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29화 (29/94)

29. 크리스마스의 기적

2018.03.14.

터덜터덜.

승현을 보내고도 한참을 밖에 서 있었던 빛나는 꽁꽁 언 몸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과연, 오늘은 잠을 잘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잠이 들 때까지 그녀를 지켜줄 목소리도 없고, 행복한 꿈을 꾸게 해줄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을 텐데.

아니, 그건 바라지도 않는다.

승현 덕분에 사라졌던 그 악몽이 다시 찾아오지 않길 바랄 뿐.

띠리릭!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동센서가 불을 밝혀주었다.

피곤한 듯 신발을 벗고 들어간 빛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어두운 거실에 TV가 켜져 있었다.

아침에 뉴스를 본답시고 켜놓고 그냥 나갔나?

하지만 오늘 아침은 정신이 없던 나머지 TV를 켜고 뉴스를 챙겨볼 시간이 없었다.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있다!

빛나는 너무 놀라 터져 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런데 그때 소파에서 손과 발이 불쑥 튀어나왔다.

“언니, 왔어?”

“으아-아아악!”

너무 놀란 빛나는 가방을 끌어 앉은 채 벽으로 바짝 붙었다.

그러자 소파에서 정체를 드러낸 복실이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놀라고 그래?”

“뭐,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아, 음…… 아,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좀 긴데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쫓겨났어.”

“또?”

아니, 쫓겨났다 들어간 지가 언젠데 또 쫓겨났단 말인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빛나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복실에게로 다가갔다.

TV를 틀어 놓고 한참 동안 잔 흔적이 역력했다.

“아니, 왜?”

“나 어제 경찰서 갔다 왔잖아. 그 자식들이 나한테 맞았다고 어찌나 엄살을 피우던지.”

“그래서?”

“언니, 내가 누구야! 나 강복실, 다른 건 몰라도 이 얼굴로 치는 사기는 수준급인 거 잊었어? 아무도 안 믿지. CCTV도 없겠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지.”

“그 말을 믿어?”

기가 막힌 빛나가 되물었다. 그러자 복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같은 여자한테 사내 넷이 쥐어 터졌다는 걸, 어느 경찰이 믿겠어?”

“세상에, 정말 넷이나 쥐어 팼어?”

겁대가리 없는 개복실, 결국 어제도 사고 제대로 친 모양이다.

“아니지! 내가 무슨 수퍼우먼이라도 되는 줄 아나. 걔네들 약에 쩔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더만. 한 명은 나한테 덤비다 제 발에 걸려 넘어져 머리가 깨졌어. 근데 그것도 내가 했대!”

“근데, 왜 쫓겨났어?”

“응. 경찰은 믿는데, 우리 아빤 안 믿더라고.”

“헐…….”

“경찰서에 직접 와서 그 자식들 얼굴 보더니, 내 작품이 맞대.”

누구보다 딸을 잘 알고 있는 강선호다웠다.

그 우직한 성격에 얼마나 갈등을 했을까.

이실직고하자니 하나밖에 없는 개딸, 영락없는 철창감이고.

그렇다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가자니 양심에 걸리고.

결국 복실을 쫓아내는 것으로 그 양심을 대신했으리라.

“나 한동안 여기 있어도 되지? 갈 곳이 없어서 말이야.”

“나야 상관없지만…….”

그런데 이상하다. 복실이 어떻게 집에 들어온 것일까.

빛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침실로 향하다 복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우리 집 비밀번호 어떻게 알았어?”

그러자 복실은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응, 승현이가 알려주던데?”

헐, 그럼 그렇지. 어쩐지 곱게 예쁘게 간다 했다.

그렇게 승현은 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영역 표시를 확실히 하고 떠났다.

아무래도 한동안 악몽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야호- 자유다! 언니, 우리 술 한잔할까?”

너무 피곤하면 악몽 꿀 체력도 안 될 테니.

***

조깅을 하고 돌아온 승현은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한국을 떠난 지 삼 일이 지났지만 아직 빛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못한 상태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바빠서, 오늘은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용기가 안 나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한국으로 달려가고 싶어질 테니까.

대신, 승현은 미처 떠나온단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을 때 마주했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렸다.

“딱 걸렸어, 이젠 절대 도망 못 가.”

백 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고백이었다.

빛나 생각에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던 승현은 시커먼 그림자에 식겁하며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놀랬잖아!”

“너도 딱 걸렸다. 연애하니?”

승희였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서 염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시원한 커트 머리에 생긋생긋 웃는 얼굴이 아직도 그의 품에 안겼던 어린 막내 동생 같은데 이젠 이 어린 것이 애 엄마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애 엄마가 된 후부터 그녀는 변했다.

“연애하구만!”

조금 더 예리해졌다.

“누가 그래? 큰형이 그래, 작은형이 그래?”

“헐, 큰오빠랑 작은오빠도 알아? 근데 나만 몰랐어?”

그리고 가뜩이나 끈질긴데 더 끈질겨졌다.

승현이 그녀를 피해 돌아서자 급히 따라 붙었다.

곁에 붙은 껌딱지처럼,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뭐야, 어떤 여자야? 누구야? 예뻐?”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내가 연애하는 거 어디 한두 번이야?”

“연애 한두 번 한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티 나게 한 적은 없지.”

“티가 나다니?”

“진심 몰라서 하는 소린 아니지?”

승희가 짝 다리를 짚은 채 팔짱을 끼며 그의 핸드폰을 눈으로 가리켰다.

“핸드폰 손에 쥐고 안 놓잖아. 그렇다고 전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그거 짝사랑이네.”

“뭐야, 짝사랑? 그런 거 아니거든?”

“짝사랑은 아니더라도 오빠가 더 좋아하는 거네.”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애 엄마가 된 후 조금 더 예리해진 승희가 아주 제대로 본 거였으니까.

그녀가 주방에 있는 바로 훌쩍 뛰어 올라 앉았다.

그제야 승현과 눈높이가 같아진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여기 일 빨리 마치고 먼저 들어가. 나 기다릴 필요 없어.”

“그래도. 너, 그…….”

“걱정 마. 예준이 가졌을 때도 많이 타봤어.”

“임신 초기엔 비행기 더 조심해야 돼.”

그의 말에 승희는 아직 불러오지도 않은 자신의 납작한 배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그렇다고 안 탈 수도 없으니 일 끝나면 나도 바로 들어갈 거야.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

“아냐. 같이 들어갈 거야. 며칠만 더 기다리면 되는데 뭘…….”

“안 보고 싶겠어?”

“보고 싶겠지. 그런데 아직은…… 나만 참으면 되는 거니까.”

안타깝지만 그랬다.

그만 참으면 되는 상황. 아직 그녀는 그만큼 보고 싶진 않을 테니까.

***

“그러니까 이건…… 야, 너 내 말 듣고 있냐?”

이정이 서류 파일을 건네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빛나에게 성질을 확 냈다.

그러자 빛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다 듣고 있어.”

“너 요즘 이상하다? 왜 그러냐?”

“뭐가 이상한데?”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있는 것 같아. 요새 새로운 기술 배우냐? 유체이탈 같은 그런 거?”

제발, 그런 기술이라도 배웠음 좋겠다.

그러면 몰래 미국으로 달려가 위승현이 뭐하고 있나 내다볼 수 있을 텐데.

그가 떠난 지 사흘째다.

떠날 땐 그녀를 놓지 못해 그렇게 안타까워하더니 정작 돌아서자 전화 한 통 없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다.

원망스러웠다.

“근데 너 정말 이거 해야겠냐? 강석훈 때문에 김 검사는 아예 물 건너갔겠다, 검찰 자료 없이는 진행 불가하다며.”

“그래서 말인데, 다른 쪽을 공략해보려고.”

“다른 쪽, 어디?”

“마담 M 말이야.”

“아, 그 여자. 안 그래도 뒤 좀 파보고 있는데 도통 뭐가 나와야 말이지. 내가 좀 더 알아볼게.”

그렇게 말하며 이정이 차 밖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복실이 보였다.

캔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밤바람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는 마치 첫눈을 만난 강아지마냥 신이 나 있었다.

“쟤, 취했니?”

“아니, 저거 술이 아니라 콜라야. 맨정신이라고.”

“사람이…… 맨정신에 저럴 수도 있는 거구나.”

“그래도, 해맑잖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위해 빛나가 애써 웃음을 짓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꽤 늦은 밤, 때문에 이 시간에 전화벨이 울린다면 대부분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급히 회사에서 찾는다든지, 아니면 고아원에 응급 상황이 발생했다든지.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여보세요.”

[나야…….]

그 이변에 꼭꼭 눌러 담았던 그녀의 원망이 터져 나왔다.

“왜 이제 전화해, 이 나쁜 자식아!”

그리고 그 원망에 가슴 설레는 한마디가 되돌아왔다.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유빛나.]

이젠 피할 수가 없다. 제아무리 빙빙 돌려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듣는 승현이었으니까.

[근데, 안 자고 뭐해?]

“일 때문에 이정이 만났어. 그리고 복실이 때문에 일찍 잘 수도 없다고. 쟤, 맨날 집에서 뒹굴면서 TV 보고 낮잠 자다가 저녁에 나만 오면 기사회생해서 팔팔하게 돌아다닌단 말이야. 이 추운 밤에 산책도 시켜줘야 한다고!”

그 귀여운 투정에 핸드폰 저편에서 승현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복실이 혼나야겠네.]

“근데 넌 왜 이제 전화해?”

[바빴어. 할 일도 많았고. 미안.]

“언제 오는데?”

[그게 말이지, 좀 걸릴 것 같아. 이달 말쯤.]

“왜, 아예 눌러 살지?”

[그 말은 내가 보고 싶단 이야기로 해석해도 되지? 보고 싶다고 이야기 해주면 조금 빨리 갈 수도 있는데.]

“보고 싶은 정도는 아니고, 그냥 없으니까 조금 허전한 정도?”

[약해.]

“야!”

이번엔 정말로 듣기 좋은 그의 웃음소리가 핸드폰 저편에서 흘러 나왔다.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어쨌든 최대한 빨리 갈게.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네가 보고 싶어 미치겠거든.]

그 말에 심장이 콩 내려앉았다.

야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얼굴도 붉게 달아오른다.

[빛나야.]

“응.”

[잘 자. 내 꿈 꾸고.]

눈물 나게 다정한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하지만 빛나는 그렇게 끊겨버린 핸드폰을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헐, 그냥 없으니까 허전한 정도?”

곁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장난치는 이정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정도다.

“승현 씨 곁에 없으니 살아도 산 게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고, 왜 말을 못 하니!”

그 말에 괜히 민망해진 빛나는 애꿎은 복실을 찾았다.

“아니, 강복실 얘는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으아악- 깜짝이야!”

하지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는 창문에 붙어 있는 희뿌연 물체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자세히 보니 강추위로 허연 입김을 뿜어내고 있는 복실이었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에 머리까지 칠흑처럼 검고 길어, 착각하기 딱 좋은 비주얼이었다.

“이놈의 기집애! 빨리 안 들어와? 너 그렇게 머리 풀어헤치고 밤에 돌아다니면, 미친년 돌아다닌다고 파출소에 신고 들어가! 빨리 타! 집에 가게!”

***

“어머, 박 변호사님. 진짜 축하드려요. 프러포즈 받으셨다면서요?”

“축하는 무슨. 그리고 프러포즈 아냐. 그냥 커플 반지 정도지.”

“알이 너무 큰데? 와, 이거 다이아 아니에요?”

“당연히 다이아겠지. 설마 나한테 다른 걸 줬을라고?”

“대박, 진도 완전 빠르네요? 부러워라. 그러다 크리스마스에 진짜 프러포즈 받는 거 아니에요?”

“어머, 지나 씨도 참. 우리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근데, 그 사람이 성격이 좀 급하기도 해. 어쩌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꺄-아. 로맨틱해. 크리스마스 기적이라니!”

빛나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박은지 변호사와 그 외 직원들이 호들갑 속에 그녀의 다이아 반지를 보는 모습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수였다. 박변의 눈과 딱 마주쳐버렸으니까.

“참, 유변은 요즘 어때? 남자친구 통 안 보이던데.”

반갑지 않은 화제 전환이었다.

“서로 바쁘니까. 내가 요즘 통 시간이 없는 것도 있고…… 그 사람도 바쁘고.”

“유변 시간 없는 거야 우리 로펌 사람이면 다 알고 있지. 하지만 남자친구도 시간이 없어? 그렇게 바빠?”

“바빠. 그리고 지금은 해외 출장 중이야.”

사실 해외 출장인지 해외여행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국내에 없는 건 없는 거니까.

그런데 정말 곤란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어머, 뭐하는 사람인데?”

그 질문에 빛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승현이 뭐하는 사람이었더라…….

그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알려고 해? 그냥 해외 출장 다니는 사람이야. 워낙 바빠서 내년이나 되어야 들어온다고.”

“세상에! 그럼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다는 거야?”

“어머, 말도 안 돼! 두 분이 만나고 처음 보내는 크리스마스 아니에요?”

“그렇다! 그건 너무한다! 어떻게 해, 외로워서.”

순식간에 그녀에게 동정 어린 시선이 몰리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어쩌면 그것이 지난 한 주 동안 세상 가장 바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승현을 보지 못한 지 이 주가 다 되어갔다.

간혹 두세 번 전화통화를 한 게 전부다.

눈앞에 보일 때는 귀찮을 정도로 집착을 보이더니, 오히려 몸이 멀어지자 안달이 난건 빛나였다.

그나마 멀쩡한 정신에 인내하며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나쁜 자식, 위승현이 이렇게 전화를 아끼던 인간이었던가!

사람들 앞에 제 거라고 침 다 발라놓고,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내게 생겼다.

그놈의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유변, 오늘 차 안 가져왔지? 눈 많이 와서. 나는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는데, 유변 나랑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타고 갈래?”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상황은 천하의 박은지 변호사도 친절하게 만들었다.

“아냐, 됐어. 택시 타고 가도 돼.”

가차 없이 거절했다.

가는 내내 그 자랑질을 어떻게 듣는단 말인가.

택시 못 잡아 집에까지 걸어가는 한이 있어도 박변과 함께 차를 타는 것은 절대 사절이었다.

그리고 빌딩 입구를 나서는데 한동안 멈추었던 눈이 또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눈 때문에 교통체증은 좀 있겠지만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만은 미워할 수가 없을 만큼 예뻤다.

아무래도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려나 보다.

태어나 가장 우울한 크리스마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뭐해. 다들 안 가?”

빛나는 눈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남발하는 그들 사이를 제치고 걸어 나왔다.

그러자 박변이 다시 그녀에게 카풀을 제안한다.

“그러지 말고 유변, 택시 잡기 힘들 텐데 같이 타고 가. 응? 우리 남자친구도 10분 정도 늦는대. 길이 많이 얼어서.”

이제 막 문자가 왔는지 박변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이야기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넋 나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는데…… 저기, 남자친구.”

“응? 아닌데, 우리 남자친구는 10분 정도 늦는다고 방금…… 흐악! 저게 누구야!”

박변은 시선을 옮기다 기겁을 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모습에 빛나의 시선도 서서히 도로변으로 돌아갔다.

함박눈이 쏟아진다.

원망할 수도 없는 그 눈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승현이 활짝 웃으며 서 있다.

순간 빛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생각보다 그를 향한 마음이 너무 커서 헛것이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말쯤에나 올 수 있다 하지 않았나.

그런데.

“대박! 뭐야, 화보야?”

“아까 해외 출장 갔다고 하지 않았어요, 유 변호사님?”

“세상에, 유 변호사님 얼굴 보니 변호사님도 모르는 표정인데?”

“너무 보고 싶어서 빨리 왔나 보다. 서프라이즈!”

“꺄악- 완전 로맨틱해!”

그녀가 본 것을 그들도 같이 보고 있었다.

곁에서 씩씩대는 박변의 숨소리로 들어보건대, 절대 헛것이 아니다.

“위…… 승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울 줄 알았던 올해 크리스마스는 프러포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박은지 변호사도 배가 아플 만큼 멋진 크리스마스로 변해버렸다.

오로지, 그 존재 하나만으로.

승현에게로 가는 첫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시작된 느린 걸음은 그와의 거리가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조급한 뜀박질이 되어 그 넓은 품에 바람처럼 안겨들었다.

와락 안겨드는 그녀를 승현은 번쩍 안아 올렸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그의 보이스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귓전을 맴돌았다.

“생각보다 환영인사가 격한데?”

“나쁜 자식! 전화도 안 하더니!”

“목소리 들으면 일도 못 마치고 너한테 달려올까 봐 전화 아꼈어.”

“…….”

“대신…… 이렇게 빨리 왔잖아.”

아, 이 원수.

그렇게 밀어냈건만, 결국 승현은 그녀의 마음에 들어앉아 버렸다.

이젠 그가 없다는 게 상상이 안 될 만큼 아주 제대로.

“나 보고 싶었어?”

그가 속삭인다.

이에 빛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약해. 말로 해줘.”

“보고…… 싶었어.”

이제 제 마음을 확인한 마당에 이게 뭐라고 아껴둔단 말인가.

그가 듣길 원한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계속 반복해줄 수도 있었다.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고, 이 웬수야!”

그래도 그동안 연락 없어 속상했던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눈앞에 있으니 그 원망이 조금 더 커졌지만 승현의 눈엔 그것도 사랑스러운 애교로 보였다.

“빨리 오길 잘했네. 너 없는 2주…… 나한텐 아주 지옥이었거든.”

“나도.”

“이제 안 놔. 각오해야 할 거야.”

“응.”

“이대로 쭉 갈 거야. 알지? 나, 오로지 직진.”

“응.”

“사랑해.”

흑.

청승맞게도 그 한마디에 눈물이 났다.

사랑에 배신당한 이후, 다시는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한마디를 이렇게 다시 듣게 될 줄이야.

눈시울을 붉히는 그녀의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살포시 와 닿았다.

달콤한 솜사탕보다 더 달달한 입맞춤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입맞춤이 끝난 후 승현이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우리 이제…… 쌍방이다?”

그 물음에 빛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대답한다.

“당연하지.”

그녀가 먼저 입술을 내렸다.

그렇게 승현의 오로지 직진, 일방통행 사랑은 끝이 났다.

뜨거웠다.

그리고 달콤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인정해버린 그녀에게 더 이상 망설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빛나는 승현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동안 멀리 돌아오느라 꼭꼭 숨겨두었던 그 열정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그녀가 먼저 부드럽고 따스한 숨결을 불어 넣은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정신없이 엉켜들었다.

누가 봐도 진하고 섹시한 키스.

길거리에서 대놓고 하는 키스에 주변에서 야유가 터질 법도 했지만 감히 어느 누구도 그들을 손가락질하지 못했다.

함박눈이 쏟아진다.

하지만 내리는 함박눈도 그들의 키스를 멈추진 못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 속에 있는 두 사람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잠시 호흡이 가빠져 승현이 떨어져 나간 사이 빛나가 웃으며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위승현…….”

그리고 그 말에 승현이 가슴 설레는 웃음을 보이며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든다.

그렇게 두 사람에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조금 일찍 찾아왔다.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