예 기마병들이 그에 맞추어 출발 대기를 하였다.
아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계속 이곳에 계셔서 안위를 돌보시면 좋으련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저 피 튀기는 전장 한복판으로 가시려나 보다.
“생각보다 대응이 빨라.”
그리고 생각보다도 숫자가 많다. 단순히 머릿수만 많은 것이 아닌, 그 실력도, 대응도 생각 이상이었다. 새벽의 기습으로서,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법인지라 저들이 좀 더 당황할 줄 알았는데, 처음 루카스의 침투까지는 우왕좌왕했으나 데릭이 등판한 후부터 눈에 띄게 달라졌다. 바로 기강을 잡고, 제대로 열을 맞추어 총공격에 돌입했다.
“확실히 저 데릭이라는 젊은 황제, 상황 판단이 빠릅니다. 총공격할 생각이 없었을 텐데도, 이 상황을 판단하고 바로 결정을 내렸어요. 만만히 볼 상대는 결코 아닙니다.”
에단의 시선을 좇아 아론 역시 저 멀리 데릭을 바라보았다. 검술 실력 역시 눈에 띄었다. 무려 프래카를 상대로도 아주 잘 버티고 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카이로스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
아론 역시 에단을 쫓아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군은 폐하를 따르라!”
“예!”
아론의 명령이 채 떨어지기 전에, 에단의 말이 출발하였고 그 뒤를 황군의 기마병이 쫓았다.
카이로스와 테바로스의 마지막 에토르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했다.
***
계속되는 작은 전투에서 결판이 나지 않아 안일해진 건지. 아니면 원군이 온다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안심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 둘 다 때문인 건지 몰라도, 테바로스는 어쩌면 긴장을 풀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크게 당황했다. 만일 데릭이 재빨리 총공격을 명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들은 차례차례 테바로스 군대를 전멸시키며 밀고 들어왔을 거다.
“폐하. 피해가 커져 갑니다.”
“말 안 해도. 알아.”
새벽녘에 시작된 갑작스런 기습 공격.
순식간에 치고 들어온 루카스와 프래카에게 테바로스는 허를 찔렸다.
“루카스 세버에 대해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생각보다도 더…….”
“미친놈이네.”
데릭과 버리는 테바로스 군대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이미 흥건히 피를 뒤집어쓴 채여도 여전히 웃으며 검을 휘두르는 루카스를 보았다. 루카스가 홀로 말을 타고 파고들어 성벽을 오를 때까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제일 먼저 에토르에 올라 성벽 병사들을 죄다 몰살하고, 성벽의 도르래를 망가트리기까지, 아마 30분도 안 걸렸을 거다.
“그러고 나서도, 저 상태니……. 카이로스의 황제는 진짜 지옥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군요.”
질린다는 표현이 딱이다. 정말 루카스 세버는 질릴 만큼 강했다.
“거기에……. 또 다른 엄청난 복병까지 있네요.”
그리고 그 루카스만큼, 어쩌면 그 이상을 하고 있는 또 한 명의 황금의 사내.
“이반 카이로스가 언제부터 저렇게 강했지.”
몰려오는 테바로스 수백의 군사를 제일 선방에서 버티고 막는 자.
에단과 똑같은 황금의 머리를 흩날리며, 이반은 전쟁터에서 훨훨 날았다.
“……에단 황제가 숨겨 둔 진짜 칼이자 방패인 거지. 저 형제라는 자.”
에단이 즉위하자마자 국경 지역을 단번에 정비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이빨을 숨기고 있었던 사자인 양 그 인내의 시간을 폭발시키는 듯 이반은 놀랄 만큼이나 강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저 손에 죽은 테바로스 병사들의 목숨은 셀 수가 없다. 대놓고 날뛰는 루카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는 이 난장판 속에서 홀로 고요하였다.
그렇게 많은 생명에 영원한 침묵을 선사했다.
저 얼마나 고고하면서도 압도적인 실력인가.
“……닮았잖아.”
하필이면, ‘그자’와.
데릭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모든 걸 가진 자다. 카이로스의 황제는.
“폐하. 저기.”
그런 ‘그’가 드디어 움직인다.
이 불리한 싸움을 가능케 한 자. 이 모든 사람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하며, 가장 신의 사랑을 받는 황금의 황제.
피 튀기는 이 에토르의 마지막 전투에 황금의 깃발을 휘날리며 그가 유유히 들어왔다.
그 등장만으로도 순간 전운이 휘몰아쳤다.
압도적인 위압감. 그는 존재 자체로 그가 어떤 자인지를 증명한다.
“……제3군이 어디까지 왔다고?”
“정오 전에 도착할 거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무조건 버텨.”
데릭의 검이 다시 한 번 더 크게 휘둘러지고 다가온 카이로스의 황군의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사방으로 튀기는 핏방울 속에서, 순간 맞은 황금의 눈동자.
“폐하. 너무 깊숙이 들어가시면……!”
카이로스가 테바로스에 비해 월등한 것은 사실이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결국 테바로스에게 기울게 되어 있다. 그걸 모를 리 없는데도 어찌 저리 태연한 표정으로 있을 수 있는가.
저 여유에 항상 상대만 조급해지는 법이다.
“폐하. 좀! 위험하시다고요!”
“여기서 안 위험한 데가 어딨어.”
버리의 만류에도 데릭은 더 깊숙이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황제임을 나타내는 말과 갑옷 덕분에 자연히 프래카와 황군의 표적이 되었지만, 데릭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보는 버리의 속만 타들어 가지.
“헤에. 재밌네. 저 황제.”
그러니 루카스의 눈에도 들었다.
“그러게.”
물론, 이반의 눈에도.
네아의 정혼자라. 이반에게도 썩 달갑지 않은 과거다.
“황자님. 내 거예요. 끼어들지 말아요.”
“이번은 양보하기 싫은데.”
“그럼 내기할까요? 누가 죽이는지.”
“죽이는 건 안 돼. 폐하께 허락을 받고 죽여.”
“흠. 싫어요.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라.”
루카스는 죽어 버린 테바로스의 병사에 꽂힌 창을 빼들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데릭을 조준하여 던지자, 바로 데릭은 날아오는 창을 쳐냈다. 그러고는 정확히 창이 날라온 곳, 즉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실컷 혼나겠습니다.”
검은 지옥의 개. 루카스와 눈이 맞고도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는다라.
지금까지 루카스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그 눈동자가 진지해졌다.
저 손에 죽어 간, 카이로스의 생명이 몇이며, 이 사달을 일으켜 흘린 카이로스의 피는 또 얼마인가. 루카스의 말은 단번에 데릭을 향해 치고 나갔다.
“하아. 또 사고 치겠네.”
그리고 그와 나란히 이반 역시 데릭을 향해 나아갔다.
지금 이 전장에서 가장 눈에 띄던 그 두 사람이 데릭을 향해 가는 걸 에단이 보고 있었고, 그런 에단을 데릭이 보았다. 그의 양손에 잡힌 칼과 방패라.
“테바로스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요.”
그런 루카스와 이반을 막는 것은 버리.
버리와 테바로스 정예군은 바로 자신들의 주군에게 다가오는 루카스와 이반을 막았다.
“테바로스가 그리 쉽게 주군을 내어 줄 거라 생각하십니까?”
루카스의 검이 데릭을 향하려 하자, 테바로스 황군들의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순식간에 황제 앞에 몇 겹이고 진을 치더니, 방패를 땅에 세워 두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테바로스는 목숨으로 황제 폐하를 지킨다.”
“하!”
황자 시절부터 함께해 온, 그 풍파 많은 인생을 함께 걸어온 그의 사람들.
징집 명령에 억지로 끌려온 어중이떠중이 군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주군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된 사람들.
루카스는 그들 모두의 시체를 밟고 지나가지 않는 한 데릭에게 닿을 수 없을 거다.
“이거 진짜, 재밌네.”
루카스는 그들 뒤에서 자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데릭을 보며 씩 웃었다.
창병과 기마병은 상성이 좋지 못하다. 저들이 창을 들고 있는 한 말을 타고 있는 루카스로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저들은 보병이 아닌 창병이었다.
이 역시 저 겁 없는 어린 황제의 지시겠지.
“루카스. 너무 날뛰면 안 돼.”
그렇게 창병들은 순식간에 루카스와 이반을 둘러쌌다.
“날뛰게 만들잖아요. 고맙게도.”
그렇게 더 루카스를 자극했다. 루카스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고쳐 들었다. 이리 적극적으로 대항하신다면야 그 역시 적극적으로 죽여 주는 수밖에.
상성 따위로 루카스 세버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가소롭기도 하여라.
“루카스. 그만.”
그런데 그렇게 당장이라도 창병들 사이로 뛰어 들어갈 루카스의 고삐를 잡는 목소리가 뒤로부터 들려왔다. 언제 여기까지 오셨는지, 창창한 기마 부대를 이끌고 에단이 나타났다.
“쓸데없는 데 기운 쓰지 말고. 한 명이라도 더 죽여.”
무미건조하기도 한 한마디. 그러나 그 짧은 명령은 테바로스의 군사들에겐 꽤나 섬뜩했다.
한 명이라도 더 죽이라는 말을, 그것도 충분히 그러할 수 있는 이에게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마치 죽음을 선고하러 온 사신 같지 않은가.
그렇게 데릭은 드디어, 그를 마주하였다.
“칫. 폐하는 꼭 내가 재미를 보려면 판을 깨시더라.”
“시끄러. 너는 전쟁이 장난이냐.”
이 와중에도 루카스에게 핀잔을 잊지 않는 아론이 손을 들어 앞으로 뻗자, 대기 중이던 기마 부대 뒤에 있던 보병 부대가 앞서 나왔다.
기마병에게 창병이 상극이라면, 창병에겐 보병이 상성이므로.
순식간에 전세가 바뀐 그 진형에 데릭은 주먹을 쥐었다.
정말, 어디까지 그를 방해할 생각일까. 저 황금의 황제는.
“폐하. 카이로스의 보병은 자타공인 최강입니다.”
카이로스 부대 중 최강이 아닌 부대가 있던가.
데릭은 버리의 말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끝까지 참 어렵게 간다.
“그래 봤자, 우리보다 월등히 수가 적어. 정오까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까지 버텨.”
데릭은 에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데릭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마 저 잘난 황제는 전부 알고 있겠지.
그래서 이렇게 서두르는 거다. 그들에게 원군이 오기 전에 끝내기 위해.
하지만, 데릭 역시 에단의 생각을 꿰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얼마나 버티느냐의 싸움.
“그렇다면, 내가 이겨.”
패전을 모르는, 실패가 없는 고고한 에단 황제께서는 버텨 본 적이 없으실 테니.
일생을 버티고 또 버텨 온 데릭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서 함께 버텨 온 이들이 지금의 황군. 이미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마음 따위 그 누구에게도 전혀 없다.
“……짜증 나게 하네.”
황금의 검 끝에서 또 한 명의 생명이 사그라들며, 에단은 낮게 읊조렸다.
생각보다도 더 테바로스가 끈질겼다.
“폐하. 이대로는 시간만 끌게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어.”
아론의 말을 이반이 이었다.
두 사람이 굳이 짚어 주지 않아도 에단 역시 충분히 느끼고 있다.
이거 정말 좋지 못하다고.
루카스와 이반은 일당백을 하고 있었고, 여전히 펄펄 나는 루카스를 보건대 앞으로 몇 시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 같았다. 거기에 에단까지 마음 잡고 나선다면 아마 세 사람의 손끝에서 죽어 나가는 테바로스의 시체만 산더미일 테지.
문제는 그런다 한들, 그들은 셋뿐이란 사실이다.
그에 비해 몰려드는 이들은 수만 명이고.
보통 루카스가 선봉에서 날뛰어 주면, 지레 군사들의 사기가 꺾여 항복하는 이들이 늘고, 이내 수장이 겁에 질려 백기를 든다. 그런데 테바로스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더 많이 죽어 나갈수록 더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아무리 쓰러트려도 또 일어나는 이들은 카이로스의 군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월등한 실력 차이일지라도. 월등한 군비 차이일지라도.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덤벼드는 수만의 군대에는 방법이 없는 법이다.
“거기에, 군사가 몰려오고 있어.”
에단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이반의 말대로 이 상태가 지속되다간, 몇 만인지도 알 수 없는 테바로스의 지원군까지 상대해야 한다. 그건 정말로 위험하다. 지금도 몇 배에 달하는 군대를 상대하느라 지쳐 있는 카이로스 황군들을 단번에 전멸시킬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반은 말을 계속 이었다.
“루카스가 마음 잡고 데릭 테바로스를 노린다면 아마 루카스는 기어코 해낼 거야. 루카스가 아닌 내가 나서도 그래. 어떻게든 네 명령이라면 나도 하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그렇게 하루 종일 싸우고 싸우다 지쳐. 다 죽어 나간 후에 우리가 이긴다 한들, 그건 진짜 승리한 게 아니잖아. 에단. 그건 패배한 거야.”
다 죽고 가져온 승리 따위, 에단 역시 원하지 않는다. 프래카 한 명을 키우기 위해 국가가 들인 시간과 공이 얼마인가. 카이로스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얻어야 할 승리 따위는 세상에 없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에단은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그가 내려야 할 결정은 하나.
“제기랄.”
군사만 있었더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정말 조금의 군사만 더 있었더라면 손쉽게, 보란 듯 이길 수 있다.
그런데, 그 군사가 없어서 이렇게 물러서야 하다니.
물러서야 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에단은 너무도 분했다.
”폐하, 조심……!“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테바로스의 장수는 아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다. 그러지 않아도 누구 하나 건들기만 하면 폭발할 거 같은, 아주 심기가 좋지 못한 상태인데 겁도 없이 달려들다니. 너무도 순식간에, 에단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덩치의 장수가 그대로 생을 마감하였다.
쿵 소리와 함께 장수가 말에서 떨지는 그 순간,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무도 가벼운 한 번의 휘두름에 저 덩치가 저리 쉽게 죽다니. 테바로스 군 카이로스 군 할 것 없이 저도 모르게 덮쳐오는 공포에 마른침을 삼켰다.
차디찬 저 황금의 눈과 맞았다간 그 순간 죽음을 맞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그의 주변에서 정말 사신의 살기라도 흐르는 것 같았다.
“……카이로스의 전군에게 전해.”
그 숨막히는 정적을 깨는 것은 당연히 에단 그 자신.
열다섯. 전장을 지휘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그는 퇴각을 명하려 운을 뗐다.
“모든 군사는 신속히,”
그러나, 그는 신이 사랑하는 아이.
“프, 프란시아다!!!!”
언제나 신은 그의 편이다.
“프란시아님이 오셨다!!!”
“프란시아님의 깃발이야!!”
저 멀리, 동트는 태양을 등에 지고, 눈이 부시는 여명의 하늘 아래.
그 하늘의 빛깔과 닮은,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인.
토르티아의 여명의 공주, 로엘 네아레스다.
“프라시아님!!!”
그 여명의 공주께서. 이제는 황금의 제국 카이로스의 승리의 여신이 되셨나 보다.
“하.”
데릭은 태양이 떠오르며 서서히 드러나는, 그녀가 이끌고 온 카이로스의 군대에 작은 실소를 뱉었다. 족히 만 명은 되어 보이는 황군.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역시나 예상을 뛰어넘는 여자다.
저 붉은 머리의 소녀는.
“프란시아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황제 폐하를 도와 테바로스를 몰아내고, 에토르를 되찾으세요.”
“프란시아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녀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군사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졌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그들은 엄청난 함성을 내며 그대로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하하. 하하하!”
데릭의 실소가 더 커졌다.
설마 저 로엘에게 이리 크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그녀가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걸 예상했으면서도, 애써 무시한 그의 패착이다.
“버리. 퇴각을 준비해.”
“폐, 폐하……!”
“3군까지 다 죽이고 싶지 않으면, 신속하게 움직여. 에토르는 포기한다. 우리의 패배야.”
좀 더 싸워 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버리는 입을 다물었다.
저 에단 황제에게 군사만 있다면, 이미 결론은 난 거다.
그 괴물 같은 이에게 누가 감히 상대라도 되겠는가.
“테바로스 전군. 퇴각하라!!!”
버리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테바로스 장군들 역시 퇴각을 신속히 명했다.
지금까지도 참 열심히 버텼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에, 저 멀리 내려오는 카이로스의 대군을 보는 순간 모두들 그들의 패배를 예감했다.
그래서, 하나같이 눈물을 쏟았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후일을 다짐하며 결국 테바로스는 그렇게 물러났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황금의 황제.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의 승리다.
“하. 도대체 마마……. 무슨 일을 하신 거야?”
“나한테 물어봤자 알 리가 없잖아.”
퇴각하는 테바로스의 군대 너머, 중턱에 자리 잡은 프란시아의 깃발 아래 로엘은 서서 그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았다.
몰브에게 감금되어 황궁에서 생사가 위태로워야 할 분께서, 오른쪽에는 켈트를, 왼쪽에는 칼슨을 낀 채로 황군 만 명을 데리고 이곳에 나타나셨으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까.
어이가 없는 것은, 테바로스뿐만이 아니다.
카이로스 역시 그러하였다.
“……이건.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그건 이반도 마찬가지.
떠오르는 태양 아래에, 황제께서 내린 적마 위에서, 높게 묶은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프란시아라 불릴 만하다.
“저 모습을 누가 상상해.”
어느 여자가 저리 갑옷이 잘 어울릴까.
에단은 그 먼 거리에서도 정확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태양 빛에 눈이 부셨지만, 그런들 그녀를 못 볼까. 그녀 역시 그 많은 사람들 중, 정확히 에단만을 바라보았다.
피가 낭자한, 치열한 전투 현장 속에서도 홀로 고고히 빛나는 그를.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하겠어.”
언제나처럼, 서로의 눈이 맞자 그녀는 여느 때처럼 환히 미소 지었다.
자신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무언의 위로를 담아.
정말이지, 저 여자는 왜 저리 강한 걸까.
너무 강하고, 너무 대단해서 그를 너무도 불안하게 만든다.
저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곁을 떠날까 봐.
멀리서부터 이제야 천천히 내려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에단은 애써 이유 없는 불안한 마음을 숨겼다. 그저 1분이라도 빨리, 너무도 보고 싶었던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을 뿐이다.
***
“라다 칼슨.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습니다.”
“드보아 켈트.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습니다.”
아론은 속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아니. 이게 누구던가.
한 분은 숨죽여 살기 바쁜 켈트의 수장이었으며, 다른 한 분은 경쟁에 밀려 한동안 수그러든 칼슨가의 수장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이 전장에, 다른 누구도 아닌 로엘과 함께 등장한단 말인가. 아론은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케 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프란시아 로엘. 하늘 같으신 폐하를 뵙습니다.”
당당히 갑옷을 입고 검을 쥔 그녀가 기꺼이 에단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누가 제이드 네아레스 딸이 아니랄까 봐, 누가 긍지 높은 기사의 나라, 토르티아의 공주 출신이 아니랄까 봐. 무인으로서 예를 갖추는 모습이 너무도 정석이었다.
“위대한 카이로스의 황제시여. 당신께 승리를 드리기 위해 왔나이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그리고 이 또한 어찌나 완벽한, 프란시아의 모습인가.
아론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의 측근 중 로엘을 유일하게 반대한 아론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녀를 반대할 만큼 아론은 외골수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주군에게 짐이 될까 봐, 그게 무서워서 탐탁지 않아 했을 뿐.
“프란시아님 만세!”
“만세!!”
그녀가 이리 황제께 도움이 된다면. 이렇게 카이로스 백성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다면 반대할 이유가 무어랴. 고리타분한 원로들처럼 카이로스의 출신이 아니라는 그 같잖은 이유로, 가장 황후 칼라리엔의 품격을 갖춘 분을 반대할 마음 따위 전혀 없다.
“당신께서 가시는 모든 길에 축복과 영광이 깃들길.”
기꺼이 그의 손등에 키스를 남기며 그녀는 올곧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환호하는 군사들 사이에서, 에단은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
잘할 줄 알았다. 이리 완벽하게 프란시아의 역할을 해낼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흔들림 없는 붉은 눈을 처음 본 순간, 프란시아로 만든 거다.
그런데 무엇이 이리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까.
“폐하.”
그녀 덕분에 패배할 뻔한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녀 덕분에 수많은 카이로스의 소중한 생명을 구했다.
그녀 덕분에 몰브의 반란이 진압되었고, 백성들의 충성심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녀 덕분에 이 카이로스가 보다 위대해졌다.
“로엘.”
그러함에도 어찌하여, 이리도 그는 그녀가 불안한가.
에단의 입에서 나온 말은, 프란시아도. 아카시스도 아닌 ‘로엘’.
에단은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아 그녀를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로엘.”
보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리고 경악하는 반응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론과 휘파람을 부는 루카스가 있는가 하면, 대놓고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콜린도 있었다. 거기에 마음 아픈, 이반도 있었지.
그 모든 시선을 알면서도 그는 품에서 그녀를 놓지 않았다.
처음엔 매우 당황하던 로엘 역시, 조금도 놔주지 않을 것 같은,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단단한 팔에 이만 몸에서 힘을 뺐다.
그의 불안한 마음이 고스란히, 그녀에게로 전해져 왔다.
“에단.”
그래서 그녀 역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는 괜찮다고.
“보고 싶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쿵쿵쿵. 서로의,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로엘 역시 살며시 손을 올려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이렇게 모두의 앞에서 대놓고 껴안았는데, 더 못 할 일이 무엇인가 싶었다.
“아주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녀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그를 걱정하였듯, 그 역시 몰브에게 붙잡힌 그녀를 걱정하였음을. 그리하여 밤잠을 설쳤음을 그녀가 모를 리 없다.
그녀가 아픈 만큼 그도 아팠고 그가 그리웠던 만큼 그녀도 그리웠다.
“무사히, 건강히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떨리는 목소리. 힘을 주어 안는 팔. 전부 다 그녀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불안하고 또 불안하였음을. 그렇게 두려워하였음을.
에단은 좀 더 세게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이 향기. 이 체온. 이 감촉. 전부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로엘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찾아와 버린 거죠. 당신이 돌아오신 게 아니라. 제가 워낙 진취적인 여성이라.”
“그냥 참을 만한 성격이 못 된 거지.”
“진짜…… 꼭 그렇게 감동스러운 순간을 깨야 속이 시원해요?”
“먼저 깬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그는 피식 웃으면서 이만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러자, 그제야 두 사람을 지켜보지도 말리지도 못하던 이들의 헛기침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뒤늦게 로엘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지만, 에단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 한 번 변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이번엔 로엘이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안은 채로, 그는 다시금 그의 검을 빼들었다.
그러자 일제히 모든 카이로스인들의 고개가 숙여졌다.
“카이로스는 지지 않는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평원에 오로지 그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의 승리를 축하하듯,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고 그 아래 그가 카이로스의 검을 치켜들었다.
“모든 것은 오로지 카이로스의 위해.”
“모든 영광은 오로지 에단 아폴리우스 카이로스 황제 폐하를 위해!”
떠나갈 듯한 환희의 함성이 대지를 울리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군사들이 서로를 자축했다. 그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와 그의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
이번에도 마지막에 웃는 것은 에단.
카이로스의 승리다.
***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케인 몰브는 로엘 님 손에 죽은 거고, 몰브가는 아주 아작이 났으며, 칼슨가와 켈트가 수장님들은 로엘 님께 충성을 맹세했다 이거지.”
“충성맹세 했단 말은 안 했어.”
“그 말이 그 말이지!”
루카스는 아론의 딴지에도 흥분하며 받아쳤다. 황궁에서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들으니, 더욱더 경악했다. 도대체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결단력과 행동력이 나오는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퇴각을 고심하고 있었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태양과 함께 대군을 몰고 온 공주님이라니.
“누가 보아도, 프란시아잖아.”
아론도 더 이상 프란시아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반박하지 않았다.
로엘을 보는 순간 환호하던 카이로스의 병사들을 보았고, 그녀의 능력을 보았으며, 그녀의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다.
“아마, 북방에도 소문이 퍼질 겁니다. 그곳에는 카이로스만 있던 게 아니잖아요.”
“그러겠지. 삽시간에 퍼질 거야.”
심지어, ‘그분’의 딸이다. 북방에서는 거의 신처럼 추앙받는 제이드의 딸이 오랜 침묵을 깨고 세상에 나타났는데 그 누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
순식간에 북방 전역을 흔들 거다.
“되게 웃기네. 원래는 북방에서 승리의 공주님으로 통했잖아?”
“그건 로엘 님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제이드 네아레스가 강해서 그런 거잖아.”
“어쨌거나 그 공주님께서 지금 카이로스의 ‘승리의 여신’이 된 거라고. 이거, 엄청 배 아플걸?”
장난기가 가득한 루카스의 말에 다들 무언의 동의를 했다.
유폐되고 추방당했던 붉은 공주의 복귀는 극적이고도 강렬했다.
거기에 있던 테바로스 사람 중 제이드 네아레스의 딸을 모르는 이가 뉘 있으며, 거기 있던 카이로스 사람 중 북방에 오신 붉은 머리 공주님을 모르는 이 뉘 있을까.
누구는 빼앗기고, 누구는 빼앗은 셈.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 그렇게 살이 붙어 부풀려지기에 딱이다.
“어쩌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왕들은 진짜로 로엘이 승리를 가져다준다고 믿을 수도 있으니.
그걸 믿는 순간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뺐거나, 죽이거나.
“지켜 드리면 되지요.”
잠시 심각해진 이반의 말에 루카스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했다.
정확히 이반을 빤히 보는 그 눈에 이반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반 님이 로엘 님을 지켜 주세요.”
저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는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이제는 아론마저도 눈치채 버린 이반의 마음 덕분에 잠시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이 나라 카이로스의 황자로서, 프란시아님을 지켜 주세요.”
아무 생각 없는 바보 같다가도, 이런 순간에는 또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어른스럽다.
흔들림 없는 눈, 뼈아픈 말, 올곧은 태도. 루카스의 이 모든 것들이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반은 카이로스의 황자라는 것.
로엘은 그러한 카이로스의 프란시아라는 것.
그 프란시아는 카이로스의 영광이자, 황제의 축복이라는 것.
그러니 황자로서 그런 프란시아를 지키라는 것.
“그럼, 저도 함께 지키겠습니다.”
그렇게 거리를 두라는 것.
“이 나라를 위해. 폐하를 위해. 로엘 님을 위해. 그리고 이반 님을 위해서. 저도 그러하겠습니다. 황자님.”
역시 가장 불편한 상대에게 제일 먼저 들켜 버렸다.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싱긋 웃어 버리는 루카스를 보며 이반은 따라 웃었다.
“그래야지.”
루카스의 말이 맞다. 그건 그 모든 이를 위한 일이다.
“지켜야지. 소중한 이 나라의 프란시아님을.”
그러니 이제는 괜찮다.
너무도 걱정했고, 보고 싶었던 그의 네아가 이 밤에 형제의 곁에 있어도.
그렇게 괜찮냐고 말 한 마디를 건네지 못해도.
‘황자 이반에게 명한다. 황자는 목숨을 바쳐 아카시스를 지키라.’
이제는 정말 괜찮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스스로를 잘 지킬 거야. 내가 아는 우리의 프란시아님은.”
이반은 그제야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시답잖은 농담과 함께.
“완전 동감. 요새 로엘 님을 보면 나 좀 긴장된다니까요? 이러다 나 잘리는 거 아냐? 진짜 대장군 자리가 위태롭다고.”
“네가 좀 풀어지긴 했지. 긴장 좀 해.”
“네놈 자식한테는 안 물어봤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티격태격하는 루카스와 아론의 논쟁이 길어졌다. 콜린은 이제 적응했는지 한숨을 쉬며 아예 무시해 버렸고 이반은 그런 모두를 웃으며 보았다.
익숙한 광경. 친숙한 느낌. 요새는 정말 어린 시절로, 원래 그가 있던 곳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래. 내가 지키면 되는 거야.”
남들은 듣지 못하는 작은 목소리로 이반은 읊조렸다. 오늘 아침, 태양을 등지고 서 있던 그녀를 생각하며.
어린 날, 타르타니의 깊은 숲속에서 처음 만났을 적도 그녀는 그렇게 태양을 등진 채, 눈이 부시도록 환한 빛 속에서 나타났다. 그때부터, 그렇게 그의 마음을 채워 주었다.
그럼 된 거다.
그걸로 이미 넘치도록 충분하다.
그러니 카이로스의 황자로서 프란시아님을 지키든, 이반으로서 사랑하는 네아를 지키든.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 곁에 이제는 머물 수 있다는 것뿐.
그렇게 지난날 지킬 수 없었던 그녀를 지키게 되었다는 그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래. 그럼 된 거야.”
이반은 마시던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여전히 생각하면 아프고 쓰라린 마음이지만, 그렇게 식을 줄 모르는 그런 감정이지만, 이반은 이제 진심으로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