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화 (129/132)

외전 3 화

막상 도착한 왕성이지만 멜은 곧장 프로셴을 만나러 가기가 매우 싫었다. 심지어 그 남자에게 엔시까지 보여줘야 한다니……. 더더욱 걸음을 옮길 의욕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던 그가 택한 방법은 최대한 일정을 미루는 것이었다.

“세르베인, 나 산책하러 가고 싶어.”

“그러고 보니 네가 왕성 내부에 있는 온실을 좋아했지. 들렀다가 갈래?”

“좋아!”

사실 온실을 그렇게나 좋아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세르베인과 함께 예전에 방문했던 장소니 다시 가보면 기쁠 것 같긴 했다.

지나가던 왕성의 사용인들은 세르베인을 보고 익숙하게 넘겼다가, 저택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던 녹시렐 공작 부군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가, 그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멜은 남들에게 아이의 모습을 보여줄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궁금증만 더 키운 채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조금 성가시지? 다음에는 미리 주의를 주도록 할게.”

두 사람밖에 없는 정원을 걸으며 세르베인이 입을 열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멜은 빈말로라도 ‘아니, 괜찮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열심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런. 정말로 싫었나 보네.’

세르베인은 속으로 혀를 차며 부주의했던 저를 탓했다. 하지만 사실 멜은 그냥 정신없이 다음 일정을 찾기 위해 머리가 복잡할 뿐이었다.

‘이 다음에는 뭘 하자고 하지……?’

너무 뜬금없는 것을 요구하면 세르베인이 제 의도를 눈치챌 것이다. 그리고 세르베인에게 이런 면모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 끙끙 앓던 멜은 문득 아주 기발한 생각을 해내고 말았다.

“세르베인, 헤론시를 만나러 가자!”

“어?”

세르베인은 뭔가 굉장히 해괴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그때서야 멜은 ‘내가 다른 인간을 보자고 하는 일이 가장 뜬금없는 것이었지.’라고 제 패착을 인정했다.

최대한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멜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정신없이 변명을 더듬더듬 이어갔다.

“일단은…… 나를 가르쳤던 인간이기도 하니까. 그냥 잘 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

“그러고 보니 그 남자가 어…… 어릴 때 보육원에서 자랐대. 그래서 아이들을 많이 달래봤을 것 같아서. 그…… 엔시를 돌보는 것에 관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변명 안 해도 돼, 멜. 너도 충분히 다른 사람과 친분을 만들 권리가 있어……. 내가 널 너무 집에서만 지내게 했나 봐.”

세르베인이 별달리 이 상황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제 의도대로 잘 이뤄졌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전혀 바라지 않았던 종류였다. 멜은 경악하며 반박하려 했다.

“!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헤론시를 보러 가자. 난 종종 봤었는데 확실히 넌 그를 못 본 지 오래되긴 했네.”

일단 제 계획대로 프로셴을 만나는 일정은 미뤄졌기에 멜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억울했고…… 또 질투심이 샘솟기도 했다.

‘나는 네가 다른 사람 만나려고 하면 질투 나는데, 넌 그렇지도 않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여기서 사실 그런 인간 딱히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세르베인은 곧장 프로셴에게 가겠지. 멜은 썩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끄덕였다.

물론 그렇게 만나게 된 헤론시는 단번에 이 상황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녹시렐 공작 부군께서 저를 보고 싶어 하셨다고요……?”

“그래. 자네와 제법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그럴 수도 있지.”

“…….”

헤론시는 슬그머니 세르베인의 눈치를 살폈다. 저 의부증 공작이…… 무려 그 남자가 저를 보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는데 제게 아무런 해코지를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 병증이 개선되신 건가? 그나저나 멜 님이 나를 보고 싶어 하실 리가 없는데…….’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헤론시에게 세르베인은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귀족들이 서로 인사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계절 관련 잡담이었다.

“그나저나 겨울이 끝나가는군. 어서 수국이 피는 계절이 왔으면 좋겠어. 물론 햇빛이 센 여름은 싫지만.”

“하하. 저도 여름은 너무 더워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난 꽃과 햇빛이 친하면 질투가 나서 그렇더군.”

“…….”

“그럼 이만 대화 나누도록 해.”

수국. 저 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가십거리 중 하나는 단연코 녹시렐 공작의 배필에 관한 것이었다.

평민이라는 것 외에 출신 성분이나 행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 남자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하지만 어느 이야기 하나라도 녹시렐 공작의 귀에 들어갈까 봐 겁이 난 이들은 ‘수국’, ‘물망초’ 따위의 은어를 사용해 그 아름다운 남자를 지칭하곤 했다. 그리고 그 은어를 녹시렐 공작이 모를 리 없다.

‘곧 끝날 겨울처럼 네 목숨도 끝나는 걸 원치 않으면 수국 같은 멜 님을 빨리 보내라. 햇빛, 그러니까 금발인 내가 멜 님과 지나치게 친한 것이 보기 싫다. 대충 이런 의미군…….’

뜻을 해석해낸 헤론시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달칵.

멜은 세르베인이 닫고 나간 문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봤다. 당연히 그녀도 저와 함께 이곳에 있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계획이 뒤틀려버렸다.

‘걱정 마. 나는 잠시 업무 좀 보고 있을게. 프로셴을 만나러 가는 건 같이 갈 테니까 이야기 끝나면 문밖의 하인에게 알려줘.’

멜은 여전히 세르베인이 저를 두고 떠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엔시를 안은 채 멍하니 테이블 위만 바라봤다. 찻잔에 비친 제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우으응…….”

“아, 아냐. 엔시. 울지마.”

제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걸까. 멜은 칭얼거리기 시작하는 엔시를 어르고 달랬다.

그때까지 망부석처럼 맞은편에 앉아 어색한 웃음만 흘리던 헤론시가 입을 열었다.

“저……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

“저를 만나고 싶으셨다고요.”

“…….”

“아이가 참 예쁘네요. 여자아인가요, 남자아인가요?”

“남자야.”

헤론시는 속으로만 허허, 하고 웃었다. 녹시렐 공작이 사라지자 빠짐없이 제 말을 무시하던 남자는 아이에 관한 질문만큼은 짧게나마 대답을 해와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군요. 저는 바깥소식을 잘 몰라서 미처 몰랐네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

“아이가 순해서 돌보기는 편할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전혀.”

“네?”

“나나 세르베인 둘 중 한 명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엄청 울어.”

“아,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들이 있죠. 저도 보육원에서 어린 동생들을 많이 돌봐서 안답니다.”

헤론시는 사실 멜이 저를 만나러 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저와 친밀감을 느껴서 만나러 왔다는 변명은 전혀 믿지 않았다.

‘예상되는 건 하나지. 그냥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란 거.’

헤론시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 나갔지만, 나중에는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사실 너무 많은 질문을 하는 것도 실례에 속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멜은 닫힌 문만 바라볼 뿐, 도무지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내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울먹이는 아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면서도 ‘세르베인을 불러줘.’라는, 헤론시가 기다리고 있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국 헤론시는 대화 대신 보모 역할이 더 마음이 편하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아이를 한번 달래보아도 될까요?”

* * *

멜에게 혼자 프로셴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말한 건 거짓이다. 그 시각, 세르베인은 프로셴과 짧게 티타임을 가졌다.

‘본인은 숨긴다고 노력한 모양인데 숨겨질 리가.’

세르베인은 진작에 멜이 프로셴과 만나고 싶지 않아서 온갖 변명거리를 늘어놓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프로셴과 저 사이의 관계를 신경 쓰기 때문이란 것 역시도.

이 상황에서 멜의 신경을 누그러뜨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다만 그것이 프로셴에게는 매우 잔인한 일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미안할 따름이었다.

“와, 드디어 왔네. 오는 길 힘들진 않았어? 그런데 멜 씨랑 엔시는?”

막 응접실에 도착한 프로셴이 들뜬 얼굴로 자리에 앉아 물었다.

그 해맑은 얼굴을 보니 더더욱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지만 세르베인은 어쩔 수 없이 준비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두 사람은 헤론시랑 같이 있어.”

“아. 그 남자가 있었네. 그런데 그 남자는 왜 보러 갔대?”

“그냥 오랜만에 만나고 싶었나 봐. 그나저나 할 말이 있어.”

“무슨 말?”

“너 이제 결혼할 때 되지 않았어?”

다짜고짜 나온 말에 프로셴의 얼굴이 처음에는 황당함을 띄다가 서서히 굳어졌다.

이내 프로셴은 굉장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을 했다.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심각한 표정을 모조리 지우고서 빙긋 웃었다.

“아. 이제 더는 못 미룰 나이가 되어버린 걸까.”

“결혼 적령기를 이미 조금 지나긴 했지.”

“흑……. 너 말이야, 블미에한테도 그 이야기 꺼냈어? 괜히 나만 노총각이라고 구박하는 거 아니지?”

웃으며 장난처럼 하는 말에 뼈가 있었다. ‘내가 불편해서 그러는 거야?’ 미약하게 어린 원망과 상처 섞인 속내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세르베인 녹시렐은 바보가 아니다.

세르베인은 무심코 사과를 할 뻔했다. 하지만 프로셴이 곧장 말을 돌려서 그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는 짓 따위는 막을 수 있었다.

어차피 이 화제에 관해서는 진심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너무나 쉽게 간파되는 가식이지만 거기에 속아 넘어주는 것이 규칙인 것이다.

“물론 블미에는 워낙 친척들이 많으니까 후계자 걱정은 없겠지만. 휴. 나는 상황이 다르니까 줄곧 귀족들이 닦달할 수밖에 없긴 해.”

“아무래도 그렇지.”

세르베인은 알았다. 눈치 빠른 프로셴은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게 후계 문제, 다른 귀족들의 충고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멜의 기분을 생각한 탓임을 알 테다.

차마 직접 말하기에는 민망해서 말하지 못한 이유를 눈치챘지만 프로셴은 모르는 척 웃었다.

“네 말이 맞아. 나도 이제 결혼할 상대를 찾아야겠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