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코피는, 병의 증세 중 하나입니다. 병이 악화되면서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나올 것입니다. 또한 가슴의 통증도 병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동반되는 증세이고요.”
“그게…….”
헤이번은 말문이 막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몸을 웅크린 채 통증을 참던 로제의 모습이 기억났다. 그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치료는? 약을 쓰면 되지 않나?”
헤이번이 가슴속에 차오른 불안을 억지로 밀어 넣은 뒤, 그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자 주치의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참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약이 없는 병입니다.”
“……뭐?”
“마님의 증세로 감히 추측하건대 몇 달…… 남지 않은 듯합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주치의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헤이번은 자신의 귀로 듣고도 헛것을 들은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 없지 않겠는가.
몇 달 살지 못할 거라니.
약이 없는 병이라니.
헤이번의 귓가에 주치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로제가 앓고 있다는 병에 대한 설명이었다. 분명 그것을 듣고는 있는데,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린 뒤, 비틀거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주치의가 설명을 이어 나가다가 입을 다물고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로제.”
헤이번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로제는 그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헤이번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아…… 아니지? 당신이 그런 병에 걸렸을 리 없잖아. 그냥, 그래, 오늘 너무 놀라서…… 그래서 그런 거지? 당신이 보기에는 너무 참혹한 광경이었으니까. 떨리고 무섭고, 내가 걱정되고, 그래서……. 후욱.”
“전하!”
헤이번에게서 울음이 터져 나오자 주치의가 깜짝 놀라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헤이번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로제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파리한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수전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의 손이 마구 떨렸다. 뺨 한 번 만지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녀의 뺨에 손끝을 댔다.
자칫 그녀를 아프게 할까 봐 겁이 난다는 듯 헤이번은 제 손에 로제의 뺨이 닿자마자 제풀에 놀라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온기가 손끝에 스며들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렇게 따뜻한데, 당신이 왜 아파. 당신의 시간이 어떻게 몇 달밖에 남지 않았단 거야.’
“……로제.”
헤이번의 턱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침대 시트에 얼룩을 만들었다. 이제야 뒤늦게 이해가 됐다. 지금껏 봤던 그녀의 행동들.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던 부분들.
지난번 하녀들의 감봉 처분조차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로제는 자신을 모욕한 하녀들을 내보내지 않으려 했다. 그건 단순히 온정을 베푼 게 아니었다.
「그들은 다들 오랫동안 대공 저에서 일해 왔어요. 그만큼 일에 능숙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해고하고 새로 뽑으면…….」
몇 달 지나면 본인은 이곳에 없을 테니, 그런 자신 때문에 일 잘하는 고용인들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로제에게 직접 묻지 않고도 그녀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늦게.
이제야.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치료법은 정말 없나?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좋아. 아예,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건가?”
헤이번은 로제의 뺨을 제대로 만지지도 못한 채 두 손을 꽉 움켜쥐고는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로제에게로 향한 상태였다.
그의 질문을 받은 주치의가 뒤편에서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아직은…….”
“아니야. 없다고 단정하지 말게.”
헤이번이 주치의의 말을 끊고 몸을 돌렸다. 그의 푸른 눈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무너지지는 않았다.
“세상은 넓어. 자네가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닐세. 하지만…… 자네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지 않나.”
“물론 그렇습니다, 전하.”
주치의는 헤이번의 말에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순순히 수긍했다. 그는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는 결코 오만하지 않았다. 또한 이제야 겨우 재회한 주인 부부의 안타까운 사정에, 그 역시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는, 이곳 괸터스 왕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라도 치료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 오래되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치료법이 존재할 수도 있고. 그래,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거야!”
헤이번은 고개를 마구 끄덕인 뒤, 주치의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양쪽 어깨를 잡고 절박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로제를 살려주게, 선생.”
“……전하.”
“제발 부탁이야. 그녀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어. 나도, 아이도 안 돼.”
늘 냉철하던 푸른 눈은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핏발마저 서 있었다. 주치의는 그런 헤이번의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주인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 * *
“으윽…….”
로제가 몸을 모로 돌리다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심하게 두드려 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파. ……아파.’
홀로 아픈 건 서러운 법이다. 수시로 찾아드는 통증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통증이 잦아들 때까지 혼자 견뎌야 할…….
“로제, 아파? 잠깐만. 어디가 아픈 거야? 여기?”
그 순간이었다. 따스한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러더니 그 손은 그녀의 손과 다리, 여기저기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로제가 느끼는 통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겠다는 듯.
“……헤이번?”
로제는 제 몸을 주물러 주는 손길에서 익숙함을 느끼고는 힘겹게 눈을 떴다. 헤이번의 모습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와 초췌한 얼굴, 그리고…… 미처 갈아입지 못한 옷차림도.
“아! 왕궁에 갔던 일은 어떻…….”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제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명치 끝에서부터 퍼져 나간 통증에 곧바로 다시 몸을 웅크리고 말았다.
“누워 있어, 로제. 일어나려고 무리하지 마.”
“……하지만.”
“아직 동이 트려면 멀었어. 누워. ……그리고 일은 잘 끝났어. 선왕비와 공작도 왕궁 지하 감옥에 투옥됐고.”
“당신 다친 데는, 없어요?”
로제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질문을 받은 헤이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곧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야.”
로제가 그 대답에 안도한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헤이번은 함께 웃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침대 머리맡의 램프 불빛에 비친 그의 표정을 확인한 로제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헤이번, 당신 표정이 왜…….”
그제야 자신이 쓰러졌었다는 걸 기억했다. 저를 부르던 아이의 목소리가 기억의 끝이었다. 아마도 그 뒤에 주치의가 제 몸을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알았나 보네요.”
로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헤이번은 어금니를 악문 채 침묵하다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 숨기려고 했어?”
“아니. ……말하려고 했어요. 조금만 더, 이렇게 지내다가.”
“저번처럼 또 그렇게 몰래 떠나려고 한 건 아니고?”
“…….”
그의 물음에 로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란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또다시 도망칠 생각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헤이번과 플리타에게 자신의 끝을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무작정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안해요.”
로제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또다시 신음이 새어 나오려 했지만, 목구멍 밑으로 간신히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은 채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말대로 동이 트려면 멀었는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해요, 헤이번.”
그녀는 그 밤하늘을 눈에 담고는 시선을 돌려 헤이번을 보았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평생 울 일이 없을 것 같은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나 유쾌한 사람이라 그랬고, 다시 만났을 때는 무심하고 냉정한 사람이라 그랬다.
그런데 그랬던 남자가 제 앞에서 이렇듯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를 보던 로제의 녹색 눈동자 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손끝에 묻어나왔다.
“울지 말아요. ……나 아직 안 죽었어.”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헤이번이 고개를 들더니 꾹꾹 눌러 참았던 말을 내뱉듯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
“헤이번.”
“죽는다는 말,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나는…….”
헤이번은 제 뺨을 어루만지던 로제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너무 힘을 준 탓에 손이 아릿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턱 밑으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나는 아니야. 나는, 못 받아들여. 당신은 받아들였을지 몰라도…… 나는, 그리고 플리타는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 아니, 끝까지 그런 준비는 하지 않을 거야.”
“그러지 말아요. 그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요.”
로제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게는 시한부 선고 이후 그것을 받아들일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그 얘기를 들은 이 남자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걸 알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래도 그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그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제게 남은 시간을 이렇게 울면서, 절망한 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 또한 제 욕심인 것이다.
“헤이번. 나는…….”
“제발 부탁이야.”
그리고 그 또한 그의 욕심을 부리는 것뿐이었다. 헤이번은 몸을 일으켜 로제를 품에 끌어안았다. 절박한 몸짓은 그녀를 끌어안고, 또 끌어안아도 부족하다는 듯 계속 그녀를 끌어당겼다.
“부탁이야, 로제. ……살아. 살아서, 내 곁에 있어.”
헤이번의 울음 섞인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저 역시 그럴 수만 있다면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각자의 욕심이 바라는 건 사실 한 가지였다.
하지만 그 한 가지가 그들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로제는 저를 안은 헤이번의 가슴팍을 떠밀며 다시 입을 열려 했다.
“헤이번, 내 말을 좀 듣고…….”
바로 그때, 헤이번이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로제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등을 끌어안은 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숨결이 새어 나가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아니, 조금이라도 그녀의 숨결이 새어 나가는 것조차 겁이 난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