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화 (43/132)

43 화

촤륵!

“아아악!”

때때로 멜은 소리를 지르며 제 팔목에 걸린 팔찌를 벽에 던져 버렸다.

하지만 혹시 팔찌에 달린 장식이 하나라도 부서졌을까 봐, 겁을 잔뜩 먹고 서둘러 팔찌를 주워 살피는 짓을 반복했다.

“내가…… 왜 그랬지?”

조개나 소라의 끝부분이 조금씩 부서진 날에는 후회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소중했던 것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멜은 이미 무언가를 잃은 전적이 있었다.

그건 씻을 수 없는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소중하면…… 조심히 다뤄야 해.”

너무 오래되고, 물에 자주 젖고, 자주 접었다 폈던 편지는 바스라지듯 사라졌었다.

“내 잘못이야. 내가 멍청하게 굴어서……, 이번에도……!”

그때 제가 편지를 조심히 다루지 않았기에 세르베인의 언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영원히. 그런데 또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이제 멜에게 남은 세르베인의 흔적은 팔찌뿐이었다. 하지만 멜은 이내 눈물을 닦아 냈다.

“아니. 안 소중해. 내가 왜 울어야 해? 이깟 게 뭐라고……?”

하지만 이후 멜은 팔찌를 던지지 않았다.

다만 때때로 충동을 참을 수 없을 때에는 가끔 세르베인이 제게 했던 의미 모를 짓, 왼손 약지를 깨물었던 행위를 따라 해보곤 했다.

콰득!

하지만 아무리 세게 물어도 잇자국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사라졌다.

맥락상 떠올려 보자면, 세르베인은 그 당시에 반지가 없어서 대신 제 손가락을 물었던 듯했다.

반지를 주겠다고 말했지만, 그 다음 날 세르베인은 오지 않았다.

“네가 그랬던 이유를 모르겠어.”

무언가 의미가 있던 걸까. 반지를 준다는 건 이별을 위한 준비였던 걸까.

다음 날, 멜은 인간들의 동화를 읽었다.

저택 구석에 방치된 것을 보아 세르베인이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인 것 같았다.

“유치하고 지루해.”

흔한 이야기였다.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가 끝에 다다랐을 때 멜은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곧장 책장으로 다가갔다.

쿠당탕탕!

멜은 다급히 동화책들을 전부 쏟아붓듯 바닥으로 밀어 버렸다. 그 후엔 바닥에 주저앉아 순식간에 전부 읽었다.

방금 유치하고 지루하다는 평을 남겼으면서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이야기 속 마지막 행위 때문이었다.

“도대체 의미가 뭐야, 세르베인……?”

동화. 어떤 신분이든 간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결말을 맞는 것.

그 이야기의 대부분에서 인물들은 반지를 나누었다. 영원을 기약하는 의미였다.

반지는 사랑의 증표와 같은 것이었다.

* * *

멜은 동화를 읽고 몇 주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녹시렐 공작의 방에서 계속 허공을 응시했다.

“집을 치우자.”

그러던 어느 날, 멜은 방치된 저택을 청소하기로 결심했다.

이전까지는 삶의 의지도, 목표도 없이 당장 지낼 곳만 대충 치우고 지냈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 저택을 이전처럼 말끔히 치우고 싶어졌다.

동기는 단순했다. 세르베인이 올 때까지 자신이 머물러야 하니까.

하지만 진짜 동기는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리고 어쩌면 너랑 함께 지낼 수도 있으니까.”

멜은 청소 도구를 챙기며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 이야기처럼, 네 행동의 이유가 그 당시에는 정말 나를 사랑해서였다면, 그러니까…… 혹시 모르는 거잖아. 그렇지? 어차피 너, 죽으면 저택으로 온댔잖아.”

처음에는 1층을 청소했고, 가장 마지막에는 세르베인의 방을 청소했다.

때때로 엉망인 그 방에 들어가 책을 읽곤 했지만 청소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투욱!

다른 방을 청소할 때도 그랬듯, 멜은 세르베인의 방에 있던 침대 매트리스를 옮겼다.

그런데 매트리스를 들었을 때 어떤 노트가 떨어졌다.

“이건…….”

멜은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방에 지낼 때 세르베인이 때때로 무언가를 기록하던 노트였다.

팔락!

멜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펼쳤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익숙한 글씨체가 보였다.

그 글씨를 보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멜은 그걸 읽지 않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온갖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으니까.

처음 시작은 아주 어린 시절의 세르베인의 이야기였다.

그 애는 넓은 바다도 아니고, 호수처럼 작은 이 저택에서 평생을 살았다고 했다.

라헨 오빠처럼 나도 저택을 떠나고 싶다. 바깥에 나가고 싶어.

세르베인은 단 한 번도 저택을 떠난 적이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저택을 떠난 거야……?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래서 나를 버리고서라도 떠난 거야?”

화가 났지만 동시에 연민이 들려 했다. 하지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널 변호해 주지 않을 거야. 넌 내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어.”

멜은 그 부분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일기를 읽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에 대한 저주, 죽을 날을 세던 나날, 자신을 두고 저택을 나간 삼촌이자 오빠.

일기의 내용은 늘 그 화제에서 빙빙 돌았다.

그것이 그 애의 인간관계의 전부이자, 인생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부였다.

자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비늘을 하나씩 뜯으면 비명이라도 들려주지 않을까?

비록 기대했던 느낌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지만. 분명 자신의 이야기였다.

“하…… 하하. 역시 넌 그럴 줄 알았어. 사랑일 리 없지.”

화가 나서 나오는 말이어야 할 텐데, 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 시절의 제멋대로이던 세르베인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다.

가라앉아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것보다 차라리 제게 포악하게 구는 모습이…… 차라리 반가웠다.

설령 그게 사랑이 아닐지라도 괜찮았다.

“…….”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수 없었다.

제멋대로 저를 관찰하던 내용은 서서히 문장만 봐도 스며 나오는 애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너무 아프다. 언제까지 아파야 할까. 아플 때면 네가 보고 싶어.

“아, 아니야. 너 아프지 않잖아. 그런 말 나한테 한 번도 하지 않았잖아.”

하지만 알아. 너는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으리란 걸.

“내가 아니라 너잖아. 네가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잖아.”

멜은 최선을 다해 그 말들을 부인했다.

하지만 일기장을 쥔 손은 초조함에 떨리기 시작했다.

세르베인이 혼자 읽을 일기에 거짓을 적을 이유가 없단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이라면 오히려 빨리 죽기 위해 노력했을 거야.

설마 죽을 거라고 말했던 건 네 의지가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이제는 끔찍하게 아파도 살고 싶어. 너와 더 오래 있고 싶어.

나중에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무작정 부인하기에 그곳에 적힌 말들은 너무…… 처절했기에.

오늘도 너를 사랑해.

“거짓말하지 마!!”

멜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일기의 마지막 문장이 똑같았단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너를 사랑해.

오늘도 너를 사랑해.

오늘도 너를 사랑해.

그 단순한 표현이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

숨이 가빠 왔다.

“정말이야? 나를 사랑했던 게 맞아? 네가 내게 보인 그 태도가 정말 진심이었어?”

마음속 한편에서는 환희의 빛이 내리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핏물이 흘렀다.

“그렇다면 왜 나를 버렸어? 한순간에, 하루아침에 어떻게 나를 버릴 수가 있어? 수조도 깨버렸잖아. 나를 바다로 보내겠다는 약속도 거짓이었잖아!”

마침내 마음속 저울이 기울었다.

멜은 일기장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그래! 거짓말이야! 사랑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날 두고 떠나지 말았어야지! 네가 아팠을 리 없어! 그랬다면 내게 말해 줬을 거잖아!”

소리를 지르고, 일기를 던지고, 발악했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허억, 허억……!”

난동을 치느라 엉망이 된 방에서, 멜은 다시 일기를 주워 들었다. 끝까지 읽기 위함이었다.

읽다 보면 단서가 나오겠지. 네가 왜 나를 갑자기 버렸는지도 나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일기를 읽어 내렸다.

오늘 멜이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줬다. 내일도 내게 사랑한다고 해주겠지. 빨리 그 애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없었다.

“……왜 더는 적지 않았어?”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날. 일기 속 시간은 그날에 멈춰 있었다.

자신을 버리겠다는 그 어떤 단서도 존재하지 않는 채로.

멜은 일기장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까닭이었다.

촤륵!

아무렇게나 펼쳐진 일기장은 멜이 미처 보지 못했던 마지막 장을 보여 주었다.

* * *

하고 싶은 것

1. 저택을 나가는 것.

2. 친구를 사귀는 것(블미에와 친해질 수 있을까).

사실 이런 것들보다 멜과 함께 수선화를 보고 싶다. 녹시렐 저택에는 겨울이 지나면 노란 수선화가 가득 핀다. 곧 겨울이 다가오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볼 수 있겠지.

멜과 함께 벽난로 앞에서 책을 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넌 물에서 나오지 못하니, 호숫가에 작은 불을 지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다만 숲에 불이 나지 않게 조심해야겠지.

평생 저택을 나가지 못해도 괜찮다. 여태껏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친구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냥 너와 조금 더 많은 일들을 해보고 싶다.

너와 같은 세상에서, 같은 위치로, 동등하게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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