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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마세요-131화 (13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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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로제의 숨을 모조리 삼켜 다시 채워 주려는 듯 입을 맞췄다. 눈물이 섞여 흘러들어왔는지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다.

‘당신, 울보였네.’

로제는 웃음을 닮은 울음을 참으며 그의 팔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헤이번의 목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등 뒤에 침대 시트가 닿았다. 어느새 그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오늘은, 흐윽……. 플리타가 방해하지 않을 것 같은데.”

로제는 그와의 입맞춤 끝에 잠시 입술을 떼고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헤이번 역시 피식거리며 웃더니 눈물을 툭, 떨어뜨렸다.

그녀의 손이 그의 헝클어진 머리로 향했다. 햇살을 머금은 그의 금발 머리가 눈부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제 다갈색 머리는 너무 평범해 보여서 조금은 신경이 쓰인 적도 있었다.

저보다 훨씬 잘난 남자라서.

언제든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이 저로 하여금 그를 떠나보내게 했던 건지도 모른다.

단순히 선왕비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이 남자가 제게 너무 과분해서.

“……안아줄래요, 헤이번?”

이 눈물 많은 남자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로제는 최대한 밝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헤이번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숨길 수 없는 열망과 그녀에 대한 염려가 뒤엉켰다.

“난 괜찮은데. 당신 아이까지 낳았다고요.”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이지 말라면서요.”

로제가 망설이는 헤이번을 향해 말했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 살 거야. 안 죽을 거예요. 꼭 살아서, 당신이랑 플리타랑 같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사랑만 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갈 거야. 그녀가 울먹이다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은 고스란히 헤이번에게 삼켜졌다.

“응, 그렇게 살자. 우리…… 그렇게 살자, 로제.”

그는 로제의 뺨을 감싸고는 살짝 입술을 뗀 채 속삭이듯 말했다.

……난 절대 당신 안 놓칠 거야.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아.

그러니까.

당신도, 나 놓지 마.

* * *

“엄마!”

아침이 밝자마자 우다다다, 발소리가 들리더니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베로니카와 함께 들어온 플리타가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눈을 비비며 냉큼 침대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이는 곧 침대 근처에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제가 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곤히 자고 있는 걸 본 탓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어깨 부근에 어젯밤에는 없었던 붉은 반점도 생긴 상태였다.

“어, 엄마…… 더 아픈…….”

“쉿, 플리타. 엄마 괜찮아.”

아이가 로제를 보고 놀라서 울먹이려는 순간, 로제의 옆에 누워 있던 헤이번이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몸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어머나!”

플리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베로니카가 깜짝 놀라 뒤로 돌아보았다. 비록 상반신만 벌거벗은 상태이지만 그녀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러가 있거라.”

조금 늦게 들어온 하녀장이 그런 베로니카를 보고는 혀를 차며 나직하게 말했다. 베로니카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조아리고는 침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소란이 벌어졌지만, 헤이번은 관심조차 없는지 로제의 어깨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침대 위로 엉금엉금 올라가더니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그를 향해 물었다.

“엄마 이제 진짜 괜찮아요?”

“그래.”

“근데 왜 아직도 자요? 어깨에 생긴 빨간 상처는…….”

“그건…… 아빠가 엄마를 많이 사랑해서 남겨둔 거야.”

“……사랑해서?”

“응.”

헤이번은 낯 뜨거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 뒤, 하녀장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하녀장이 가운을 챙겨서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전하.”

“음……. 아침은 로제가 깨어난 뒤에 같이 하겠네.”

“주방장에게 그리 말해 놓겠습니다. 그럼 공녀님은…….”

“어? 나도 아빠랑 엄마랑 같이 먹을래!”

플리타가 헤이번과 하녀장의 대화를 열심히 귀 기울여 듣다가 냉큼 대답했다. 헤이번이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대로 안아 들고 침대 밑으로 내려섰다. 그러자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제 아빠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빠가 엄마 많이 사랑한대요.”

“응.”

“나도 엄마 많이 사랑해요. 그리고 아빠도.”

“나도…… 플리타, 너를 많이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말이 아직은 어색했다. 기억을 잃은 동안 감정을 죽인 채 살아온 터라 거기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부터라도 제 감정을 언제 어디서든 솔직히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기에.

……사랑하고,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가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기에.

헤이번이 플리타를 안은 채 아이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금 까르르 웃었다.

“…….”

곤히 잠들어 있던 로제의 귓가에도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열렸다.

모로 누워 있던 터라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 헤이번과 플리타. 그들을 보는 로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가 아빠의 품에 안긴 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름대로 제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작게 웃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이의 얼굴 가득 번진 웃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나 빼고, 둘이 뭐 해요?”

로제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하녀장이 깜짝 놀라 침대로 다가왔다. 헤이번 역시 플리타를 안은 채로 몸을 돌리더니 서둘러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 몸은?”

“괜찮아요. ……좋은 아침이에요, 헤이번. 잘 잤니, 플리타?”

로제는 하녀장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앉은 뒤, 헤이번과 플리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하녀장이 그녀의 등 뒤에 푹신한 쿠션을 여러 개 받쳐 준 덕분에 일어나 앉아 있는 게 한결 편했다.

“응. 엄마도 잘 잤어? 이제 안 아파?”

플리타는 헤이번에게 저를 내려달라는 듯 손짓하더니 이내 그가 침대 위에 내려주자마자 로제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냉큼 로제의 이마에 제 손을 가져갔다. 아프면 이마에 열이 있는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엄마 열 없지?”

“응.”

아이는 한 손은 로제의 이마에 대고 다른 손은 제 이마에 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가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그것 봐. 엄마 안 아파.”

“코피도 안 나?”

“응.”

“다행이다아아.”

플리타가 두 팔 벌린 로제에게 쏙 안겨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침대를 둘러보고는 으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엄마 지켜주라고 인형들 다 가져다 놨어.”

“그랬어? 어머, 정말이네.”

로제는 플리타를 안은 채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 웃었다. 자신이 만들어주었던 인형들을 전부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가만히 웃던 로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헤이번과 눈이 마주쳤다. 계속 그녀를 보고 있었는지, 그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간밤에 펑펑 울었던 남자를 떠올렸다. 울보. 로제가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벙긋거리자 헤이번이 일부러 눈을 부릅뜨더니 피식 웃었다.

그녀는 아이를 토닥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제 벌어졌던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해는 다시 떴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살아야겠다.’

로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 품에 안겨 있는 아이의 온기도,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다정한 웃음도, 그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매일 함께 잠들고, 함께 일어나 저 햇살을 바라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제 이기적인 마음으로 떠나온 길이었다. 죽기 전에 그들을 보고 싶단 마음에 욕심을 부려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그들의 곁에 머무를 수 있었고, 저로 인하여 기억을 잃었던 남자가 기억을 되찾기까지 했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아니, 그래도 욕심을 부릴래.’

사랑은 이기적인 것이다. 누군가를 욕심내는 마음이다. 그가 저를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

그녀는 밤새도록 저를 욕심내던 남자의 울음을 기억했다. 로제는 한 손으로는 플리타를 토닥이면서 다른 손을 헤이번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헤이번이 웃으며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난밤, 제 몸 곳곳을 어루만진 손이었다. 저를 탐하던, 그래, 이기적인 손.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웠던 손.

“나, 치료 받고 싶어요.”

“……응.”

“할 수 있는 건 다 할래요.”

“나도 당신 곁에서 도울게.”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손가락 하나하나, 꽃잎을 닮은 작은 손톱 하나하나, 전부 소중하다는 듯.

그는 결코 제 삶을, 그리고 로제의 삶을 놓아버리지 않을 터였다.

* * *

“전하, 이제 그만 왕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왕좌가 비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선왕비, 아니, 폐비와 반역자 더클렌의 죄목이 세상에 낱낱이 공개되어 혼란이 가중된 상황이니,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포어킨 후작.”

헤이번은 안경을 벗은 뒤에 뻑뻑한 눈 주변을 문지르고는 제 앞에 서서 끊임없이 저를 설득하던 후작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왕실을 향한 그대의 충심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이번 일에서도 후작의 도움이 컸지요.”

“아닙니다, 전하. 제가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오히려 선왕 폐하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하였으니 제 잘못이 큽니다. 더클렌 일가의 음모를 먼저 알아차렸더라면…….”

노귀족의 목소리에서는 회한이 묻어났다. 지나간 세월을 곱씹어 보고, 또 곱씹어 본 모양이었다.

“게다가 대공비께도 제가 잘못을 저지른 터라, 두 분께서 오랜 시간 떨어져 계셔야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들이 저지른 일을 방관하고 함께 동조하는 바람에.”

“후작, 자책은 그만둡시다. 그렇게 따지면 아내를 잊어버리고도 속 편하게 살아온 내가 제일 큰 잘못을 저지른 셈이지요.”

“아닙니다! 어찌…….”

“그리고 후작이 말한 왕위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헤이번은 후작이 펄쩍 뛰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후작은 냉큼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왕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작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헤이번은 노귀족이 쓰러질까 싶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치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통치하시지 않겠다니, 그게…….”

후작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헤이번은 여러 날에 걸쳐 고민했던 바를 털어놓았다.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하!”

“이 나라가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꼴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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