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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상사가 파고들면 (54)화 (54/70)

54화

“이보쇼! 말 똑바로 합시다. 박 씨 아줌마 빼고 그날 우리 음식 먹고 아팠다는 사람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잘못이라는 거예요? 뻔뻔하기도 하지!”

“내가 새벽 시장에 직접 가서 손수 까다롭게 고른 재료들이고, 유통 기한까지 확인했습니다. 음식엔 아무 문제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불편해서 음식값 돌려주었더니 도리어 무슨 행패입니까!?”

“장사하는 사람이 기본을 모르네. 이 집 음식 먹고 병났으니 보상하는 거야 당연한 거고! 맛은 있어서 또 시켜 먹었더니 또 배앓이를 했다 이거예요. 그러면 미안하다, 사과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내 말이 틀렸어요?!”

“이 사람이!”

열이 뻗칠 대로 뻗친 명한은 두 소매를 걷어붙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이 사납게 굼틀거린다.

“허, 날 때리려는 거예요! 어디 쳐 봐!”

“누가 때린다고 했습니까!”

“칠 기세로 보이는데 뭘.”

이런 막무가내의 여편네와 상대하지 않는 게 나았지만 아무런 대응하지 않고 있다간 안 좋은 소문이 돌 것 같았다.

근래 들어 배달 앱에 말도 안 되는 허위 악플이 달려 매상도 하락했는데, 바로잡지 않으면 가게가 망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이래서 관상을 믿으라고 그랬어. 막노동하는 것처럼 생겨서는, 혹 손을 안 씻고 요리하는 거 아니에요?”

음식을 먹다 만 손님들은 명한의 험상궂은 인상을 힐긋거리고는 먹은 값도 치르지 않고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그러게 내게 잘하지.”

심술이 그득한 두 뺨을 부풀린 박 씨는 쌤통이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명한은 더한 보복이 돌아올까, 테이블 세 개밖에 들여놓지 못하는 작은 분식집을 나가는 박 씨를 붙잡지 못했다.

분식집에서 물건이 자꾸 사라져서 주의 깊게 손님들을 살펴본 결과 범인은 박 씨 아줌마였다.

신고하기도 애매한 간장 통이나 수저 같은 것을 훔쳤기에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했다. 조용히 그러지 말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박 씨는 명한을 원수로 대하고 있었다.

일찍 문을 닫고서 어질러진 바닥과 테이블을 청소했다. 일을 끝낸 명한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보았다.

시름을 달래 줄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은 액정 화면 안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다음 주 우리 딸 생일인데 맛있는 거 사 주려면 힘을 내야지.”

* * *

점심은 고기파이였다.

가게 내부에는 포장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유학 시절에 자주 왔습니다.”

“여기를요?”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가난한 유학생이었을 것 같지가 않아 세연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세연의 반응을 보고도 도하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입꼬리를 짙게 올렸다.

“부모님께 의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이가 좋지 않으세요?”

가족 문제는 특히나 예민할 수밖에 없어 세연은 물으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부모님과는 좋고 싫고 할 게 없습니다. 조부와 갈등이 있었으니까요.”

“아.”

“철없어 보입니까.”

“대표님이 이유 없이 그러실 분도 아니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죠.”

도리어 유학 시절 치열하게 살아온 도하가 존경스러웠다. 세연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이러니 욕심날 수밖에.”

미소를 머금은 표정과 상반되는 목소리에 심장이 농락당한 것처럼 휘둘러졌다.

“이렇게 다른 남자한테 웃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못 알아들었을까 음성을 울려 나직이 단속한다.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그가 싫지 않은 자신이 문제였다. 세연은 날뛰려는 감정을 진정시키느라 힘들었다.

그녀야말로 말하고 싶었다.

욕심나게 하지 말라고. 제발.

“고기파이 나왔네요.”

직접 가져온 따뜻한 파이를 네 조각으로 자른 도하가 세연의 그릇에 놓아 주었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먹어요.”

아빠가 하시던 말 속에서 느껴졌던 애정과는 엄연히 달랐다. 괜히 목이 말라 세연은 과일 착즙 음료를 마신 후에 고기파이를 한 입 베어 먹었다.

“맛있네요.”

신선한 야채와 소스가 고기의 잡내를 잡아 주고 있었다.

“그래 보입니다.”

도하는 세연을 주시하면서 고기파이를 깨물었다.

눈으로 씹어 먹히는 것 같았다.

입 안의 것보다 자극적인 광경 때문에 본연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연은 고기파이를 먹다 말고 착즙 음료만 마셔 댔다.

같은 음식을 먹는데도 그는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흘리고 먹어도 괜찮습니다.”

세연의 가슴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그녀가 뭘 해도 예뻐 보이는 듯한 시선은 영원한 종속처럼 바뀔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먹다가 제가 뚱뚱해져도 괜찮아요?”

왜 이런 말을 내뱉었을까.

돌아가신 엄마를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처럼 비현실적인 사랑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기에, 그에게서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나도 살찌우면 됩니다.”

물어본 행동이 후회스럽지 않게 도하는 주저 없이 속마음을 내보였다.

내가 왜, 이런 남자를 포기해야 해?

도하를 향한 마음이 조절되지 않았다. 점점 그가 욕심이 났다.

믿고 싶고 믿어 보고 싶은 남자가 내 눈앞에 있는데.

그런 그가 나를 원하고 있잖아.

“내 마음 확인하고 싶으면 다른 것도 물어봐요.”

“…….”

“뭘 불안해하는지 압니다. 그러니 내가 불씨를 없애 줄 수밖에.”

그러니 지켜보기만 하라며 그가 그녀의 입술 주변을 새 냅킨으로 닦아 주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애틋함이 담겨 있는 손길은 물론 탐욕적인 시선도 불쾌하지 않았다.

그녀가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준 그가 값을 치렀다.

“다음엔 제가 사게 해 주세요.”

“그래요. 세연 씨가 사 줘요.”

순순한 수긍이 오히려 세연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녀에게서 뭔가를 얻어 낼 것 같아 불안이 섞인 기대감이 가슴을 콩콩 찧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의류 매장이었다.

“내게, 어울릴 것 같은 옷 골라 줘 봐요.”

도하는 얼떨떨하게 매장 안을 둘러보는 세연의 눈길을 그에게로 돌려놓았다.

“대신 불평하지 마세요.”

이게 뭐라고 가슴이 뛰는지. 하지만 애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특권이었다.

“뭘 택해도 세연 씨가 주는 거라면 기꺼울 겁니다.”

그의 마음을 증명하는 단호한 음성과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대학생 때는 편안한 복장을 입으셨겠지.’

10년 전의 이도하라니.

자신이 보지 못했던 도하를 보고 싶은 마음에 세연은 캐주얼한 복장을 골랐다.

“다 골랐…….”

뒤에 있던 도하가 보이지 않자 세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가신 거지?”

일단 계산을 하고서 몇 분 더 기다려 봤지만 어디로 갔는지 무소식이었다.

나타나지 않는 도하를 찾고자 세연은 2층 여성 매장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몇 바퀴를 돌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떡해야 하나.

생각이 많아진 세연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매장 계산대와 멀지 않은 곳에 도하가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달려갔다.

“대표님.”

“더 안 오면 방송하려고 했는데 왔네요.”

“그건 싫어요.”

이름이 불리다니. 세연이 고개를 젓자 도하가 피식 웃음을 띠었다.

“그래서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하의 눈길이 세연의 쇼핑백에 향했다.

“내 옷인가 보군요.”

“나중에 풀어 보셔야 해요.”

“지금 보면 안 됩니까.”

“돌아가서 확인해 주세요.”

속옷을 선물한 것도 아닌데 부끄러워진 세연은 쇼핑백을 껴안고서 토라지듯이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죠. 어려운 일도 아니고. 대신, 내 건 바로 확인해요.”

“네?”

자신의 것을 그가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란 세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바로 했다.

그 사이에 세연의 품에서 쇼핑백을 가져간 도하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을 세연에게 안겼다.

“이러면 의미 없잖아요.”

“왜 없습니까. 세연 씨가 내게 선물한 이게 있는데.”

쇼핑백을 들어 보이는 도하의 모습에 가슴을 치는 감동이 말문을 막았다.

“비싼 거 아닙니다.”

혹시나 가격 때문에 받지 않을까 덧붙이는 목소리조차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쇼핑백을 열어 보자 의외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모자네요.”

언제든 부담 없이 쓸 수 있어 세연의 미소가 환하게 퍼졌다.

잘 쓰겠다며 다시 쇼핑백에 넣으려고 하자 도하가 볼캡의 챙을 잡아 휙 가져갔다.

갑자기 받은 선물을 눈앞에서 빼앗기자 멍하니 그를 쳐다보는데.

곧이어 세연의 눈이 둥근 챙에 의해 가려졌다.

“지금 써요. 비가 그쳤으니 이거라도 있어야 할 테니까요.”

세연이 시야가 가려진 눈을 치켜뜨자 도하의 미소가 의뭉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은 어디로 가려고 이러시는 거지?’

어쩐지 아는 얼굴을 만날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불안감이 들어 세연은 그가 씌어 준 모자를 꾹꾹 눌러썼다.

저녁에 열리는 야시장의 열기가 한낮의 기온처럼 뜨거웠다.

‘이래서 모자를 선물하셨구나.’

관광 명소로 유명한지 관광객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어 간간이 한국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기도 어렵지 않았다.

‘방송을 타게 되면 대표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한 번 보면 잊힐 외모가 아니니 가능성이 아예 없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과 마주칠까 걱정된 세연은 도무지 야시장의 활기에 녹아들 수 없었다.

“마음 놓고 봐요.”

그러한 마음이 행동으로 티가 난 모양이다.

심란한 그녀의 마음과는 정반대인 여유로운 목소리가 모자를 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초조한 기색의 눈동자가 좌우를 빠르게 훑었다.

토끼처럼 세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도 내가 아무 일 없게 커버할 겁니다.”

말은 든든했다.

이어지는 행동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챙을 위로 들어 올렸다. 시야가 반쯤 가려진 눈을 그에게로 맞춘다.

“나, 믿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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