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젠 못 멈춰.
2018.03.18.
크리스마스이브.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온 빛나는 테이블에 산더미처럼 쌓인 식료품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승현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녀가 너무 바쁜 나머지 제대로 된 데이트를 즐기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밤새도록 지치지 않고 하는 폰팅 기술만 늘어버렸다.
미안해 죽겠다. 하지만 시즌이 시즌인지라 너무 바빠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해야만 했다.
오늘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오랜만에 음식 솜씨를 발휘해볼 생각이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테이블에 있는 핸드폰이 울려왔다. 발신자를 보니 복실이다.
“응. 어디야?”
[한국에서 4년 만에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이브잖아.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보내려고.]
“좋아하는 사람? 너, 짝사랑 아니었어?”
[그랬지. 그랬는데. 치사하고, 더럽고, 아니꼬워서 이제 그 짝사랑에 진짜 마침표 찍으려고.]
“어머, 드디어 고백하는 거야? 꺄- 로맨틱해라. 근데 그 분도 너한테 마음이 아예 없는 것 아닌가 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기로 한 걸 보니.”
[누가 만나기로 해?]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간 거 아냐?”
빛나가 의아함에 되묻자 복실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며 부정했다.
[그 인간이? 아냐, 전혀.]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만나?”
[왜 못 만나. 나는…… 찾아가는 서비스야.]
빛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찾아가는 서비스란다.
그럼 당사자는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강복실이라는 무장 산타를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야말로 폭탄이 아닐 수 없다.
“부탁인데, 조신하게 굴어라. 말, 최소한 아끼고.”
넌 말만 안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
이 말이 목구멍 밖으로 치고 올라오려 했지만 참았다.
왜냐면,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알았어, 언니. 어쨌든 고마워. 응원해줘. 이번엔 기어이 자빠트리고 말 거야.]
“화이팅!”
부디 복실에게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빌고 또 빌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빛나는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비장한 표정으로 앞치마를 둘렀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그녀는 손을 털고 재료 손질부터 빠르게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고아원에 챙겨야 할 동생들이 많았기에 집안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다만, 혼자 살다 보니 조금 게을러졌을 뿐이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게 참으로 낯설었다.
전 약혼자도 오랫동안 만나긴 했지만 특별히 그를 위해 작정하고 준비해 요리를 한 적은 없었기에 더욱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위승현…… 참, 희한한 재주가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선, 승현보다 그녀가 더 애가 달은 상황이라는 걸.
문자만 와도 좋아 죽겠고, 목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뛴다.
연애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온 세상이 핑크빛이다.
그래서 요즘 들어 간혹 이런 의문이 든다.
원준과 처음 시작할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헐, 내가 무슨 생각을…….’
빛나는 어이없는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갈비찜을 앉혔다.
그리고 이제 막 시간을 체크하기 위해 돌아서려던 순간, 현관에서 들리는 벨소리에 움찔했다.
“뭐지? 복실이 왔나?”
설마 하는 생각에 빛나는 인터폰을 보았다.
“어?”
세상에, 승현이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 무의식중에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 여섯 시가 되어버렸을까 봐.
하지만 시간은 이제 막 네 시 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새빨간 장미 한 다발을 가득 든 승현이 서 있었다.
두툼한 블랙 야상을 캐주얼하게 입은 상태라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물론, 인상과는 달리 그녀를 한 번에 품고도 남는 널찍한 어깨가 가슴 설레도록 섹시하다는 것만 빼면.
“서프라이즈! 에라 모르겠다, 약속 째고 왔어. 너무 보고 싶어서.”
문을 열자마자 빛나를 품에 안은 그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정수리며 이마, 눈, 코, 뺨, 입술에 정신없이 입맞춤을 날렸다.
그 애정 표현에 빛나의 웃음보가 터졌다.
“후훗, 간지러워!”
하지만 승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묶어 드러난 하얀 목덜미에 그 뜨거운 입술을 묻었다.
그의 입술이 훑고 지나간 자리가 불에 덴 듯 화끈 거린다.
“도대체 이렇게 안아본 게 얼마 만이야? 맨날 야근이다 뭐다, 우리 목소리만 들었잖아. 벽 하나 두고 옆집 사는 거 억울해 죽겠어.”
“미안, 미안. 그래도 오늘 저녁하고 내일은 확실히 우리 둘뿐이야.”
“세상에, 우리 둘뿐이지.”
“그래. 세상에 우리 둘뿐이야.”
빛나가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까치발을 들어 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 요리 먼저.”
“아, 싫어. 지금은 굶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자신을 놔주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승현 때문에 그에게 붙들린 채 뒷걸음질을 쳐야했다.
“흠, 내 음식 한번 먹으면 그런 소린 안 나올걸?”
“요리 잘해?”
“나쁘진 않지. 몰라? 나, 이래봬도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야. 생존형 인간이라고.”
그 말에 승현이 그녀의 목에서 간질이던 숨결을 거둬들이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축 처진 그의 눈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눈 하지 마. 나는 이런 말 너한테 맘 놓고 할 수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
“이게 편해?”
“응. 사람 만나면 그 불편한 이야기 언제 꺼내야 하나, 늘 가슴 졸이면서 시작했거든. 그런데 넌, 안 그래도 되니까. 다 알고 있으니까.”
승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유빛나, 고생 끝! 이제 나랑…… 꽃길만 걷자.”
“말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내가 많이 사랑해줄게.”
결국 빛나가 행복에 겨워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린 다음에야 승현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재킷을 벗은 후 귀신처럼 주방으로 따라 들어온다.
“뭐야, 왜 여기까지 쫓아 들어와?”
“나도 도와주려고.”
승현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딱 봐도 집안일과는 거리가 먼 청개구리형이다. 오히려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일 만큼.
“할 줄 아는 건 있고?”
“아니. 하지만 가르쳐주면 잘할 수 있어.”
“헐, 됐네요. 나한테 딱 한 시간만 줘. 그럼 우렁각시보다 더 잘할 테니. 그럴 동안 넌 저 소파에 앉아서 TV나 봐.”
빛나는 그렇게 말하며 승현의 등을 떠밀어 주방에서 내보냈다.
졸지에 쫓겨나온 승현은 리모컨을 손에 쥔 채 주방으로 들어간 그녀의 뒷모습에 넋을 놓았다.
로맨틱한 크리스마스이브.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에 둘만 있게 된 이 순간,
승현은 어지러운 나라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밤, 큰 역사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떻게 그를 떼어내 버리고 요리에 집중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 언제나 그랬듯 애 달은 건 나 혼자…….”
저도 모르게 그 소리가 씁쓸하게 입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애정결핍에 걸린 어린 아이처럼 그녀에게 마냥 징징댈 수도 없었다.
주방에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 하얗게 드러난 그 목덜미도 눈이 부셨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를 더욱 가슴 찡하게 만들었던 건,
그를 위해 가스 불을 켜고, 그를 위해 오븐을 열며, 그를 위해 요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
다름 아닌 유빛나가 오로지 그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턱을 괸 승현은 그녀의 움직임을 뒤쫓으며 나른한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아, 유빛나…… 결혼하고 싶다.”
***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가 식탁 가운데 놓이자, 촛불에 크리스마스 장식까지 완벽하게 한 식탁이 그제야 그림 같아 보였다.
이제 TV에 폭 빠져 있을 승현만 부르면 되는 것이다.
그러데 빛나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그가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소파에 누워 긴 기럭지를 안타깝게 구겨 넣은 채.
“깨워야 하나?”
그녀는 잠이든 승현에게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
잠시 흔들어 깨워볼 생각도 했지만 자는 모습이 너무 예쁜 나머지 감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이들은 자는 모습이 천사라 했다.
그런데 다 큰 승현도, 자는 모습은 천사다.
딱 벌어진 어깨와 보기만 해도 단단한 그 가슴은 태초에 없는 섹시한 천사였다.
“하, 정말 확 덮쳐버릴까 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빛나는 결국 깨우지 않는 쪽을 택했다. 자는 모습이 너무 곤하고 예뻐 도저히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담요를 하나 가져와 그에게 덮어주었다.
그러곤 그의 가슴까지 담요를 끌어 올려주기 위해 허리를 숙인 순간,
그녀는 거짓말처럼 승현의 손에 붙들려 그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술이 맞닿았다.
놀란 빛나는 아직도 담요 끝을 움켜쥔 채였다.
뒤늦게야 승현이 상체를 반쯤 일으켜 그녀를 끌어당겼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밀어낼 수가 없었다.
뜨겁게 파고드는 그 입술에 홀려 반항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손끝에서 담요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승현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자세를 바꿔 순식간에 그녀를 소파로 끌어들였다.
며칠 못 했던 입맞춤을 몰아서 하려는 듯 그의 숨결이 뜨겁게 파고들어 그녀를 달궈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거침없는 키스에도 빛나는 전혀 호흡 곤란을 느낄 수가 없었다.
승현은 능수능란하게 그녀가 호흡할 수 있도록 일보후퇴해 줄곧 지켜보던 그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기 때문이다.
그 틈을 타 빛나는 간신히 이성을 붙들고 작게 속삭였다.
“찌개 끓여놨는데…….”
“나중에.”
“갈비찜도…….”
“그것도 나중에.”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그의 입술 때문에 뜨거운 한숨을 내뱉던 빛나는 셔츠를 파고드는 부드러운 손길에 저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곧 바로 승현의 입술이 제 자리로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자 그동안 서로 애만 태웠던 두 사람의 갈증이 거침없이 폭발했다.
“너 너무 길어서…… 여기선 불편해. 침실로.”
승현은 기다렸다는 듯 빛나를 번쩍 안아 올렸고, 그녀의 긴 다리는 우아하게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시트의 느낌이 와 닿고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빛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승현은 성질 급하게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어 제친다.
하지만 그것을 벗어던질 만큼의 인내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곧 바로 그녀의 목덜미로 입술을 내렸으니 말이다.
“복실이는?”
“나갔어. 아침 일찍…….”
빛나는 그동안 수 없이 상상했던 그의 베이비 펌 속에 제 손가락을 묻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언제…… 들어온대?”
“오늘 못 들어온대.”
“다행이네. 나 이거…… 밤새도록 못 끝낼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빛나의 셔츠를 들추고 드러난 늘씬한 배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 물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드디어…… 집에 들어갔나?”
그가 배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느릿하게 입을 열자 그 간질임에 빛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훗, 아니. 그게 아니라 찾아가는 서비스라나, 뭐라나.”
“찾아가는 서비스?”
“응. 그 20년 짝사랑…… 종지부 찍는다고.”
그런데 그 순간, 아랫배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오던 승현의 입술이 갑자기 그녀의 피부를 떠났다.
“뭐라고? 짝사랑 종지부?”
갑작스러운 승현의 반응에 놀라 빛나도 팔을 짚고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갑자기 왜 그래?”
빛나가 묻자, 그의 입에서 복실의 ‘찾아가는 서비스’에 대해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를 듣고 만다.
“홍수, 가뭄, 눈사태 등등…… 자연재해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지 않는 한.”
“……않는 한?”
“걘, 반송이야.”
그녀는 잘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반문했다.
“뭐라고?”
“수, 취, 거, 부, 라, 고.”
헐.
빛나의 입술이 놀라움과 기가 막힘으로 서서히 벌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기도 전에 그 수취거부에 대한 여파가 그들을 덮쳐왔다.
띡띡띡- 띠리릭!
도어록이 열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놀란 빛나는 자신의 몸 위에 있던 승현을 발로 확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그는 순식간에 침대에서 나가 떨어졌다.
쿵!
“으아악-읍!”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그녀가 틀어막았다.
그러곤 아직까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사태 파악도 못 한 그를 무작정 드레스 룸으로 밀어 넣어버린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승현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기회도, 뭐라 반박할 여유도 없었다.
드레스룸이 확 닫히고 나서야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진지 알았다.
그 ‘찾아가는 서비스’가 수취거부로 여지없이 반송되어 돌아온 것이다.
“아오! 젠장! 젠장! 젠장! 으아아아-악!”
20년의 한과 분노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외침이었다.
“아니, 복실아! 왜 돌아온 거야?”
“으아앙- 언니!”
하지만 그런 복실에게 자그마한 동정도 느낄 수 없는 게 바로 승현의 입장이었다.
이렇듯 헐벗은 몸으로 드레스 룸에 갇혀 있어야 하는 이 어이없는 상황의 원흉이었으니까.
“아니, 나 진짜 이해 안 되네. 내가…… 여기, 이렇게 있는 게 잘못된 거야? 황금 같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에 안 들어가고 남의 집에 노숙하는 쟤가 잘못된 거지!”
열 받아 드레스 룸을 나서려는데 빛나가 들어와 그를 이끌었다.
그제야 승현은 드레스 룸에서 나오며 궁시렁댄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기 때문이다.
“그래. 안 그래도 내가 이 이야기 좀 하려고 했어. 왜 내가…….”
“쉿. 지금 복실이 화장실 갔어. 빨리 나가.”
“뭐라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승현은 순식간에 빛나에게 내몰려 현관 밖으로 쫓겨나버렸다.
잠시 얼음이 되어 서 있는데 다시 문이 열리며 그의 야상이 훅 던져졌다.
그러곤 다시 현관문이 쾅, 닫힌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휭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 빛나로 인해 달아올랐던 몸은 그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았다.
“헐, 나 쫓겨난 거임?”
세상에, 진짜 꿈이 아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처참하게 내던져진 순간이었다.
***
“아오! 성질나서 잠을 못 자겠네, 진짜!”
승현은 이불킥을 하고 일어나 씩씩댔다.
“아니, 왜 내가 쫓겨나야 되는 건데?”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자 친구가 없는 상황에서 홀로 보내는 이브는 그저 불쌍한 정도겠지만,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보내는 이브는 지지리 궁상이었다.
한마디로, 그가 지금 지지리 궁상이란 말이다.
“아니, 내가 이러려고 연애했어? 살다 살다 여자 친구 집에서 쫓겨나 보긴 또 첨이네. 그것도 인간 강복실 때문에.”
쫓겨난 게 몇 시간 전인데도 빛나는 이렇다 할 전화 한 통 없다.
복실과 둘도 없는 단짝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게다가 그는 이렇게 조금 전 달아 오른 몸이 아직까지 식고 있지 않은데 말이다.
“에라, 운동이나 해야겠다.”
넘치는 에너지는 발산하지 못해 몸이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눈앞에 그토록 달콤한 그녀를 두고도 제대로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돌아섰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승현은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난 후 거실에 있는 러닝머신엔 가지도 못한 채 다시 침대로 돌아와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빛나에게 전화를 할 수 없으니 화살이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니, 형은 왜 거기까지 찾아간 애를 그냥 돌려보내?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븐데, 오늘은 좀 놀아주지!”
그야 말로 목숨을 건 활시위가 아닐 수 없다.
[너, 미쳤냐.]
“어, 내가 오늘 좀 정신줄을 놓으려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솔직히 복실이 정도면 집안 좋아, 인물 좋아, 머리 좋아, 부족한 게 없잖아?”
[걔 넘치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아니, 왜 상관이 없어? 형도 알 건 다 알잖아? 걔가 20년 동안 형만 봐온 거!”
[뭐가 불만이야.]
“다 불만이지! 뭐가 좋다고 바보같이 형만 쳐다보고 있는 복실이도 불만이고! 모른 척 시종일관 무시하는 형도 불만이고! 그것 때문에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 내 상황도 불만이고!”
[잠이나 자.]
열 받아서 줄줄이 쏘아대는 승현의 자극에도 불구하고 핸드폰 저편의 승주는 여전히 억양 없는 목소리로 한 번에 두 마디 이상을 하는 법이 없었다.
제아무리 형이라지만 이럴 땐 정말 사람이 맞나 싶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섬뜩한 생각.
“설마, 혹시 형…….”
[뭐, 또.]
“남자한테……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그러는 건 아니지?”
[너 거기 어디냐. 외롭다고 했지? 내가 가마.]
“헛, 아니야! 아니야!”
[간다고. 기다리라고.]
승현은 다짜고짜 핸드폰을 끊은 후 재빨리 그것을 침대로 던져버렸다.
열 받은 승주가 핸드폰에서 뛰쳐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이 우울한 크리스마스이브가 그 생애 마지막 이브가 될 뻔했다.
그런데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가뜩이나 기다리라는 승주의 살벌한 목소리에 몸서리가 쳐지는 판국에 갑자기 벨소리가 울리자 승현은 화들짝 놀랐다.
“뭐야, 진짜 온 거야?”
헐, 진짜 큰일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놀란 승현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두서너 발자국 물러났다.
그런데 또 한 번 벨소리가 울려왔다.
이젠 안 나갈 수가 없다.
벨소리의 주인공이 진짜 승주라면 굳이 그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충분히 뚫고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 따른 부수적인 피해는 승현이 감수하며.
그는 재빨리 거실로 나가 인터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벨을 누른 이는 승주가 아니었다.
“빛나?”
세상에나, 그녀를 이렇게 작은 인터폰 모니터로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격하게 반응했다.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리는 망설이는데 망할 놈의 발은 이미 그녀에게로 향하고, 빌어먹을 손은 이미 문을 열어버렸다.
소리 없이 열린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새벽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승현이 잠들지 못했듯 빛나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미안, 복실이가…… 이제 막 잠 들었어.”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았던가.
귓가를 울려오는 그 속삭임에 승현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탐스러운 그녀가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감히 손을 뻗질 못했다.
그녀의 피부에 닿는 순간, 다시는 거둬들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고했다.
그 어느 때보다 낮고,
“너, 이 선 넘어오면.”
그 어느 때보다 섹시한 목소리로,
“……나 이젠…… 못 멈춰.”
하지만 빛나는 망설임 없이 그 선을 넘어서며, 거침없이 승현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바라던 바야. 절대…… 멈추지 마.”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