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화 (128/132)

외전 2 화

멜에게 왕성의 금색 날파리라고 불리는 존재. 프로셴은 녹시렐 공작 부군에게 스스로가 눈엣가시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서글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엔시아레에게는 거의 삼촌 아니야? 나도 보고 싶어!’

왕성을 제 마음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프로셴은 엔시아레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늘 전전긍긍했다. 세르베인에게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땅히 친구의 아이가 태어나면 당연히 보고 싶은 게 정상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인어가 제 아이를 남에게 보여줄 것 같지 않았다. 특히 대상이 나라면…….

‘언젠가 아이가 데뷔탕트에 얼굴을 비추거나, 세르베인을 도와 업무차 왕성에 방문하는 날이 오겠지…… 한 15년 정도는 걸리려나.’

프로셴은 내심 15년 뒤에야 엔시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단념하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느 날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다음에는 엔시도 함께 가게 될 것 같아……?”

서신의 내용을 고스란히 읽는 프로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이내 제 옆에 서 있는 보좌관을 닦달하며 물었다.

“내가 똑바로 읽은 거 맞지? 그렇지?!”

“예, 폐하.”

확답을 받은 프로셴은 잠시 멍하니 서신을 든 채 허공을 보다가 곧바로 문밖에 있을 사용인들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당장 갓난아이를 위한 선물을 마련하거라!!”

* * *

“흠, 상당히 소란스럽겠는걸.”

“뭐가?”

녹시렐 가문의 집무실. 멜은 엔시를 품에 안고 창밖을 구경시켜주다가 들려온 말에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세르베인은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서신을 태우더니 답했다.

“이번에 왕성에 갈 때 너랑 엔시도 같이 가겠다고 했거든. 프로셴이 벌써부터 엔시 선물을 준비하는 모양이야.”

“그…… 렇구나.”

멜은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 인간 선물 필요 없어! 안 받을 거야!’라고 말하자니 세르베인에게 속 좁은 남자처럼 보일 것 같았다.

세르베인은 정말이지 그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허허 내가 젊은 시절에는 왕에게 청혼을 받은 적도 있단다.’라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노인보다도 그 사건에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일은 미처 2년도 되지 않았다. 인어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건 방금 전에 청혼받은 것이나 다름없단 말이다.

‘물론 정말 순수한 친구로 대하는 편이 그 남자에게는 더 잔인할 것 같긴 한데…… 그래서 가끔은 마음에 들긴 하지만 또 때로는 아예 연을 끊어주었으면 좋겠고…… 하지만 그렇게 하라고 종용하기에는 그 남자가 하필 왕이네.’

멜은 속으로 울분을 삭였다. 저도 제가 바라는 세르베인의 태도가 무엇인지 정할 수 없어서 갈팡질팡하는데 뭐라고 의견을 표하겠는가.

멜은 울적한 기분으로 엔시만 내려다보며 그 뺨을 살살 손가락 등으로 어루만졌다. 꺄르르, 아이는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세르베인이 물었다.

“싫어?”

“응?”

“괜찮아. 그러면 나 혼자 갔다 올게. 네가 엔시를 프…… 남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거 알아.”

세르베인은 예리했지만, 종종 정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살짝 빗맞히곤 했다. 하지만 멜 역시 정말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려웠다.

또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얼렁뚱땅 변명을 지어냈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왕성에 가지 않는 거야. 계속, 영원히, 나와 엔시랑 이 저택에만 있는 거야.’

“아니야. 그동안은 추워서 엔시랑 네가 집에만 있길 바랐던 거야. 이제는…… 날씨가 조금 풀렸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

속내를 숨기고 그렇게 말했다. 순진한 세르베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속아 넘어갔다.

“그래. 그런데 바깥이 그렇게 추웠던가? 그동안 우리 같이 산책도 늘 같이했잖아.”

“하하. 며칠 전에 헥사바임 저택 갔다 오고 나서 너무 추웠다고 한 말 잊었어?”

“……그러게? 왜 그 일을 잊었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진 세르베인은 턱 아래 엄지를 받치고 검지로 입술을 매만졌다.

멜은 침을 꿀꺽 삼켰다. 괜한 말을 했다. 속으로 자책하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세르베인의 반응을 지켜보는데 다행히 그녀의 반응은 무던했다.

“이번 겨울은 몇몇 날만 빼면 따뜻해서 그랬나 봐.”

“응. 그런 것 같아!”

멜은 활짝 웃으며 그 말에 동조했다. 이렇게 넘어가는구나 싶어 안심하는데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미처 지적하지 못했는데 세르베인은 서신을 태웠다. 왕성에서 온 것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세르베인, 그런데 서신은 왜 태운 거야?”

“아무래도 첩보를 보관해두는 건 좀 그렇잖아.”

“첩보?”

멜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세르베인을 바라봤다. 물론 자신은 그 왕을 싫어하지만 두 사람은 친구 사이 아니었던가?

멜도 이제 인간 세상과 권력의 흐름에 대해 잘 알았다. 그런데 설령 잘 몰랐다고 해도 왕성 안에 첩자를 두었다는 말이 저렇게나 일상적으로 나올 말이 아니란 것은 알았다.

세르베인은 어깨만 살짝 으쓱이곤 웃었다. 멜은 ‘으응…… 좋은 행동 같아!’라고 답하고는 엔시를 바라봤다. 그 순간, 엔시가 저와 눈을 맞추더니 옹알이를 했다.

“아웅!”

“!”

“아, 우…….”

“세상에! 어서 아빠라고 말해 볼래?!”

멜과 마찬가지로 엔시의 희미한 옹알이를 들은 세르베인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멜의 옆으로 다가왔다. 멜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엔시를 안은 채 계속 ‘아빠라고 불러봐.’를 연발했고, 세르베인 역시 다를 바는 없었다.

“엔시. 엄마라고 해보렴!”

하지만 엔시는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문을 쏙 감췄다. 심지어 이후에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우…… 우아앙!”

“아, 엔시! 미안해. 놀라게 해서 미안해.”

허둥지둥, 번갈아 가며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멜과 세르베인은 온갖 노력을 했다. 엔시는 곧 울음을 멈췄지만 놀란 탓인지 쉽사리 옹알이를 또 들려주지 않았다.

“미안해, 세르베인. 내가 너무 경솔하게 반응했나 봐.”

“아니야. 나도 그랬는걸. 엔시가 놀랐나 봐. 다음에는 차분히 반응해주면 될 거야.”

“하지만 이러다가 엔시가 영영 말을 안 하려 하면 어떡하지……?”

“그러진 않을 거야.”

세르베인은 엔시가 태어난 뒤 부쩍 더 걱정이 늘어난 듯한 멜을 보며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멜은 정말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간신히 웃음을 갈무리한 뒤 그를 달랬다.

“너무 걱정 마. 곧 또 말하려고 할 거야.”

“그럴까?”

“응.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엔시는 널 많이 닮은 것 같아.”

“얼굴?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세르베인을 닮은 눈동자가 너무 예쁘다고 생각해!”

“응. 고마워.”

사실 얼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세르베인은 그냥 그렇게 답하곤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멜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 수조 안에서 너는 며칠 동안이나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었지. 그래서 인간의 말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고 말이야.’

세르베인은 엔시의 여리고 예민하고 심약한 성정이 멜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험한 인간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멜도, 엔시아레도 너무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서 걱정스러웠다.

* * *

멜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세르베인이 예상했던 대로 엔시는 곧 더 많은 옹알이를 하기 시작했다.

“안, 녕, 하, 세, 요.”

“아어아우…….”

“세르베인, 들었어?!”

왕성으로 향하는 마차 안. 요즘 엔시는 천천히 짧은 문장이나 단어를 말해주면 희미하게 따라 말하곤 했다. 멜은 그게 너무 신기했는지 요즘에는 더욱더 엔시에게 자주 말을 걸곤 했다.

“응. 곧 있으면 정말 정확하게 말할 것 같은데?”

“헤헤, 세르베인을 닮아서 똑똑한가 봐.”

“우어아…….”

모든 부모들이 그러하듯, 멜도 벌써부터 팔불출이 되어 가는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세르베인 역시 멜과 똑같이 ‘우리 애 천재 아니야?’라는 말로 수다를 떨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쁜 날에 괜히 추운데 멜도, 엔시도 고생시켜서 미안하네.’

세르베인은 마차 창문을 잠깐 바라봤다. 분명 저택에서 출발하기 전에는 날씨가 매우 따뜻했기에 걱정 없이 집 밖으로 나섰는데 생각보다 여전히 겨울 날씨였다.

다행히 늘 그러했듯 멜이 ‘두꺼운 옷 입어!’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하는 실수 따위는 면할 수 있었지만. 왜인지 면목이 없어서 세르베인은 조금 침울하게 말했다.

“이런 날에는 파티라도 열어야 하는데…… 요즘 계획 중인 일이 있어서 왕성에 꼭 가야 했거든. 미안해, 고생하게 해서.”

“아니야! 전혀 사과할 일 아니야!”

멜은 혹시나 세르베인이 제게 ‘걱정되니까 저택에서 쉬고 있을래?’ 같은 말을 할까 봐 설레발을 치며 괜찮다고 방긋방긋 웃었다. 엔시는 그런 멜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냥 제 눈앞에 있는 얼굴이 멜이라서 그런 것일까?’

문득 세르베인은 엔시가 조금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태어난 지 세 달 정도밖에 안 된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제가 괜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세르베인은 멜의 뺨에 키스했다.

“그래도 이번에 일 끝나고 돌아오면 휴가라도 내려고.”

“휴가?”

“응. 같이 여행 가자.”

“너무 좋아! 일은 언제 끝나? 무슨 일을 하려는 거야?”

만약 멜이 첩자였다면 세르베인은 제 목숨 따위는 이미 예전에 사라졌겠구나, 같은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베갯머리 송사라고 하던가. 멜이 바라는 것, 알고 싶은 것을 말하면 세르베인은 늘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아딜리아에 첩자를 심으려고.”

“어……?”

물론 세르베인은 늘 갑작스레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되는 연인의 심정 같은 건 짐작도 못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