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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55)화 (55/70)

55화

어두운 곳을 밝히는 야시장의 조명 탓일까.

야릇하게 끝이 올라가 있는 입술의 색이 짙어 보여 세연은 오히려 도하를 의지할 수가 없었다.

상사인 그는 믿을 수가 있는데, 그녀를 원하는 그는 믿을 수가 없다니.

“알, 겠어요.”

아마도 너무 가까운 거리감 때문일 것이다. 널뛰는 심장의 압박감이 심리적인 위축으로 이어져 세연은 얼른 챙을 아래로 내렸다.

도하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심장의 울림이 잦아들었다.

“믿지 못해도 좋습니다.”

버석한 웃음기를 품은 음색이 낮보다 더 짙게 울렸다.

널찍한 그림자가 위로 져 순간 어두워졌다.

그가 단단한 등으로 자신을 가려 주고 있어 세연은 안정감을 찾아 갔다.

진형과 다르게 도하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과 그녀에게 그의 마음을 부정할 수 없게 인지시키는 과정까지 모두, 그의 손끝과 시선으로 이루어 냈다.

그런 사람을 의심하다니.

“대표님?”

미안하다고, 그의 셔츠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귓가에 박힌 목소리에 긴장감을 푼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도하의 앞에서 들리는 여러 명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세연은 얼른 숨을 참았다.

“대표님도 구경 오실 줄 몰랐어요.”

“혼자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저희와 같이…….”

도하의 너른 몸통으로 인해 그녀를 볼 수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심장을 떨어지게 했다.

“동행자가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세연을 충격에 빠트렸다.

‘대표님…… 제발…….’

앞을 볼 수 없어 바닥만 훑고 있던 세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러다가 그들이 저를 알아볼까 세연은 도하의 옷소매를 손가락으로 쥐었다.

“대표님이 만나는 분이 계셨다니. 충격이에요.”

“혹시 대표님 뒤에 계신 분인가요?”

“어떤 분일지 저희 너무 궁금해요. 전에 뉴욕에 계셨다고 들었는데 혹 그때부터인가요?”

“소중한 사람이라서 아직은 말을 얹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꺅꺅. 그럼 이것만 알려 주세요. 몰래 연인과 데이트하려고 같이 출장 오신 거라든가?”

흥밋거리에 직원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 낼수록 세연의 가슴은 쪼그라들었다.

“언젠가 여러분들에게도 소개할 겁니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지금은 둘만 있게 해 주면 좋겠군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며 그가 그녀를 향한 마음의 크기를 드러내자 몇 초간 조용해졌다.

“그, 그래 드려야죠.”

“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분이 정말 부럽네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하의 뒤에 있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거둔 회사 직원들은 곧 멀어졌다.

세연이 들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을 인식하는 목소리뿐이었다.

“갔습니다.”

태풍을 맞이한 것처럼 심장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의 연애를 생각하는 것도 벅찬데 그는 벌써 그녀와의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저녁은 어떤 걸 먹고 싶습니까?”

도하의 마음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컸다.

확인하게 된 그의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넘실대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그의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깊고 큰지 알게 된 순간, 세연은 용기를 내고 싶었다. 쥐고 있던 옷자락을 놓은 그녀는 도하의 손을 잡았다.

멈칫한 움직임이 고스란히 손바닥으로 느껴지고 이내 그가 뒤돌아본다.

“아무거나, 여기서 먹어요.”

세연은 도하를 똑바로 마주했다. 만약 이 모습을 다른 누가 본다고 해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디까지 내줄 수 있습니까.”

“네?”

“손, 그다음은.”

열망으로 인해 어둑해 보이는 도하의 눈길이 세연에게 진득하게 닿았다. 노골적이게도 느껴지는 시선에 세연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벌겋게 번졌다.

“마음까지 다 줄 수 있습니까.”

짧게 닿는 손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금세 마음을 요구하는 남자의 구애는, 기다려 줄 것 같으면서도 성급해서 다음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세연은 퍽 난감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온몸을 굳혔다.

“……지금 달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긴장 풀어요.”

희롱당하는 것 같았으나, 목소리는 그녀를 생각해 주고 있는 듯 다정스러웠다.

“배고플 테니 먹거리 사 오도록 하죠.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무엇이 그의 진짜 본심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세연 씨가 좋아하는 고기 종류 사왔어요.”

먹거리를 사 들고 돌아온 도하의 앞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이마를 가린 채였다.

기다리는 자신을 위해 빠르게 돌아다녔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녀의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고기를 사 왔다는 말에도 그녀가 달리 기뻐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자 그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음식이 별로라면 장소를 옮기죠. 처음부터 식당으로 갈 것을 그랬어요.”

그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단정하게 위로 넘기자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사다 놓은 게 아깝잖아요.”

“내가 사 왔으니 내가 처리하면 되는 겁니다. 세연 씨는 그저 내게 말하기만 하면 돼요. 어떡할래요?”

“……대표님이 사 주신 것들 먹을래요.”

낮과 밤이 다른 것처럼 이면의 도하를 본 것 같았다. 

세연은 그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가 주는 것들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 * *

“어때요?”

호텔 객실에 들어선 세연의 뒤를 따라붙은 도하가 기어이 현관 앞까지 발을 들여놓았다.

“나와 가까워진 기분이 듭니까.”

자신을 헷갈리게 하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세연은 고개를 미약하게 저었다.

“……더 모르겠어요.”

다정함에 현혹되어 손을 뻗으면 아까의 그 위험해 보이는 남자로 돌아갈 것 같았다. 쉽사리 잡혀 주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 그녀를 안달 나게 만든다.

“밤의 날 알게 되면 더 결정하기 쉬울 겁니다.”

“예?”

“궁금하면 날 가져 봐요.”

세연의 손을 가져가 그의 심장께로 놓는 도하의 유혹은 도발적이었다.

“빨리 결정해야 할 거예요. 내가 나쁜 짓을 저지르기 전에.”

더는 기다리기 힘들 것 같다며 내쉬는 한숨이 세연의 몸을 내리눌렀다.

* * *

간간이 보였던 그의 욕정 섞인 눈빛을 떠올리면 두려워졌다.

마음도 가져간 그에게 몸까지 주고 나면 되돌릴 수 없기에 신중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동했다.

[밤의 날 알게 되면 더 결정하기 쉬울 거예요.]

낮에도 속절없이 끌리고 있는데, 밤의 그까지 알게 되면 더는 헤어 나올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저질러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그날을 떠올리면 아쉽기까지 했다.

세연아. 도착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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