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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처음이 되고 싶어-3화 (3/145)

3화

에리얼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모욕당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남자가 자신으로 인해 비난당할 걸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조심스레 말을 읊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향해 서 있을 뿐이었다.

이럴 때에는 표정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복잡한 심경 속에 나직한 저음이 새어들었다.

“대단히 황공합니다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공작가와의 결합은 제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하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누가 감히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감사합니다만 그렇게 단정 지을 게….”

“당신이 가엾어서 받아들이려는 게 아닙니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에 에리얼이 입을 다물었다.

“상호 협의하에 진행하는 결혼입니다. 영주는 나고, 내가 공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여론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온 말 뒤로 작은 한숨이 이어졌다.

다그치는 듯한 어투에 에리얼이 목을 움츠린 채 남자를 쳐다보았다. 단정 짓기 힘든 애매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알겠어요.”

먼저 분위기를 환기시킨 건 에리얼이었다. 그녀는 손에 쥔 지팡이를 엄지로 쓸어내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미리 걱정해봐야 좋을 일도 없겠지요. 백작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결혼식은 다음 주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미리 신변 정리를 마쳐두는 게 좋겠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에리얼은 비어 있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깊게 몸을 숙였다. 채도 없는 탁한 시야 속에 자신의 흑발이 부드럽게 시야 가장자리를 스쳤다가 사라졌다. 우아하게 인사를 마친 그녀가 지팡이를 다잡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림자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묘한 시계 속에 붉은 인영이 아까와 같은 자세로 지그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에리얼은 인영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말을 이었다.

“말씀 끝나셨다면 먼저 가봐도 될까요? 저택에 오자마자 백작님을 뵈러 온 터라, 아직 가지고 온 짐을 풀지 못했거든요.”

베르트발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리얼도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리얼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본 다음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비단 같은 흑발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나부끼고 지나간 자리에 탁탁,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에리얼은 능숙하게 지팡이를 사용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서툴게 방을 빠져나왔다.

달칵, 문을 닫고 나온 에리얼은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손에 익은 지팡이를 흘깃 쳐다보았다.

귀에 익은 지팡이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비참하게 느껴졌다.

* * *

사람은 늘 올바른 형태로 태어나지 않는다.

작게는 손 발가락 개수가 이상하거나, 크게는 몸이 비틀려 있거나, 있어야 할 기관이 없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한다. 당연한 진리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잊고 살아간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런 문제가 있는 아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거나, 태어날 때 죽거나, 태어난 후 죽이거나 셋 중 하나의 경우를 거치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제국민들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를 보듬고 어르며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장애아들은 같은 인종이 아닌 저주를 갖고 태어난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에리얼 또한 눈에 띄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면 힘겹게 생을 이어갈 필요 없이 태어나자마자 평온하게 안식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에리얼의 장애는 곧바로 알아보기 힘든 시각 장애였고, 아이기스 공작 부처는 흑단의 머릿결과 뽀얀 살결을 지닌 첫째 딸이 그저 곱고 어여쁜 아기라고 생각했다.

반년이 지나 아이의 눈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공녀의 출생 사실이 널리 퍼진 이후였다.

죽을 수도 없게 된 공녀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팍팍했다.

다만 에리얼의 인생이 그렇게까지 우울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정한 어머니 덕분이었다.

「에리얼. 네 삶을 결정하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야. 네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거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한 거지. 넌 어느 쪽이 좋니.」

단순한 물음이었지만 에리얼은 질문에 내포된 뜻을 알아챘다. 어머니는 에리얼에게 행복할 각오가 되어있느냐 물은 것이다.

그리고 영민한 그녀는 어머니가 바라던 대답을 내뱉었다.

「에리얼은 행복해지고 싶어요. 어머니처럼 매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웃고 싶었다. 때문에 남을 미워하는 것보다 용서하고 이해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마음을 깎고 깎아서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행복해졌을까.

여태껏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는 잘 모르겠다. 가족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힘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신부, 에리얼 아이기스.”

상념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에리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얀 베일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회색빛 실루엣이 보였다.

높게 삐죽 솟은 모자와 손에 들고 있는 성물이 회색 인영의 정체를 알리고 있었다.

교회의 주교님.

에리얼은 자신이 지금 결혼식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재빨리 상념을 걷어치웠다.

주교는 곤란한 얼굴로 눈치를 살핀 다음 한결 높아진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신부, 에리얼 아이기스. 성혼 서약에 동의할 것을 맹세합니까?”

“아, 네! 맹세합니다.”

곧장 대답하자 회색빛 인영 가운데에 옅은 노란빛이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안도하는 마음을 알리는 노란빛. 볼 때마다 자신도 따뜻해지는 듯한 노란 빛을 눈에 담으며 에리얼은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트발드 얀셀, 그대 또한 성혼 서약에 동의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감흥 없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주교는 혼인 서약서와 결혼 반지 교환, 부부 생활의 도덕 규범 설명 등 자신의 의무를 빠르게 수행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마주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무겁게 몸을 감싼 드레스를 옆으로 밀어내며 에리얼이 베르트발드 쪽으로 몸을 틀었다. 탁한 시야 속에 새빨간 인영이 들어찼다.

결혼식 준비를 위해 종종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마주하니 그 핏빛 같은 붉은색이 더욱 강렬하게 와 닿았다.

위축되려는 마음을 지그시 억누르며 에리얼은 주교가 시킨 대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제 베일을 걷으십시오. 앞으로는 거짓이나 삿된 유혹 따위로 앞을 흐리는 일 없이 서로를 진실하게 마주 보아야 합니다.”

베일을 걷는 손은 여태껏 봐왔던 다른 이들의 손보다 훨씬 크고 길었다. 손이 움직이는 모양을 눈에 담던 에리얼은 왜 갑자기 과거가 떠올랐는지 생각했다.

이 결혼식이 끝나면, 자신은 더 이상 에리얼 아이기스가 아니라 에리얼 얀셀이 되는 것이다.

내내 운명에 순응하며 밝게 살아왔다 자신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머리를 꽉 채우고 있던 자신감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해버린걸 보면.

어머니도, 다른 가족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열심히 살 수 있을까. 텅 빈 가슴 속에 걱정과 염려가 들어차 기분을 한없이 울적하게 만들었다.

“공녀. 손잡아요.”

낮게 울리는 바리톤과 함께 커다란 손이 에리얼의 손을 붙잡았다. 베르트발드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예배당 중앙으로 에리얼을 이끌었다.

꽃잎이 허공을 수놓으며 오르간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배경처럼 허무하게 울리는 박수 소리 너머 아주 작은 흐느낌이 에리얼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라고 생각했을 찰나였다.

“공작 부인께서 공녀를 무척 애틋하게 여기셨나 봅니다.”

생각을 짐작한 듯한 목소리에 에리얼이 움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 울음소리… 혹시 어머니는 아니지요?”

잠시 고민하던 베르트발드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느 쪽으로 대답하는 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타이르는 듯한 어조에 에리얼이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리얼은 대꾸 없이 울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물론, 한데 엉켜 있는 어둑한 인파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내는 건 무리였다.

설마 어머니가 이런 자리에서 울 거라 생각치 못했다. 어머니는 늘 밝은 모습만 보여 왔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야 그 밝은 모습들이 자신을 위한 배려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어머니는 늘 배려하기만 했다. 항상 자신을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던 어머니는 동생과 함께 끝까지 결혼을 반대하며 자신을 포용하려 했다.

항상 잔잔한 분홍빛으로 사랑을 나눠주던 어머니. 늘 자신의 편을 들어주던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

당신도 아시겠지만 저는 쉽게 불행해지지 않아요. 불행보다 행복을 찾는 데 더 능숙하니까요.

…그게 당신이 알려준 전부니까요.

“저기… 백작님.”

“예, 공녀.”

“시간이 지나서 제가 영지에 적응하게 되면, 그때는… 어머니를 영지에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짧은 침묵 후에 돌아온 대답은 다소 시큰둥했다.

“뭐든 원하시는 대로.”

무성의한 대답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예배당의 문 너머로 새하얗게 빛나는 하늘이 보였다. 늘 그곳에 머물러 모두를 연결하는 하얀 하늘. 어차피 같은 하늘 아래인데 공작령이나 백작령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을까.

이렇게 정 없이 팔려가는 결혼이라 해도.

…결혼 상대가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해도.

이미 불행한 인생에 불행 하나를 더한다 해서 삶이 끝없는 나락으로 치닫지는 않는 법이다.

아니, 나락에 떨어졌으면 어떤가. 바닥에 다다랐다면 작은 행복만으로도 금세 떠오를 수 있으니, 어찌 보면 행복을 찾는 가장 쉬운 방편이기도 했다.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커다란 손이 따스한 체온을 자신에게 전달하고 있다. 온기에 마음을 기대며 에리얼은 보이지 않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숱하게 파혼당하고 결혼하는 거니까, 부디.

…이 남자가 나를 버리지 않게 해주세요.

작은 되뇌임이 소리 없이 입가를 떠돌았다.

* * *

결혼식을 마치고 베르트발드와 에리얼은 남부로 향했다.

얀셀가가 다스리는 영지, 남부의 보석 파하르.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광활한 해변에 말로만 듣던 백작저가 웅장한 모습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가 지나고, 남부의 따스한 기온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에리얼은 꿈을 꾸었다.

…늘 불운한 사건과 사고를 몰고 오는 그 지긋지긋한 예지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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