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화 (44/132)

44 화

맨 뒷장에는 그 나이 때 소녀들 같은, 하지만 그 나이 때 소녀들은 바라지 않을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고, 친구를 사귀는 것.

그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소망쯤에 들어갈 수 있을까.

“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거야?”

사실 일기를 읽은 이상 알 수밖에 없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멜은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했다.

세르베인이 제게 너의 눈은 어머니의 눈과 닮았다고 말한 것.

어머니가 좋아하던 호수니 네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한 것.

그리고 가족에 대해 물어보며 제 반응을 두려워하던 모습들까지도.

그때는 이상한 말들, 이상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르베인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과거를 자극하는 기폭제였다.

일기장을 빼곡히 채운 말들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너를 애완동물이나 장식품으로 여겨야 해. 널 보내고 싶지 않다면 그래야 해.

한때 그냥 흘려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끝내 자신을 보내 주겠다고 말했던 얼굴을 기억한다.

“네게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거라면 나는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

숨이 벅차 왔다. 다리는 뛰지도 않았는데, 심장은 쿵쾅쿵쾅 터질 듯이 혼자 달리고 있었다.

“널 미워할 수 없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 걸까.”

널 미워하기 전에, 사람이 되기 전에, 그냥 죽었어야 했을까?

아니, 아니다.

멜은 그 생각을 접어 버렸다. 그는 아직 죽음이 두려웠다.

……사실 두렵다기보다는 아직 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죽고 싶지 않았다.

“그냥 거짓이라고 생각할래. 그냥, 그냥…….”

멜은 일기를 다시 침대 아래에 집어넣어 버렸다.

하지만 그 앞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떠날 수가 없었다.

모르는 척해 봤자 변하는 건 없다. 무의식 속에서 뚜렷한 진실이었다.

결국 멜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널…… 다시 만날 수는 있는 걸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밤들이 흘렀다.

* * *

벌컥!

어느 날, 저택을 찾아온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제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왔으면서, 정작 멜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넌 누구야!”

멜은 인간이 무서웠다. 하지만 꼭 물어봐야 하는 것이 있었다.

조금은 반갑기까지 했다. 그래서 간신히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세르베인을 알아?”

일기가 끊긴 걸 보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제가 이때까지 겪은 그 모든…… 모든 일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녀를 미워하려면 정확한 진실은 알아야 할 거 같았다.

“원래 여기 살았었는데, 지금은 떠났어. 하지만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옛날에는 그게 원망스러웠는데, 지금은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결국 멜은 진실을 묻어 두지 않기로 했다. 수많은 날들을 지새우며 내린 결론이었다.

세르베인의 감정은 진심이고,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다.

제 마음 편하자고 그 애를 오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아무 소식이라도…… 아는 게 있다면 말해 줘. 부탁할게.”

하지만 멜이 겨우 용기를 내어 꺼낸 부탁을 남자들은 비웃으며 넘겨 버렸다.

“뭐라는 거야, 저 머저리가.”

“이름만 들어서는 그 여자 말인 것 같은데? 이 집안의 마지막 후계자 년 말이야.”

“아, 그 말로가 끔찍했다던?”

남자들은 곧 낄낄대며 온갖 저급한 말들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저택에서 온갖 고급 서적만 읽었던 멜은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모욕적인 말이란 건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멜은 시체처럼 굳은 안색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내 그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뭐, 뭐야! 이 새끼가! 이거 안 놔?!”

멜은 세르베인이 미웠다.

하지만 다른 인간이 그 애를 욕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세르베인은 나한테는 나빴지만 너한테는 안 그랬잖아.”

“이게 뭐라는 거야!”

“네가 친구를 먹어 봤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봤어?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홀로 몇십 년간 살아 봤어? 아니잖아.”

“친구를 왜 먹어, 이 미친 새끼가! 야! 이 새끼 죽여 버려!”

“그러니까…… 넌 그 애를 욕할 수 없어.”

멜은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 순간 뭔가가 쥐어짜지는 소리가 들렸다.

찌걱!

조금 힘을 줬을 뿐인데 남자의 움직임이 서서히 약해지다 이내 사라졌다. 허무한 끝이었다.

손에서 힘을 놓으니 축 처진 몸뚱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멜은 감정의 동요도 없이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바라봤다.

“죽었어?”

자신을 위협하고 겁박하던 인간이 너무 쉽게 죽었다.

세르베인을 욕하던 인간이 너무 쉽게 죽었다는 게 신기했다.

“인간은 쉽게 죽는구나.”

깨달음을 얻은 멜이 중얼거리자 정신을 차린 다른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저놈을 죽여! 분명 녹시렐 가문의 남은-.”

촤악-.

멜은 차례차례 그들을 처리했다.

첫 살인치고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은 죽으면 집으로 돌아가니까. 별일이 아니었다.

세르베인은 누군가가 저를 탐내면 눈을 뽑고 손을 자르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니 누군가가 저를 죽이려 든 걸 알면 당연히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세르베인도 이러길 바랐을 테니까.

“왜 숨어들어 왔어? 너도, 너도, 너도…….”

“도, 도대체 어떻-.”

촤악!

그날 이후 부쩍 저택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들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괜찮아. 너도 금방 집으로 보내 줄게.”

멜은 무감각하게 숨어들어 온 암살자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그 무렵 감을 잡았다. 이런 인간들은 다 저택에서 쫓아내 그들의 집으로 보내야 한다고.

물론 그 외의 유형의 인간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똑똑.

“저기요,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요…….”

쾅!

간혹 길을 잃은 어린애들이나 멍청한 성인들도 찾아왔다.

그땐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문을 쾅 닫으면 알아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 알아서 제 갈 길을 찾아가곤 했다.

서걱서걱!

멜은 주방으로 식재료를 옮겨 손질하기 시작했다.

저택에 침입하는 인간의 수가 늘어서 다행이었다.

호수에는 이제 물고기가 없다. 그래서 마침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물고기보다는 이걸 먹는 게 낫다. 그게 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세르베인.”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먹는 삶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본래 자신은 먹지 않아도 삶을 살아갈 수 있던 존재였으니까.

먹는다는 행위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너는 언제 오는 거야?”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세르베인이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이름을 알고 비웃는 인간들이 더러 있었는데 몇십 년 흐르니 이제 찾아오는 인간들 중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정원에는 네가 말했던 수선화가 피었어. 나와 함께 보고 싶다고 했잖아.”

멜은 그 노란 꽃의 이름을 몰랐지만, 일기를 읽은 후에는 그게 수선화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 죽을 거야? 왜 이렇게나 죽지 않는 거야?”

쓴맛이 감도는 고기를 삼키며 생각했다.

“누군가가 너를 죽여서라도 네가 이곳으로 오면 좋겠어. 어차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일 뿐이잖아.”

그리고 그 무렵, 꿈을 꿨다.

* * *

멜은 꿈을 꿨다.

아주 기묘한 꿈이었다.

“멜……? 너 왜 여기에 있어?”

자신을 계속 사랑해 주고, 너무 사랑해서 저를 호수에 가둬 버렸던 세르베인의 꿈을 꿨다.

꿈속 세르베인은 비록 늦었지만,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왔다.

아주 행복한 상상이었다.

“……진짜 세르베인이야?”

“왜, 왜 네가……! 아, 세상에!”

그런데 꿈속의 세르베인은 이상했다.

저를 보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혹은 슬프게 바라보던, 혹은 짙은 갈망을 담아 바라보던 평소의 세르베인이 아니었다.

그 애는 허공을 바라보며 울다가, 다시 제 얼굴을 보고 울었다.

멜은 세르베인이 우는 얼굴이 너무 낯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자, 멜. 내가, 내가 널 바다로 데려다줄게.”

“…….”

또 거짓말. 멜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가증스러운 거짓말의 말로야 뻔했다. 그 말로 저를 꾀어내고, 또 어딘가에 가둔 채 버리고 떠나겠지.

혹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다시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멜은 꿈속 세르베인이 내민 손을 잡았다.

굳이 그 손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 이후,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그녀였지만 이끈 것은 자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저벅저벅.

멜은 그 손을 잡고 저택을 나가 세르베인과 함께 호수로 향했다.

“멜……? 뭐 하는 거야? 어디로 가는 거야?”

“…….”

“말을 해!”

뒤에서 그 애가 뭔가를 계속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소리라는 것,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익숙한 호수가 보이는 곳으로.

우뚝.

호숫가에 도착한 멜은 별안간 소식도 주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계속 돌아보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세르베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멜, 지금 무슨……!”

첨벙!

멜은 세르베인이 미우면서도 사랑스러워서, 그 애를 호수에 빠뜨렸다.

단순히 조금 가둬 둘 생각이었다.

그녀도 자신에게 그랬으니까. 그녀 때문에 이렇게나 고통받은 자신이라면, 그 정도 권리는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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