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뇌리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밀려났다. 익숙한 느낌이다.
또 이 꿈인가, 생각하며 에리얼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꺼풀 안쪽에 뿌연 막이 어려 눈앞이 혼탁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트이자마자 청량감이 느껴지는 바다 내음과 함께 푸른 에메랄드빛 바다가 에리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하얀 창틀 너머로 파란 바다가 찬란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예쁘네. 남부는 바다가 이런 색이구나.
손가락을 들어 조심스레 창틀을 쓸어보았다. 포도 덩굴무늬가 부조된 창틀은 낡았다기보다는 오래된 장식 특유의 묵직한 무게감으로 저택의 고급스러움에 일조하고 있었다.
청색 시폰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풍경을 이루는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남부 바다는 어떤 느낌입니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책장이 빼곡한 배경 가운데에 서 있는 커다란 장신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느리게 깜박이던 에리얼의 눈꺼풀이 남자를 본 순간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금색과 은색을 섞어놓은 듯한 밝은 머리카락. 머리의 오묘한 색채만으로도 시선을 끌기 충분한데, 그 아래의 얼굴은 화사한 머리카락에 지지 않을 만큼 준수한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깊게 음영 진 긴 눈매 속에 북부의 바다를 옮겨놓은 듯한 어두운 청색 눈동자가 물끄러미 자신을 투영했다. 어딘가 차가움이 묻어나는 눈매였지만 무섭거나 거부감이 드는 눈은 아니었다.
낮은 바리톤의 음색을 떠올린 후에야 에리얼은 남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베르트발드 얀셀.
…이 사람이 백작님이구나.
손을 잡았을 때, 조금 마른 몸집일 거라 짐작되었던 백작은 늘씬하면서도 무척 탄탄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집정관이라는 지위와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과연, 최연소 집정관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목소리도 묵직해서 분명 늙어 보이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젊고 수려한 외모일 줄은 미처 몰랐다.
왜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나와 결혼한 걸까.
의혹과 함께 에리얼이 대답했다.
『보이지는 않아서 모르겠지만… 소리가 다르네요.』
사념과 다르게 내뱉은 말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다. 원래 예지몽은 늘 이랬으니까. 지금 눈이 보이는 에리얼은 말하고 있는 에리얼과 전혀 다른 의지를 갖고 있을 것이다.
에리얼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매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가늘어졌다. 백작은 입꼬리에 약한 미소를 머금고 에리얼을 굽어보며 대답했다.
『어떻게 다릅니까?』
『북부 바다는 자기주장이 무척 강한데, 여기 바다는 상냥한 느낌이에요.』
백작은 살짝 입매를 끌어당겨 웃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창밖을 쳐다보았다. 서늘한 눈매 속에 부드러운 빛이 잔잔히 퍼져 갔다.
…이상하다….
목소리가 무뚝뚝해서 아무런 표정도 없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내가 오해하고 있던 걸까.
『북부에 비하면 남부 바다는 상냥하겠지요. 하지만 태풍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섭게 돌변하곤 합니다. 저는 그런 이중적인 면도 마음에 듭니다만 부인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군요.』
백작이 다시 시선을 내려 창가에 앉아 있던 에리얼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휘어진 눈매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이중적인 면이 부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요하지만, 때로 격정적인.』
『…네?』
커다란 손이 턱을 스쳐 살며시 뺨을 어루만졌다.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지분거리던 백작이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평소에는 이리도 차분하신데… 침대 위에서는 정반대이니 말입니다.』
슬며시 입술이 아래로 당겨졌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뭘 하려는 건지 깨달은 순간, 에리얼은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질끈 눈을 감았다.
놀란 마음에 동조하듯 빠르게 시야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검은 물감을 뿌린 것처럼 세상이 어둡게 덧칠되고 흐려지다가 이윽고 암전되었다.
위잉, 귓속을 어지럽히는 이명이 방금 전 모든 일이 꿈이었음을 알리는 마지막 경종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꿈이 끝났다.
“우와… 이걸. 이걸 어쩜 좋아.”
의식이 깨어남과 동시에 에리얼이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감쌌다. 홧홧한 열기가 뺨을 타고 흘러들어와 손바닥을 미지근하게 달궜다.
고치처럼 꽁꽁 싸인 이불이 움직임을 방해했다. 꿈질거리며 이불을 벗겨낸 다음 천천히 눈을 떴다.
잘 떠지지 않는 눈가를 슥슥 문지른 후에야 잿빛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감과 허탈감이 동시에 밀려들고, 에리얼은 한숨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바다도… 백작님도. 그렇게 생겼구나.”
생각보다 훨씬 근사해.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중얼거림을 귀에 담자 뺨 위에 저절로 홍조가 피어올랐다.
방금 그건… 그.
이, 입 맞추려는 거였을까.
…아니, 아니야. 내 착각일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애정은커녕 결혼식 이후로 제대로 만난 적도 없는데 왜 이런 이상한 꿈을 꾼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에리얼은 붉어진 뺨을 슬슬 문지르며 미간을 좁혔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이런 꿈은 나쁜 일이 있을 때만 꾸는데….”
누군가는 예지몽이라고 칭송하고 누군가는 마녀의 계시라고 매도하는 기이한 꿈들. 항상 나쁜 일의 전조로 꾸곤 하는 꿈이었는데, 방금 전의 꿈은 그저 평온하고 잔잔하기만 했다.
…뭘까, 이 꿈은.
턱을 괸 채 골몰하던 에리얼은 이내 고개를 휘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중에 생각할까. 고민해봤자 지금으로서는 달리 실마리도 없고 백작가의 아침은 꽤 분주한 편이니까.
“부인. 일어나셨다면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타이밍 좋게 똑똑, 노크 소리와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얼은 대답 대신 침대 곁에 놓여 있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탁탁, 지팡이로 카페트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얀셀 백작 부인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 * *
수도 드란델에서 마차를 타고 일주일을 남하하면 얀셀 백작가가 다스리는 동남부 최대의 해안 도시인 파하르에 도달할 수 있다. 거기서 반나절을 더 달리면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그랑파하르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모습을 드러낸다.
파하르의 거점도시는 자유 무역항이 존재하는 라흐주였지만, 초대 얀셀 백작은 아름다운 바다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는지 굳이 외곽에 위치한 그랑파하르에 저택을 지었다.
육지 쪽으로 깊게 파여 있는 다비드만, 그 지역의 해변을 통째로 독점하고 있는 백작저는 자유 무역항으로 얻은 막대한 세금 덕분에 호화로움의 극치를 자랑했다.
청량감이 물씬 풍기는 민트색 바다, 그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짙은 색의 터콰이즈 블루 지붕. 하얀 석벽에 푸르름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이 저택을 그랑파하르의 사람들은 코랄 하우스라고 불렀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골동품과 고미술품 등으로 사치스럽고 웅장하게 꾸며져 있어 얀셀가의 위세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수도 저택 또한 만만치 않게 화려하지만 본 저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 아름다운 저택에 드디어 안주인이 생기다니,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새 안주인이 심미안이 있기는커녕 눈조차 보이지 않는 맹인이라는 사실에 저택의 사용인들 모두가 씁쓸한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침묵이란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이다.
“하녀장님. 마님을 전담할 하녀는 누구죠?”
이른 아침, 사용인들의 아침 조회가 끝날 무렵이었다. 하녀장이 전달 사항을 마친 순간 아무도 입에 담고 싶어 하지 않았던 질문이 적막 사이로 넓게 퍼져 갔다.
하녀장인 에바는 질문을 던진 하녀와 그 주변 하녀들의 안색을 살핀 후 옆에 서 있던 집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집사인 레오는 하얀 눈썹을 움찔하는 것으로 하녀장에게 답변을 다시 넘겼다. 에바는 헛기침을 내뱉고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전담 하녀를 지원할 사람 없습니까? 전담 하녀에게는 주급 인상과 함께 굉장히 많은 특혜가 주어질 거예요.”
말하면서도 에바는 대답할 이가 없으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역시나. 지원하겠다는 말 대신 작은 투덜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처음부터 시녀를 데리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왜 시녀들을 놔두고 혼자 오셔서는….”
“웬만한 거동은 혼자 하실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앞이 안 보이시면 하루 종일 곁에 붙어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원래 공작가의 시녀들은 평민이 하는 게 아니라면서요. 그런데 하필이면 아이기스 공작가라니… 저희 같은 평민이 시중들어 봤자 싫어하실 것 같은데.”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힘들지 않을까, 조금 거북해서, 돌림 노래처럼 이어지는 속삭임들은 새로운 백작 부인에 대한 사용인들의 여론이 어떤지 고스란히 알리고 있었다.
‘흰머리가 더 늘어나면 곤란한데’, 속으로 생각하며 에바가 짝짝 박수를 쳤다.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사라지고 사용인들의 이목이 다시 하녀장에게 옮겨갔다.
“다들 그만. 전담 하녀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지나친 발언은 삼가도록 해요. 마님께서는 이 저택의 안주인이십니다.”
하녀장의 얼굴에는 평소의 너그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진중함만이 가득 배어 있었다. 홀을 메우던 재잘거림이 잦아들고, 하녀들이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하녀장을 주목했다.
“억지로 강요할 생각 없습니다. 지원자가 없다면 새로운 사람을 채용할 테니 다들 맡은 일에 집중해주세요. 그럼, 오늘도 힘냅시다.”
“저, 저기… 하녀장님.”
실낱같은 목소리로 하녀장을 부른 사람은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 하녀 비에타였다.
아직도 소녀티를 벗지 못해 풋풋함이 흘러넘치는 젊은 하녀는 헤어캡에 달린 프릴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경력은 형편없지만… 저라도 괜찮다면 지원하고 싶습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비에타를 쳐다본 건 하녀장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주변의 하녀들 모두 ‘얘가 미쳤나.’ 하는 눈으로 비에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비에타는 붉어진 얼굴을 살짝 숙이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 그게. 방 청소하다가 마님을 몇 번 뵈었는데… 생각만큼 어려운 분은 아니신 것 같아서요. 저는 손이 느린 대신 발은 빠르니까 청소보다는 마님 곁에서 심부름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제법 솔직한 말이었는지 하녀들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에바는 잠시 고민하다가 비에타 쪽으로 몸을 틀며 물었다.
“지원하면 지금 하는 일로 돌아오기는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예.”
“음. 일단 알겠습니다. 비에타는 남고 다른 사람들은 해산하세요.”
말이 끝나자 사용인들 모두가 재빨리 자신의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그렇게 수초 후. 넓은 현관 홀 앞에는 에바와 비에타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