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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번, 네가 만약 이 편지를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이미 죽은 이후겠지.]
“이게…….”
헤이번 역시 편지의 첫 문장을 보자마자 충격을 받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리비어스가 남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글자도 놓칠 수 없다는 듯 훑어보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에 혹시 자신이 보지 못한 뭔가가 있나 싶어 몇 번을 살피기도 했다.
“……엄마.”
“쉿.”
그런 헤이번의 모습이 낯설고 이상했는지 플리타가 로제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불렀다. 로제는 아이를 다독인 뒤,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형의 유서나 다름없는 편지를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그녀는 아이를 재차 다독이고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헤이번.”
“……로제.”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그의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시선이 너무나 아팠다. 로제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의 뺨에 손을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로 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로제는 가만히 그를 끌어안고는 그의 가슴팍에 제 볼을 댔다.
그러자 헤이번이 그녀를 꽉 끌어안고 그녀의 정수리에 고개를 묻었다. 아주 작은 들썩임. 그리고 그녀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흐느낌이 이어졌다.
로제는 사랑하는 남자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기를, 그의 아픈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제가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런 그를 힘주어 꼭 끌어안았다.
* * *
“마님!”
“공녀님!”
로제와 플리타가 헤이번과 함께 비밀 통로를 통해 나오자마자 집사와 하녀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괜찮으신지요?”
“괜찮네. 그보다 집사와 하녀장, 두 사람 모두 무사하니 다행이야.”
모두가 힘을 합하여 왕실 기사단과 맞서 싸우는데, 저와 아이만 몸을 피했다. 플리타는 어리니 당연히 보호를 받아야겠지만, 자신은 그렇지도 않은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부끄러웠다.
그런 로제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하녀장이 그녀답지 않게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님께서 무탈하신 것이 제일 다행이지요. 만약 마님께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다면, 대공 전하께서 어떻게 되셨을지 상상도 하기 싫네요.”
“그건 하녀장의 말이 옳습니다, 마님.”
집사가 그 말에 동조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로제는 저를 다독여주는 두 사람의 말에 민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워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웃을 수 없었다. 갑자기 느껴진 가슴의 통증 때문이었다.
“흐윽…….”
“마님?”
누군가가 가슴속을 꽉 움켜쥔 채 비트는 것 같았다. 숨통이 막히고 폐가 쪼그라드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 두근두근 힘차게 뛰어야 하는 심장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마님!”
그래서 하녀장과 집사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도 로제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몸을 앞으로 숙인 채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킬 뿐이었다.
“엄마!”
귓가에 저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서둘러 허리를 펴려 했다. 플리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러나 한번 무너져버린 몸의 상태는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흐으, 괜찮…….”
어떻게든 플리타를 안심시키려고 입을 연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익숙한 온기와 체향이었다.
“……헤이번.”
“괜찮아, 로제? 야닉, 어서 주치의를 불러오게!”
그녀를 부축하여 안은 사람은 당연히 헤이번이었다. 그는 자꾸만 허물어질 것처럼 주저앉으려는 로제를 부축한 채 집사를 향해 큰소리로 명했다. 집사가 부랴부랴 나가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흐잉…….”
그리고 놀란 아이가 울먹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로제는 저를 안은 헤이번의 팔을 잡고 속삭이듯 작게 입을 열었다.
“……플리타부터 달래줘요, 헤이번. 놀랐을 텐데.”
“당신은…….”
“난 괜찮아요.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랬나 봐요.”
로제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통증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사라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미약하게나마 통증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조금 전처럼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로제.”
“정말이에요. ……플리타, 많이 놀랐니? 미안해. 엄마가 잠깐 배가 아팠어.”
그녀는 저를 보는 헤이번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플리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이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그제야 우다다다, 달려와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 바람에 로제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헤이번이 곧바로 그녀를 등 뒤에서 받쳐준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로제는 제 다리를 끌어안은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플리타가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안 아파?”
“응.”
“근데 좀 전에는 왜 아팠어?”
“엄마가 아까 숨바꼭질하느라 너무 긴장했었나 봐.”
로제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플리타가 작은 입을 벌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헤이번이 그런 로제와 플리타를 번갈아 보다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아이를 토닥이는 헤이번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집사는 주치의를 부르러 간 탓에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새파랗게 질린 하녀장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 때문에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마님. 제가 마님의 상태를 세심히 살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녀장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로제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말한 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바로 그때 밖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마님께서 아프시다고요?”
주치의가 다급히 집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로제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뜨였다. 그와 동시에 헤이번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치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갑자기 흉통을…….”
“아니, 이제 괜찮아졌어요. 나 때문에 선생께서 괜한 발걸음을 했군요.”
로제는 헤이번의 말을 중간에 가로채고는 서둘러 대답했다. 그러자 헤이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일단 로제의 몸 상태를 봐 주게. 이런저런 일을 겪었으니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 당연할 터.”
“그러지 않아도 돼요, 헤이번. 나는 정말 괜찮아요.”
“로제…….”
“진짜예요. 게다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나중에…… 일이 다 해결되고 나면, 그때 제대로 진료를 받을게요.”
로제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떼었다. 그러고는 헤이번의 대답을 듣지 않고 냉큼 몸을 돌려 창가로 향했다.
‘진료를 받을 수는 없어. 아직은……. 아직은 준비가 안 됐어.’
헤이번과 플리타에게 제 몸 상태에 대하여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았다가 자칫 제 병이 드러나게 되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고 창가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왕실 기사단은 물러간 건…….”
두서없이 꺼내던 말이 입 속에서 흩어졌다. 다름 아닌, 창문 밖으로 보인 풍경 때문이었다.
“…….”
로제는 창가로 다가가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말아쥐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정원 곳곳에 불을 질렀던 것인지 정원사가 애써 가꿨던 꽃과 나무가 잿더미가 된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잿더미 사이로 피범벅이 되어 죽은…….
“보지 마, 로제. 그러다가 또 충격 받아서 몸이 안 좋아지면 어쩌려고.”
헤이번이 안고 있던 플리타를 하녀장에게 맡긴 뒤, 냉큼 다가와 로제와 창문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창을 등진 채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놀랐지? 하지만 우리 쪽 사람들보다는 왕실 기사단의 피해가 컸어. 그러니…….”
헤이번의 사람들이 피해를 덜 입은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선왕비가 보낸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와 적이 된 자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의 목숨이란 건, 어느 누구의 것을 막론하고 귀중하니까.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이렇듯 한순간 사라져버리는 것만큼 비통한 일은 없으니까.
“이렇게까지 해서 뭘 얻으려 한 걸까요.”
로제는 헤이번에게 몸을 기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그게 누구를 향한 말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선왕비. 헤이번은 한때 제 형수이기도 했던 여자를 떠올리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게.”
로제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리비어스가 남긴 편지의 내용이 문장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생생히 되살아났다. 아마 평생 기억에서 지우지 못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의심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그러면서도 동생을 염려하여 편지를 남길 수밖에 없었던 제 형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자벨라가 원한 건 자신이었다. 그것을 모를 만큼 둔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둔한 자라 할지라도 언제나 저를 향하던 여자의 집착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나 때문에, 형이.’
리비어스에 대한 죄책감으로 헤이번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로제가 그의 가슴팍에 대고 있던 뺨을 떼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헤이번.”
마치 그의 속내를 고스란히 읽은 것처럼, 그녀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 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팔을 잡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의 탐욕으로부터 빚어진 비극이에요. 당신이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
“하지만 당신이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내가 아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당신이거든요.”
헤이번은 로제의 말에 피식 웃고는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손을 내린 그의 표정이 조금은 편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정중히 숙녀에게 예를 표하는 신사의 모습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내 부인께서 그렇다는데, 기꺼이.”
* * *
“이게 말이 됩니까! 조사를 하러 간 왕실 기사단을 제압하다니요!”
“아무리 대공이라 해도 이건 월권입니다! 아니, 월권을 넘어 반역입니다! 정말 선왕 폐하의 죽음에 대공이 개입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죄를 감추려고…….”
귀족들이 앞다투어 떠들어댔다. 그들의 흥분한 목소리를 듣던 더클렌 공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들 중 일부는 공작의 명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전후 사정을 모르는 귀족들 사이에서 공작이 바라는 대로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 어려울 건 없었다.
그저 말 몇 마디면 충분했으니까.